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시 대학살과 바돌로메 축일의 대학살

구한말의 기독교 박해사를 비롯, 로마 시대 이후 기독교회사가 품은 엄청난 학살의 기록들은 그 어떤 전쟁사보다 더 끔찍하다. 그 가운데 한 봉우리에 올라선 시리즈 하나가 오늘 논의된다.

1561년 12월 27일 사도 요한 축제일에 파리에서 2천여명의 위그노들이 장 말로(Jean Malo) 목사를 초청하여 집회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주변 메다흐 성당(Église Saint-Médard)에서 자기 교인들이 이 곳에 참석하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주선한 모임으로 발길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 계속 쉬지 않고 종을 쳐 대며 집회를 방해했다. 위그노 교회에서는 몇 명의 사람들을 성당으로 보내어 종 치는 것을 중단해 줄 것을 요구했는데, 성당 교구의 신자들은 이들을 구타하여 결국 그들 중 두 명을 현장에서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접한 위그노들 가운데 얼마가 흥분을 참지 못하고 무기를 들고 성당을 습격했다. 먼저 성당으로 들어가 가톨릭 교인 몇 명을 살상(殺傷)하였으며, 성당 안의 성상과 스테인드 글라스, 제단을 깨뜨리며 성물 안치소의 성물을 탈취하였다. 그러자 전열을 정비한 가톨릭 교인들은 다음날 위그노 교회를 공격하여 불을 지르고 위그노들의 소유물들을 모두 빼앗았으며, 100명 이상의 사상자(死傷者)를 내고 말았다. 그리고 그 빼앗은 재산으로 성당을 복구하였고, 1562년 6월 14일에 4명의 추기경과 8명의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복구 기념식을 가졌다. 쥬네브에서 깔뱅이 소천하기 이태 전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사건 중 하나이다.

이 사건이 일어난지 300년쯤 후에, 극동(極東) 아시아의 조선(朝鮮)이라는 생소한 곳에서 아주 비슷한 사건 하나가 발발 했더라는 것이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이번에는 이 가톨릭 교회가 도리어 심한 박해를 당하는 양상으로 상황이 뒤집혀 있었다는 것이다. 프랑스 가톨릭이 새로운 지역에서 선교하기를 원하여 보낸 신부들이 이 나라에 대한 접근과 입국, 예배와 선교 활동을 관대히 허용하여 주도록 요청하였으나, 그 지역의 권세(authority)들이 이를 완강히 거부해 버렸다.

불행하게도 이 사건은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고, 바로 저 위의 사건처럼 많은 인명이 상(傷)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그들은 이 16~7세기의 프랑스 가톨릭 교회처럼, 안타깝게도 이 가톨릭 신부들에게 전혀 ‘관용’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종교적 관용? 가히 ‘씨’도 먹히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놀랍게도 여기서 프랑스 가톨릭의 사제 9명이 일시에 죽임을 당하였고, 가슴 아프게도 그들을 따르던 조선인 교도 8000명 이상이 처형되었다. 희생자의 수로만 보자면 메다흐 성당 사건이나 바시의 학살 사건이 아니라 뒤에 나올 바돌로메 축일의 대학살에 비견할 엄청난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 사건을 이름하여 ‘병인박해’라 하고, 이는 곧바로 ‘병인양요’라는 국제적 군사 충돌로 이어져 국가간 분쟁 시리즈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 가톨릭과 신부들의 뒤쪽에 기즈(Guise)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세속 세력, 정확하게 말하면 식민주의로 무장한 제국주의가 백업(back up)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프랑스인들은 그 때, 상대국 조선의 보물들을 많이 들고 달아나는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그 나라 국왕의 서고에서 고서 345권, 그 왕이 정부 재정으로 비축해 둔 은금괴 180 상자 등을 약탈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물론 이에 더하여 살인, 방화, 파괴를 저지르기도 했다.

본말은 좀 뒤죽박죽이고 주객이 좀 바뀌어 있기는 하지만, 주고받으며 치고받는 모양이 상기 사건과 참 많이 닮아 있다. 유사한 요인들이 섞여 충돌을 빚는 과정에서 규모만 사뭇 다르게 터져 나온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 병인년은 서양 그레고리력(曆)으로는 1866년이니, 상기 사건과 이제 이어지는 바시 대학살 사건의 꼭 300년 후에 위치하는 셈이다. 이 프랑스 가톨릭이 자국의 위그노를 박해하고 완력으로 빼앗으면서 배운 것들로 저 극동으로 건너가, 상황 적용의 무대를 옮겨 세우는 데에 당시의 속도로는 약 300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로마 가톨릭은 여지없이 이 문제에 대하여서 예의 그 ‘종교적 관용’을 소리 높여 외치게 된다. 물론 이번에는 자신들이 입은 피해를 사과하고 보상하라는 쪽의 항의 어투이다. 이만하면 이들 가톨릭에 있어서 이 ‘관용’이라는 아이디어의 편리한 쓰임새가 어떠한 것인지 우리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1561년 12월, 이 지역 개신교인들에 의해 성당이 약탈 당했는데 이 사건을 성 메다흐 소동 사건이라 함”이라고만 적혀 있는 역사 안내판. 개신교도 1백여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임에도 개신교들에 의한 소동 사건이라고만 언급하고 있어, 가해자는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는 가해자로 소개되어 있다. 일본인들의 역사 왜곡이 생각난다.

바시에서의 대학살(Massacre de Wassy)은 비교적 더 유명한 사건으로 다뤄진다. 당시 프로테스탄트임을 표명하는 이들이 육군 및 해군의 위력을 좌지우지할 만큼 상당한 병력으로 참가하고 있었고, 왕실 군대의 많은 지휘관들 또한 개혁교도들이었으므로, 이미 포고된 칙령들과 주변국의 관례들을 수용하면서, 이들이 최소한의 자위권을 발동, 가톨릭 교회의 폭력과 횡포로부터 자신들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논의를 촉발한 직접적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1562년 3월 1일 바시라는 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던 프로테스탄트 집회에, 당시 가톨릭의 주요 세력이던 기즈(Guise) 가문의 용병들이 일시에 들이닥쳐 250여명의 사상자를 발생케 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의 예배는 뿌와시(Poissy) 종교 회의를 통해 합법적으로 예배를 허락받은 집회로서, 당국이 도회지 안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삼가 줄 것을 요구한 데 따라 아예 교외로 나가 곡식 창고에서 모이고 있었던 것이다. 대비는 물론 도피의 겨를도 없이 들이닥친, 난데없는 습격이었다. 용병들이 마치 사냥 게임 같은 학살을 마치고 파리에 입성하자 “기즈 만세!”를 외치는 환영을 받았고, 파리 시장은 생 드니 성문에서 정중히 영접하면서 ‘신의 수호자’라 칭송하였다. 그들의 신(神)은 이미, 저들의 수호와 지원을 받으며, 이들의 피의 제사를 사양할 방법이 없을만큼 가난하고 연약해져 있었던 것이다.

▲바시 대학살 현장 그림. 이 그림의 오른편 2~3시 방향 색칠된 부분은, 학살 현장 60미터 밖 성당 담 너머로 이 학살을 지켜보며 즐기고 있던 기즈 형제를 그린 것이다. 여기 동생 샤흘르 기즈는, 10대(!)이던 1538년에 행스(Reims)의 대주교가 되었고, 1550년 별세한 삼촌에게서 20대 중반(!) 직접 추기경직을 계승했다. 타고난 영성이 거의 세례 요한급이었을까……, 그런 게 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오늘날 가톨릭은 함부로 ‘관용’, 교회의 부패, 종교적 매직(賣職) 부정 따위에 거품을 물면 안 될 것 같다. 그것은 ‘종교’ 이전에 ‘인간’에의 예의가 아닌 것이다.

바돌로메 축일의 대학살

바시 학살이 일어난 지 정확히 10년 후에 가톨릭에 의한 엄청난 사건이 다시 터져 나왔다. 1572년 8월 24일에 시작된 바돌로메 축일 대학살이다. 이 때는 파리에서만 3, 4천명의 위그노들이 처참히 죽임을 당했다. 오흘레앙(Orleans) 1,000명, 후앙(Rouen) 6,000명, 멜디트(Meldith) 2,000명, 리옹(Lyon) 800명 등을 비롯해 프랑스 전역의 모든 중소 도시에서 막대한 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어떤 도시들의 경우 ‘여기서 마지막 위그노를 살해하다’라는 식의 기념비들까지 세워졌었다. 이 기간 동안 도합 5~7만여명 이상이 학살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사자(死者)들은 말이 없어 얼마나 죽었는지 정확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다만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기록들과 사후 처리의 현장을 통하여, 가해자와 관찰자들이 각각 적시하는 숫자들을 이렇게 쓸 수 있을 뿐이다.] 이들 가톨릭 교권과 교회, 이에 속한 개인들까지도 이른바 ‘관용’이란 전혀 관심 사항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위그노와 프로테스탄트들에 대한 그들의 최선은 항상 관용 그것의 가장 반대편을 극대화하여 이끌어 내는 일에 집중해 있었던 것이다.

▲학살의 주범 까뜨린느조차 기겁할 정도로 처참했던 광경. 이태리 여인이라 동족이 아니었으므로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었다는 것은 가능한 생각일까?

앙리 2세의 비(妃) 까뜨린 드 메디치는 교황 클레멘트 7세(1478-1534)의 질녀로, 교황청과 프랑스 국왕 사이에 타결된 권력 분점을 위한 정략 결혼의 핵심 고리였다. 결혼을 했지만 애정 없는 남편의 무관심 속에 버려져 고독한 외국인 왕녀로 살던 중에, 마침 남편의 급작스러운 사고 덕분에 권력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잡았고, 권력을 확고히 장악하기 위해 신앙도 포기하고 경쟁 가톨릭 세력의 견제를 위해 쾌히 위그노와 손잡았다. 자신의 딸을 위그노 왕 앙리 4세와 결혼시켜서라도 잡은 권력을 놓치 않으려 했지만, 오히려 너무 커진 위그노 세력이 숨을 쉴 수 없게 만들지 모른다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이번에는 철천지 원수와 정적(政敵)이던 가톨릭 기즈 가문과 다시 손 잡고 위그노에 대한 숙청을 사주, 대대적인 피 바람을 일으켰다. 이것이 바돌로메 축일 대 학살 사건의 실제 배경인 셈이다.

신앙과 진리는 전혀 문제도 관심도 아니었다. 오직 권력을 탐하는 욕망의 결과가 이 처참한 학살이었던 것이다. 바돌로메 축일 학살 이전까지 위그노 학살의 주범이던 프랑수와 기즈(Francois Guise 1519, - 1563)가 자신이 죽인 위그노 여인의 아들이 쏜 총에 맞아 죽자, 바돌로메 축일 대학살에서는 그의 동생인 로렌 교구의 샤흘르 기즈(Charles Guise) 추기경과 아들 앙리 기즈(Henry Guise 1550 –1588), 그의 부인 안느(Anne d'Este)가 복수한답시고 또 다른 학살의 주동자가 되었다.

살육이 끝난 후, 대학살의 소식을 교황청에 전한 로렌의 추기경에게는 금화 1,000 에쿠스(ecus)라는 엄청난 포상금이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나중에 샤흘르 기즈 추기경과 앙리 기즈는 블루와(Blois) 성에서 앙리 3세의 칼에 처참히 죽었다. 권력에 눈 멀었던 까뜨린느 자신도 결국에는 자신의 세 아들 프랑수와 2세, 샤를 9세, 그리고 앙리 3세의 죽음을 차례로 지켜보면서 권력에서 멀어져 피범벅된 그 인생을 끝마쳤다.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가톨릭 수도사 쟉크 끌레망(Jacques Clément)이 위그노에 우호적인 앙리 3세를 암살하기 위해 서원한 후 앙리 3세를 시해하는 장면. 자객 끌레망 처형 장면. 죽어가는 왕이 앙리 4세에게 왕위 계승을 부탁하는 장면. 앙리 4세도 결국 가톨릭교도 프랑수아 라바이약(François Ravaillac)에게 암살 당한다. 프랑스의 두 왕은 가톨릭 자객의 손에 운명을 달리했던 것이다.

[깔뱅의 시대와 세르베 화형 사건 지난 글 보기]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pariskw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