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라는 시대를 규정하는 기준 자체로부터 이미 종교와 교권의 힘, 그 의미는 절대적이다. 그리고 개혁이라는 운동이 발생하게 된 동기 자체가 이미 기성 권력의 변질과 또 이를 완강히 보수하려는 성향 실체를 전제로 하고 있다. 또 종교 권력이든 세속 권력이든 기성하는 세력으로서 현실적 관성을 보수 지속(保持)하려는 경향성에서 그들은 철저히, 그리고 끝까지 하나였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개혁교회’나 ‘개신교회’가 그 시대에는 물론 있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 운동 자체가 이를 의도하고 시발(始發)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교회 현실의 부패와 변질, 비종교성, 비성경성과 비복음성을 되돌려 원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고 믿었고, 그 당위한 ‘어떠해야 함’을 알리고 회복하고자 믿은대로 행동했을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이 운동이 엄청난 수의 인명과 피와 생명을 그 최소한의 동력(動力)으로 요구받았던 것은, 당시 종교 권력과 이를 공유한 세속 권력의 기득권, 이에 수반하는 다양한 의미의 각종 이권들을, 그 어떤 인간과 인명, 어느 부류 인류의 피나 생명보다 더 귀한 것으로 값매기고, 이를 지켜 방어하고 유지하고자 했던 개인과 집단들이 더 강력히 실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 기득권 세력이 주도적으로, 이 새롭게 일어서는 개혁 운동을 로마 교회 자신에게서 상대화하여 분리된 하나의 안티 테제(Anti-these)로 범주화(Categorize)하였고, 이름 붙여 ‘개신(改新) 교도’가 되게 했다. 그제서야 그들은 이름하고 의미하여 ‘개혁(改革) 교도’도 되고 ‘개신(protestant) 교도’도 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점은 루터나 깔뱅 뿐 아니라 다른 어떤 개혁자들에 있어서도 다 마찬가지일 터이다.

그리고 당시 프랑수와 1세의 정치적 야심이 프랑스 주변의 역사적 소용돌이를 야기하면서 프랑스 교회도 이 시대적 변화의 중심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 시기 프랑스에서 개혁 운동이 점점(點點)이 일어나면서 거스를 수 없는 한 흐름(線)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위그노(Huguenots)였던 셈이다. 이 위그노들의 신앙과 사상을 집대성하고 이들의 흐름을 이끌어 결국 개혁을 하나의 결정적 역사(歷史)가 되게 하는 영향을 일군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깔뱅이었던 것이다.

▲1598년 앙리 4세의 낭트 칙령에 의하여 위그노에 주어졌던 종교적 관용은, 1681년 루이 14세가 위그노들을 강제 징집하는 드라고나드(dragonnade) 정책에 의하여 완전히 취하되고 말았다.

여기에는 마주보는(face against each other) 두 쪽(陣營)이 역사적 사실(facts)로 서 있다. 즉, 그 하나는 개혁의 목적과 대상으로서 개혁 요구와 변화, 회복 모멘텀을 반란과 도전으로 간주하여 이를 거부(拒否) 부정(否定)한다. 그들은 이 거부를 위해 스스로 이미 가진 바 모든 권력과 방법과 기회를 철저히 집행, 관철하려는 한 쪽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 강력함 앞에서 이를 당하거나 순응(順應) 수용하면서 촛불같은 생존성을 유지하여 그 개혁과 새로움의 역사적 요청 흐름을 계속 이어나가 보려 몸부림 치는 쪽이었다.

이 양쪽의 입장은 처음부터 정(定)해져 있었고, 또 역사적 상황에서 그 본질적 위상이 상호 교환될 여지는 결코 없었다. 이를테면 힘과 위력의 흐름은 철저히 일방적이었다. 한쪽은 때리고 다른 한쪽은 맞는다. 하나는 누르고 다른 하나는 철저히 짓밟힌다. 하나는 죽이고 학살하지만 다른 하나는 하릴없이 죽임 당하고 쓰러진다. 말 그대로 바람과 풀잎의 관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실제로 수많은 경우에 저들은 죽어가는 소리조차 내지 못했었다.

프랑스 파리에서, 권현익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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