▲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룻 1:8-18 강해 계속

나오미는 그렇게 고매한 인격과 더불어 말씀을 가르쳤을 것이고, 룻은 한 말씀 한 말씀 잘 배워나갔다. 그러므로 그녀는 시어미를 붙좇아 끝까지 갈 수 있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남아메리카에 건너갔을 때 그들은 가련한 본토인을 너무 악하게 대우했으므로 본토인 인디언들은 스페인 사람들이 전파하고자 하는 신을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는 그들의 악한 행동들이 그들이 믿는 신은 악마일 것이라 생각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와 반대로 며느리들 앞에 하나님의 고상한 냄새를 풍기는 방식으로 살았다. 그래서 비록 남편은 잃었지만 남편과 시어미가 믿는 하나님을 놓치고 싶지 않게 됐다. 이제 룻에게는 하나님이 그의 남편보다 중요했다. 그리고 그녀의 귀한 점 한 가지는 하나님과 실제로 함께하기 위해서는 시어미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 것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룻에게서 지혜를 배워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우 시어미를 떠나면서 어디를 가든 하나님만 믿으면 된다고 공언하는가? 그들은 오르바와 같이 시어미를 떠나면서 어디를 가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오늘 그런 종류의 말들을 너무나 많이 듣고 산다. 그러나 룻은 시어미를 떠나면 실제로 신앙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룻이 마음대로 하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시어미를 붙좇았기에 그 나라에 들어와 보아스에게 영접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아무렇게나 행하고 아무렇게나 길을 가도 주님을 따를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이여, 룻에게서 배우라! 이렇게 한 순간 어떤 사람과 이별하는 것이 영원히 하나님과 그분의 기업에서 분리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어디서나 섬길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 어떤 사람과의 이별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과의 교제에서 영원히 끝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나는 신약에서 아시아의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떠난 일이며 많은 동역자들이 그를 떠난 것이 이런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적어도 그 일이 성경에 기록되었다. 그들은 바울을 떠난 것이지 하나님을 떠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영은 그들이 사역자를 떠난 것을 적극적인 것으로 증거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나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모든 것이 결국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적어도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증거가 필요하다.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나오미는 룻의 단호한 결단을 듣고 더 이상 만류하지 않았다. 하나님도 우리에 대하여 같은 식으로 대하신다. 예루살렘에 올라간 바울은 하나님의 만류를 들었다. 그러나 그가 죽을 것도 각오하자 하나님은 더 이상 만류하지 않으셨다. 이러한 충성은 하나님과 사람을 감동시킨다.

룻의 순종에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몇 가지 배워야 할 시험에 대하여 보겠다. ①그녀는 시어미의 가난과 슬픔에 의해 시험을 받고 통과했다. 룻이 시어미를 따르는 것을 결정한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어미는 자신의 남편을 잃고 아들 둘을 잃었다. 그리고 한 푼 없이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는데 룻이 시험받지 않겠는가? 나는 과거 이런 체험이 있다. 주님을 좇아 나아가는데 아무 것도 없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도 나를 떠나갔다. 룻은 결국 장래를 계산해야 하는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눅 14:28).

②그녀는 시어미의 냉담한 얼굴도 시험으로 통과해야 했다. 나오미는 룻이 따르고자 하는 것을 전혀 부축하거나 격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룻을 낙담케 하는 방식으로 말했던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시험인 것이다. ③또 하나의 시험은 같은 입장에 있는 오르바가 떠난 것이다. 이는 가려고 하는 사람에게 힘이 빠지게 하는 요인이 된다. ④마지막으로 나오미의 침묵이다. 그녀는 룻이 끝까지 따르겠다고 하자, 그러면 가 보자, 하고 격려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고 한다. 이러한 본은 오늘날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자들에게 유익한 것이다.

19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 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베들레헴에 돌아온 나오미와 룻은 온 성읍 사람들에게 영접을 받았다. 그녀는 사람들이 나오미가 아니냐고 말할 때 마라라 칭하라고 하였다. 그녀는 풍족한 상태에서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나갔다가 다 잃고 이방인 며느리 하나만 데리고 초라하게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나님께 징벌을 받았고 전능자가 자기를 심판하셨다고 고백했다. 이 또한 믿음의 용기요 겸손하게 낮아진 사람의 언사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때 여러 영적인 말로 자신이 믿음이 그렇게 나쁘지 않으며 그러한 일을 통하여 얼마나 하나님의 주권을 체험했는가를 말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변명하는데 급급하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러한 징계의 손을 통하여 확실히 은혜와 유익을 얻었다. 그것은 배움이 있는 자의 말투이다. 우리를 겸손케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당하여서는 우리의 심령을 겸손케 해야 하며 우리의 형편이 낮아졌을 때에는 우리의 마음도 낮아져야 한다.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정당하게 초대된 고통은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매튜 헨리).

2:1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에 유력한 자가 친족으로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1. 룻기의 또 하나의 주인공 보아스가 소개되는 장면이다. 친족이란 가까운 자, 특별히 기업을 무를 의무를 지닌 혈족 관계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유력한 자란 히브리어로 ‘이쉬 깁보르 하일’로서 ‘용사(깁보르)’ 또는 ‘재물이 많은 자(하일)’의 뜻을 가지고 있으니 보아스는 재물이 많으며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도울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룻은 시어미 나오미에게 밭으로 가서 이삭 줍는 일을 하게 해달라고 구했다. 이는 룻의 효성과 부지런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기회는 어느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충성되고 부지런한 사람에게 찾아온다. 그녀의 이러한 귀한 효심과 근면성이 유력자 보아스를 만나 장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영예를 차지할 기회를 얻게 한 것이다.

2. 3절에서 룻은 이삭을 줍다가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이 되는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다. 여기서 ‘우연히’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일이 맞아 떨어지다’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사실상 우연이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우주와 하늘과 땅과 만물이 우연히(by chance) 생겨났다고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머리털까지도 세고 계신다. 우리는 우연히 이 땅에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예정하심을 입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수천만의 사람들을 영원 전에 미리 아시고 그들을 예정하신 것이다. 우리는 우연히 예수 믿고 신자가 된 것이 아니다.

대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매우 자연스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인도하신다. 우연히 만난 사람, 우연히 들은 소식, 우연히 닥친 환경인 것 같았지만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 돌아다보면 거기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이 개입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내가 주님을 믿게 된 것도 대학생 때 우연히 어떤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통해 복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생활하던 자매를 소개받아 결혼을 하게 되었다. 또 어느 날 우연히 한 형제가 내 사무실에 찾아와 몽골의 상황을 말해주었고 그로 인해 나는 해외 선교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우연 같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길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룻도 하나님이 자신을 인도하시는 손길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을 뿐 당시 일어난 일이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척 스미스의 룻기 강해).

3. 벌써 룻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워 생활 가운데서 실행하고 있었다. “내가 뉘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믿음이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신 24:19-22).

그녀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이러한 법이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가서 이삭을 줍다 보면 경건하여 말씀대로 실행하여 자기에게 자비를 베풀 어떤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신뢰를 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