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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삼 목사 설교] 사데 교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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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1.12.03 13:47   

날짜: 2011년 11월 27일
본문: 계시록 3: 1~6
설교: 김병삼 목사
제목: 사데 교회에게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크리스천투데이 DB
계시록 3: 1-6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자로다.
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라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사데 교회에 찾아오신 주님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자로다.

사데는 아디라라고 하는 지역에서 남동쪽으로 48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내륙 도시로서 양털 염색과 옷감을 만드는 직물공업이 아주 발달한 도시였다고 합니다. 특히 가까이 있는 팍톨로즈 강에서 생산되는 사금이 유명하였기에 많은 상인이 모여들어 상업적으로도 아주 번성한 지역이었습니다. 여러 내륙도로가 만나는 곳으로 페르시아의 정복자 고레스에 의해 망할 때까지 영화를 누렸던 도시였습니다. 주후 17년에는 지진으로 초토화 되었고, 그 후 5년 동안 세금을 면제해 준 티베리우스 황제 덕택에 재건되었으나 끝내는 영광을 되찾지 못했습니다.
또한 사데 지역은 대부분 높은 암벽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적으로부터 단 두 번 밖에는 점령당한 적이 없을 만큼 완벽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게을러지고 나태해졌습니다. 도덕적으로 문란하게 되고, 퇴폐적인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칭 거짓선지자나 이단의 공격이 없다보니 신앙생활에도 별로 열심을 가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름뿐인 성도와 교회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 라고 주님은 사데 교회를 책망하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록도 역시 오늘 본문의 내용이 전부입니다.
오늘 사데교회에 대하여 너무나 간결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무슨 말인가요? 교회의 조직은 가지고 있으나 그 안에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건물은 있는데 생명이신 주님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죽은 교회입니다.
“이름은 가졌으나” 영어 성경에는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you have a reputation of being alive" or "you have a reputation for vigor and zest"
말씀을 곰곰이 묵상하면서 적용해 보았습니다.
어쩌면 사데 교회가 겉모양이 화려했던지, 큰 교회의 모습일 수 있었겠다.
그 교회에 예배도 있고, 성경공부도 많이 한다는 소문이 났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영적인 몸부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영적인 갈망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행정적으로 사무적으로 완벽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교회에 성령의 역사와 사랑과 수고가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이라는 책에서 필립 얀시는 교회를 이렇게 정의 합니다.
“교회란 나에게 필요한 건 죄짓는 게 아니라 다른 죄인이다”라고 부끄럼 없이 말할 수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함께라면 서로 곁길로 빠지지 않도록 든든히 지원해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무 흔히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교회의 거룩성”이 아닐까요? 교회가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고 끝까지 거룩함을 유지해야 하지만, 완전한 거룩함의 결정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지향하는 것과 거룩하다고 착각하는 것 사이의 심각한 문제가 무엇일까요?
스스로 거룩하다는 착각은 다른 죄인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에서 힘이 되는 것은 다른 죄인 일 때가 많습니다. 아니, 나와 같이 연약한 자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연약함을 서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겉으로는 거룩한 척 하지만 전혀 거룩의 능력을 상실 할 때 이름은 있지만 죽은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처럼 치명적인 책망이 있을까요?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어느 정도의 문제인지 아십니까? 죽은 것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합니다. 가장 절망적인 상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실제 영국 런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다섯 살짜리 어린 여자 아이가 넘어졌는데 손목이 부러졌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울지도 않으면서 엄마에게 "엄마, 내 손목이 이상해. 구부러졌어"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엄마가 놀래서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끝냈지만 참 이상한 일이다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그 부모가 딸을 보니까 절뚝거리며 걷는 것을 보고 병원을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넓적다리뼈에 금이 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여자아이가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후로도 소녀는 사소한 상처가 생길 때가 있었는데 이 여자아이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부모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큰 병원을 찾아 의사의 전문적인 진찰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여자아이의 증상이 신경조직이 잘못되어 전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무서운 병인 겡글리 뉴로파디(ganglineuropathy)라는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병은 아직도 치료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파야 하는데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면, 고통을 느껴야 하는데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거 좋은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아플 때는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아픈데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상처가 나도 상처가 나줄 모를 것이며 병이 들어도 병든 줄 모를 것입니다.
지금 교회가 모양은 있지만 죽어서 아픔도 느끼지 못할 기경에 이른 것입니다. 누가 이야기 해도 듣지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을 보지 못하며 아주 큰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 이상이 없는 것처럼 착각하며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외적인 명성의 특징이 무엇인가요? 하려함입니다. 외적 건물과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행정적인 모습입니다.
중세 교회의 타락이 무엇인가요? 큰 교회를 짓기 위해 면죄부를 파는 죄를 지은 것이죠.
오늘날 한국 교회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합니다. 교인들을 아니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섬겨야 하는 교회가 섬김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죠.
언젠가 청와대 사회정책수석과 목사님들이 모여서 좌담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자유로운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의인은 아니지만 조금 부끄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른 종교에 비하여 우리가 역차별을 당하고 있음을 이야기하면서 교회가 누려야하는 당연한 권리를 이야기 하는데 창피했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중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의 가장 강력한 힘은 무엇을 누릴 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더 이상 빼앗길 것이 없고, 환난과 고난 가운데 신앙을 지키며 한 없이 베풀고 주었을 때 라는 것을 말입니다.

요즘 교회를 보며, 모든 교단들이 그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교권 다툼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교회를 섬기려고, 좀 더 효율적으로 선교하려고 만들었던 조직들이 언제부터인가 권세가 되어 버린 것이고, 그 권위에 도전하며 가차 없이 정죄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제 교회는 그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법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법에 위배되면 법을 적용하기 시작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그 법을 세상 법에 따라 판단 받으려 합니다.
저에게도 그런 유혹들이 참 많이 찾아옵니다.
법으로 이겨보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때로는 “무저항”이 저항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무기일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나의 의가 법으로 증명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의가 살아 있음이 드러나는 것이 살아있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름은 있지만 죽어 있는 교회의 특징이 무엇인가요?
“영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아니 교회를 향하여 분명하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빛과 소금”이 되라는 것이지요.
교회가 가는 곳에 영적인 갈급함이 일어나야 하고, 빛이 가는 곳에 어두움이 물러나야 합니다. 그런데 더 이상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살아있지만 존재감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비참한 일이 없습니다.
도대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와 신앙인들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면, 아니 무시를 받는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벌써 오래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목적이 이끄는 교회”에서 릭 워렌 목사는 새들백 교회를 시작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교회에 나가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고 하지요.
1. 예배와 설교가 너무 지루하고 실제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2, 기존 성도들이 위선적이고 불친절하기 때문에,
3, 교회가 사람들보다 물질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4. 자녀들을 위한 유익한 프로그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을 움직여 가야 합니다. 방향을 제시해야 합니다. 영향력을 가져야 합니다.

바로 이런 교회의 상황에 찾아오신 주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성경의 본문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하나님의 영”이라는 말은 “성령님”을 의미하겠죠? 요한복음 14장에서 성령님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모든 것을 깨닫게 하시가 가르치시며 우리를 돕는 영이십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계시록에서 언급되는 일곱 교회가 될 수도 있지만, 당시 일곱이 완전 숫자를 의미한다면 모든 교회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영이신 예수님.
또한 “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주석에 보면 “교회를 보호하고 책임져야 하는 천사”를 가리킨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은 방향을 지시해 주는 것, 혹은 어둠 속에서 밝히는 존재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사데 교회를 책망하시며, 방향을 제시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사데 교회는 마치 한국 교회를 향해 무섭게 질책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만나교회가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방향을 잘 따라가고 있는 지 말입니다. 불신자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주는 일을 하고 있는 지 말입니다.

칭찬할 것이 없는 교회에 대한 기대. . .
사데 교회는 칭찬할 것이 없는 책망 받는 교회 였습니다. 하지만 책망으로 끝나지 않고 역시 그 교회에 대한 기대로 결론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4-5절의 말씀,
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그런데 그런 사데 교회에 소망이 있고, 우리 주님께서 거는 기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6장 1절이 이렇게 시작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 .”
이스라엘이 가장 패역하고 소망이 없어보이던 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해 가는 때, 하나님께서 걸출한 선지자 이사야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동일한 환상을 주셨습니다. “남겨진 그루터기, 남겨진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소망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요즘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어느 곳에 집회를 가서도 모이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안절부절 하지 못하는 목사님들에게 그런 말을 합니다. “모이지 않은 것 때문에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기에 모인 자들 중에 쓰임 받는 자들이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쓰임 받는 자들을 통해 오는 새로운 부흥이 살아 있는 부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러한 자를 가리켜서 “이기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겠다고 “결코 지우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아주 강한 훈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애정 어린 관심과 자상함이 있습니다. 어쩌면 지중해 연안에 있는 좀 더 안정된 교회들 보다 고린도 교회에 대해 더 열심히 기도하고 노심초사 했을 것 같습니다. 말썽 피우는 사람이 많았기에 더 그 교회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필요성은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솔직히, 자신의 필요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줄 게 별로 없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박해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기본적인 회개를 하려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오직 하나님만이 (나 자신이 아니라) 내게 삶의 길을 가르쳐 주실 유일한 분임을 인정해야 한다. (어쩌면 그래서 예수님은 부자를 천국에 들어가기 가장 힘든 부류로 꼽으셨는지도 모른다.) -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 60p.

“하나님의 소망”
하나님의 소망은 모두에게 있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지만 그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일은 모든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남겨진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들, 남겨진 그루터기를 통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보시고 홍수로 멸망하시기로 작정하셨을 때, 당대의 의인이었던 노아의 가정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 .”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위선적일지 몰라도 거기에 더럽히지 아니한 몇 사람이 있습니다.
"옷을 더럽히지 아니했다"는 말은 세상의 유혹에 물들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열정과 구원의 감격을 가진 성도들로서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당시에 너무나도 문제가 많던 우상숭배에 빠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던 성도들을 말합니다.
퍽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사데 지역에서는 옷이 지저분하면 시민의 명단에서 삭제 시켜버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즉 로마의 시민으로서 품위를 유지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입고 있는 옷이 지저분하고 깨끗하지 못하면 시민의 명단에서 삭제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 할 깨끗함이 있습니다.
하늘의 백성으로서 영적인 거룩함은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모습을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곱 영이 그 분의 오른 손에 있습니다.
소아시아 일곱교회의 생명이 그분에게 있는 것입니다 .
무엇이 소망입니까? 영을 가지신 그 분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교회가 그 분의 영과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과 멀어진 교회는 필연적으로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사데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릴 때입니다. 옛 교회의 터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밖으로 커다란 아데미 신전의 기둥이 보입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큰 신전 옆에 작은 교회의 터를 보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데교회가 예수님의 질책을 받으며, 아니 지금 그 터만 남아 있는 이유가 있다면 신전 옆에 세워진 교회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교회 때문에 신전이 없어져야 할 터인데 공존하며 교회의 영향력이 나타나지못한 것이지요.
그곳에서 예배하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전인데, 우리 옆에 존재하는 우상은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 우리 옆에 서있는 거대한 기둥은 무엇인가?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민감성"의 문제입니다. 화면에서 보이지만 성지순례 단원들이 벽에 붙어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담벼락에는 가시나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담벼락에 서 있는 사람들은 불편하지만 조심하는 모습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시나무가 없는 곳에 자리잡은 사람들은 아무런 경계심 없이 편안하게 땅에 주저앉아 예배를 드립니다. 그 순간 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사데 교회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너무나 편안하고 너무나 부유한 그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경계할 것이 없는, 민감함이 사라진 그들에게서 필연적으로 나타난 것이 타락한 모습, 아니 영향력을 상실한 교회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기대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본문 2-3절을 보세요.
2.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라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면 사데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가요? 3절의 말씀에서 “회개하라”는 말은 무엇을 두고 하신 말씀일까요?
아마도 끊임없이 내려오는 잘못된 악의 씨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은 경건하다는 명성을 얻기 위해 구제를 했고, 오래 기도했고, 금식했습니다.
그리고 금식한 표를 내기 위해 얼굴을 흉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모든 행위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과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마태복음 6장)
사도바울은 초대교회에 있었던 어떤 잘못을 지적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딤후 3:5)
이러한 행위를 한 단어로 말한다면 “위선”입니다. 어원인 ‘hupokrites'는 본래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를 뜻합니다. 나중에는 ’가면놀이‘라는 말로 쓰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위선이 우리 예배 가운데 우리 신앙 가운데 스며들 수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러면 남아 있는 자들을 통하여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일까요? 어떻게 사데 교회가 새로워 질 수 있을까요? 3절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
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라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생각할 것이 있고” “지켜 회개할 것”이 있습니다.
저는 요즘 말씀을 준비하면서 계속해서 느끼는 것인데, 신앙의 문제는 믿음의 문제도 있지만 생각하지 않는 신앙인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믿음을 점검하기 위해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은혜 받았던 때의 기쁨과 감격을 생가해 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은혜를 받았을 때 잊어버렸던 과거의 습관들을 다시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본래 죄로 돌아가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뿌리 깊은 “윈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의 경향이 우리 속에 끊임없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와 기억은 죄로 돌아가려는 우리를 잡아주는 버팀목과 같은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죄를 “무로 돌아가려는 경향”이라고 말을 합니다. 고무줄을 잡아당기면 다시 돌아가려고 합니다. 우리가 회개 했다는 것은 우리의 몸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
우리의 육신의 욕망이 있습니다. 익숙한 죄의 습관들이 있습니다. 잠시만 방심하면 돌아가려는 육체의 욕망을 우리가 더 잘 알지 않습니까?
은혜의 삶을 산다는 것은 팽팽한 영적 긴장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평안함과 기쁨입니다. 은혜의 생활을 한다는 것이, 아무런 노력도 없이 거져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인 갈급함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생각하고”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판의 때가 언제 이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 .”
벌써 잊혀져 가시나요?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
지난 2천 동안의 역사를 생각하지 않아도 2000년 이후에 일어났던 재해만 생각해 보세요.
아이티에서 30만이 넘는, 인도네시아에서 20만이 넘는, 스촨성에서 8만이 넘는, 일본에서만 3만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여러분 한국 전쟁에서 3년 동안 남북이 서로 죽자고 각오하고 싸운 전쟁에서 죽은 사람이 국군과 미군을 합쳐서 20만이 조금 넘습니다.
심판이 날들이 도둑같이 이르면 인간의 목숨 얼마나 허무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축복의 말씀
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6.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사데의 많은 사람들이 옷을 더럽힌 반면, 거룩함을 지키고 회개한 자들, 즉 흰 옷을 입은 자들을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합당한 자가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생명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이름이 새겨진 책을 가지고 계십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의 이름은 거기에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1-15절을 보면,
어느 날 책들이 열리고 죽은 자들이 이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는 누구든지 불 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필립 얀시의 책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에 보면 중증 장애아들에게 헌신한 소아과 의사 위르겐 트로기쉬 박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교회가 사명을 다할 때 생기는 부산물 중 흔히 간과되는 것 하나를 짚고 싶습니다. 우리는 사역의 대상들에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부부 관계를 살려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노인들을 방문하고, 십대 아이들에게 도전을 준다. 하지만 신약 성경을 읽노라면 예수님은 사역하는 자들이 받는 영향에도 똑같이 관심을 두신 것 같다.
72인의 제자들이 돌아와 그들이 거둔 굉장한 결과를 신이 나서 보고하자 예수님은 잠시 함께 기뻐하신 뒤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분명히 예수님께는 그들이 밖에서 하고 온 일 못지않게 제자들 속에 벌어지고 있는 일도 중요했다.
눈물을 먹으면, 눈물을 흘리는 본인 못지않게 그 눈물을 자발적으로 떠맡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

. . . 설명이 좀 필요하네. . .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교회의 명부에 있어도 하나님의 생명책에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0장 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입니다.
오늘 5절 말씀이 얼마나 복되고 확실한 권면의 말씀입니까?
“. .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이 말씀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아시나요? 생명책에서 이름을 흐리지 않겠다는 것은, 살아계신 주님과 우리 관계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호적을 보셨나요? 사망자의 이름 위에 붉게 X로 긋습니다. 흐린다는 것이 바로 그런 말입니다.
또한 더 확실하게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어 성경을 대조해서 읽다 모면 “하나님께서 너희의 이름을 알게 하리라” 는 ‘acknowledge'라는 단어도 사용되고요, “하나님 앞과 천사들 앞에서 너희의 이름을 부르리라”는 말은 ’lead and present'라는 말로도 사용됩니다.
최후의 승리가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본래 ‘시인하다’라는 단어는 희랍어의 ‘호몰로게소’라는 말인데 이는 법정에서 진술되는 모든 것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때에 끝까지 깨끗함을 유지한 자를 주님이 인정하시며, 하늘의 모든 이들이 알게 되는 날이 오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거룩함과 신앙인의 노력들이 드러나지 않는 것 같고, 세상에서 실패하는 것 같아도 결코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최후의 승리를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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