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요한 목사(본지 이사장, 남서울비전교회 담임).
욥기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여류 곤충학자인 찰스 코우만은 애벌레가 나비로 변신하기 위해 작은 고치를 뚫고 나오는 과정을 1년여 동안이나 관찰했습니다. 한번은 애벌레가 고치를 뚫지 못하고 오랫동안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고 안쓰러운 마음에 가위로 고치 구멍을 조금 잘라 주었습니다. 그녀는 애벌레가 고치에서 손쉽게 나와 세상을 힘차게 훨훨 날아다니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고치에서 나온 나비는 날개를 펴지 못하고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다가 힘없이 죽고 말았습니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힘들지만 나비 스스로의 힘으로 고치를 뚫고 나와야만 했던 것입니다. 고난 없는 영광이나 승리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여러분! 정말 온유하고 겸손하고 훌륭한 신앙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그 배후에 많은 고난을 통과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욥기 42장은 욥이 당했던 고난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욥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고난 중에서 연단되어서 높은 신앙의 경지에 올라갔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고난당했을 때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스스로에게 세 가지의 질문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난의 원인이 무엇이냐? 환경이냐? 사회제도냐?, 아니면 죄 때문이냐?, 왜 우리는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고난을 당해야 하느냐 그 원인을 묻게 됩니다.

둘째, 하필 내가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세상에 나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내가 왜 희생양이 되어야 하느냐입니다. 왜 내가, 왜 나만 당해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모두가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만 당하는 고난이 아닙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생은 누구나 고난 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셋째, 언제까지 고난을 당해야 하는가? 도대체 몇 년이나 당해야 하는가? 짧다면 그나마 견뎌보겠지만 문제는 너무나 막막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서부영화를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그 영화에서 주인공이 죽는 것 봤습니까? 어떠한 총격전이나 난투극이 벌어져도 주인공은 끝까지 살아남습니다. 영화는 각본이 정해진 드라마이기에 거기에는 반드시 지향하는 목표가 있습니다. 사건 하나하나에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역사 역시 드라마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그래서 우연이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필연일 뿐입니다. 역사는 그런 것입니다. 역사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작품이요, 드라마입니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지향하는 바가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뚜렷한 종말론적 목표가 있습니다. 개인의 일생도 한 편의 드라마입니다. 지나온 나의 반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필요없는 사건이 있었습니까? 의미없는 사건이 있었습니까? 사건 하나하나가 모두 내게 필연이었습니다. 나의 생애를 위하여 의미있는 일이었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이 거기에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욥은 모든 고난당하는 자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욥기 1장과 2장에 보면, 고난의 장면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당한 고난의 특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재산을 잃음으로 인한 고난입니다. 욥은 부자였습니다. 양이 칠천이요, 약대가 삼천이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이요, 그리고 종들도 많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동방의 제일가는 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거지가 된 것입니다. 피땀 흘려 모은 재산, 애써서 모은 재산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평생토록 애써서 모아 놓은 재산을 하루아침에 빼앗기고 거지가 될 때, 이것은 정말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둘째로, 자식으로 인한 고난입니다. 재물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자식에 비하겠습니까? 욥에게는 자식이 7남 3녀가 있었다고 합니다. 열 남매가 잘 자랐고, 또 형제간에 화친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형님 댁에서 잔치를 하다가 집이 무너지면서 십남매가 다 죽어버렸습니다. 세상에 이런 고통이 어디 있습니까? 자식으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통은 뼈를 깎는 것처럼 아픈 고통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셋째로, 아내를 잃게 되는 고난입니다. 다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오직 한 사람, 아내가 그래도 그 고난에 같이 동참하면서 같이 참아보자고 서로 위로해 주었다면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러나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넷째로, 욥은 자기의 건강을 잃었습니다. 재산이다 자식이다 해 보아도 마지막 궁극적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내 건강의 문제입니다. 그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종기가 나서 이것을 기왓장으로 긁고 잿더미에 뒹굴었습니다. 정말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갈수록 강도가 강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고통 속에서 욥은 정말 믿음을 버린 사람처럼 절망하면서 하나님을 향해서도 낙심의 말을 막 쏟아 놓습니다.

욥기 3장 11절에 보면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욥기 13장 24절에도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나이까?”라고 합니다.

욥은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면서 차라리 태중에서 죽었더라면,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보지도 않고 대적자로 여기신다고 말하며 스스로 탄식하면서 자신의 삶을 저주합니다. 이런 와중에 위로해야 할 친구들은 찾아와서 욥에게 더 큰 상처를 안겨줍니다. 욥기서의 3분의2가 친구들의 정죄와 욥의 변론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니까 욥의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욥기 4장 7, 8절에 보면 “내가 보건대 약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둔다고 말을 합니다. 욥기 20장 27절에서는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일어나 그를 칠 것인즉”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죄를 숨겨도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 죄를 찾아내셔서 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의 원인은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이처럼 고통 속에 앉아있는 욥에게 찾아와서 욥에게 견딜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을 안겨 줍니다. 그 때 욥은 그런 친구들의 정죄에 맞서서 항변합니다. “나의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았고 범죄한 일이 없다”고. 그렇지만 욥은 이러는 가운데 점차 신앙이 흔들리게 됩니다.

자신의 의만 주장하다보니 자신이 억울하게 고난당하는 것으로 말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게 되었습니다. 욥은 결국에 사탄의 함정에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이 피해야 될 함정 중의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무슨 죽을 죄를 지었나? 백 보 양보해서 내가 죄를 지었다 하자, 이 죄가 내 일생을 망칠 정도로 큰 죄인가, 자녀를 가정을 운명을 이렇게 할 수 있느냐’ 항변할 수 있는데 이러다 잘못되면 신앙생활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항의하는 욥에게 하나님께서 “네가 한번 대답해 볼래?” 물으시는데, 그것은 욥기 3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도 욥이 대답할 수 없는 이야기들입니다. 내가 천지를 창조할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물의 근원을 만들었는데, 네가 아느냐? 얼음이 뉘게서 났는지 아느냐? 일월성신의 조화를 네가 아느냐? 산의 염소가 언제 새끼를 낳는지 너는 알겠느냐? 너 이해 못하지? 눈에 보이는 이런 현실 세계도 이해 못하는데 하물며 더 높은 하늘의 세계를 네가 어떻게 알겠느냐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설명해도 네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내용이 뭐냐 하면 고난의 해석이 아니라 수용입니다.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지, 또 고난이 무엇 때문에 내게 있는지 그것을 해석하려고 하면 반드시 믿음에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결코 해석의 대상이 아닙니다. 고난은 하나님의 초월적 섭리에 내어 맡겨야 됩니다. 그것을 수렴하지 못하면 그 신앙은 좌절합니다. 세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소경으로 태어나는 아이, 그것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태어나자마자 죽는 아이도 있습니다. 만약에 그런 고난을 끝까지 해명하려고 하면, 신앙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신앙을 잃고 표류합니다. 왜냐하면 답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삶에 일어나는 일들을 수학공식처럼 원인과 결과로 설명하고 싶어합니다. 언제나 A다음에 B가 오고, B 다음에 C가 오고 하는 이런 관계 안에서 자기의 삶을 설명하고 싶어합니다. 이 고난이 어디서부터 왔을까? 왜 왔을까? 누구의 책임일까? 꼬치꼬치 물어 가서 마침내 “아 그렇구나!”라고 납득되어야만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서양 속담에 “오 리를 줄 세워 갈 수 없다”는 말이 있듯이 고난이 논리적으로 딱 떨어지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잘못하면 해명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겠다는 불가지론에 떨어집니다. 불신앙으로 떨어집니다. 설명이 안 되니까 결국 믿음을 파산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단순방정식이 통하는 곳이 아닙니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높은 차원의 섭리가 있습니다. 세상에는 우리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고난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지 이 고난을 내가 지나가야 된다면, 지나갈 수 있도록 나를 붙들어 주시고 내가 이해할 수 없다면, 믿을 수 있게 해주시고, 내가 볼 수 없다면, 눈을 감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고난 중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부분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신앙생활을 돕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언제 쉽게 열립니까? 형통할 때입니까? 아니면 고난을 당할 때입니까? 경험해 보신 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만사가 잘 되고, 자신감이 넘칠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일을 당해서 힘이 빠졌을 때, 너무 슬퍼서 몸을 가누지 못할 때, 그때 오히려 귀가 열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어옵니다. 말씀을 펴놓고 읽을 때, 전에는 읽는 둥 마는 둥하고 넘어가던 그 말씀이 그날따라 가슴에 저미도록 들어올 때가 있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C. 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고난은 귀머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신비한 확성기다”. 우리 중에 어떤 고통을 안고 살고 있는 형제자매가 있습니까? 꼭 알아 두십시오. 그 고통 때문에 하나님은 남달리 여러분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지 조용히 기다려 보세요.

여러분만이 들을 수 있는 기막힌 음성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책망의 음성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위로의 속삭임일 수도 있습니다. 깨닫게 하는 교훈일 수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축복의 노랫소리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선하게 이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욥은 처음에 그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욥은 고난에 대해 규명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고난은 연구하면 안 됩니다. 고난의 자리에서는 고난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쳐다봐야 됩니다. 이것이 해답입니다. 그러니까 잘 들어보세요. 고난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고난을 쳐다보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다입니다. 깊이 들여다봐서는 안돼요. 그것을 탐구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돌려야 합니다.

욥이 잘한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난에서 눈을 돌려 하나님을 봤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친구들을 용서했다는 것입니다. 욥은 논쟁을 하다가 답을 얻지 못하자 고난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때에 욥은 놀라운 진리를 발견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해서 일을 하고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뭘 하시는지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고난의 자리에 있는 나를 위해 일하신다는 것을 욥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욥이 23장 10절의 신앙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욥기 23장 10절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이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고난의 현장을 떠나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욥은 초점을 고난에서 하나님으로 옮겼습니다. 욥은 눈을 돌려서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의 자리에서도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욥은 눈을 돌려서 자신을 본 것도 아니고 일생의 삶을 본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러자 욥은 하나님께서 고난의 자리에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욥이 선언합니다.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이것은 탐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들여다보고, 고난의 원인을 깨닫고, 그 과정을 분석해서 얻어지는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만이 이런 신앙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정답이 없는 문제나, 끝이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놀이공원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청룡열차를 탑니다. 어지럽고 속이 뒤집히고 비명을 지르고 야단입니다. 그런데 청룡열차가 왜 인기입니까? 그것을 왜 스릴 만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그것은 얼마 안 있어 그 열차가 멈춰 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멈추지 않는다면, 청룡열차 타는 것은 지옥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고난이나 시련도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큰 고난도 하나님 앞에는 지극히 작은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과 대면한 후에 비로소 고난의 원인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정금같이 만들기 위해 고난을 선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욥기서의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둘째, 용서는 고난이 변하여 축복되게 하는 사건입니다.

욥기 42장 10절을 보면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비록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 욥이었지만, 자기를 고통 속에 몰아넣었던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욥은 자기가 겪는 고난도 힘들었지만, 친구들의 정죄가 더 큰 상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욥의 상처가 완전히 회복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모든 아픔이 그대로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욥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줍니다. 이런 용서의 기도는 신앙의 완성입니다.

교회 안에도 보면, 너무 억울하게 상처를 받았기에 용서를 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용서라는 다리를 건너서 하나님 앞에 가야 되는데, 내가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하나님께 건너가야 될 용서라는 다리를 내 손으로 자르는 것이 됩니다. 나를 위해서라도 용서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어려울 때, 제일 먼저 마음에 찾아오는 쓴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원망입니다. “너 때문에 너를 만나지 아니했다면, 너의 말대로 안했다면” 사람에 대한 원망이 제일 먼저 듭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누굴 원망해야 심리적으로 보상을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군가에게 원망을 해야 마음이 편합니다. 애들이 엄마하고 놀다가 쓰러지면 “거 봐” 그러잖아요.

언젠가 어디를 가는데 앞에 아이들이 어디를 구경가는지 쭉 가는 것입니다. 그때, 한 아이가 뒤를 돌아보며 걷는데 앞에 가로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어어” 그러니까 돌아보다가 가로등에 “쾅”하고 부딪친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에게 경고를 준 엄마를 막 때리는 것입니다. “엄마 때문에 부딪쳤잖아.” 엄마를 원망할 이유가 아니라, 자기가 뒤돌아서 걷다가 그랬는데 말입니다.

사람이 그래요. 어려운 일 당하면 제일 가까운 사람을 원망합니다. 멀리 있는 사람 원망 안합니다. 아내가 어려움 당하면 남편을 원망하고, 남편이 사업실패하면 아내를 원망합니다. 자식들이 어려움 당하면 부모를 원망합니다. “나를 팍팍 밀어주지 않아서 내가 어려움 당한다고” 제일 소중하고 가까운 사람을 원망하는데 이것이 인간의 심성입니다.

어려움 당할 때, 회복하려면 먼저 원망부터 그쳐야 합니다. 돈 떼먹고 도망간 사람, 부도내고 도망간 사람, 나를 속이고 도망간 사람들에 대해 술 먹으면서 원망합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 사람들 괴롭히고, 그 다음날 다른 사람 괴롭히고, 그러면서 하늘을 원망하다가 어느 날 그 사람은 죽고 맙니다. 그것을 고쳐야 됩니다.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원망을 그치고 용서하는 것,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나도 살고, 내 가정도 살고, 운명을 고치는 길입니다. 이 고난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연단의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야 됩니다. 그래야 재기도 하고, 사람이 살게 됩니다.

사람이란 원망할 이유가 없어도 원망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욥은 친구들을 원망할 만한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극단의 어려운 고난의 상황에 처했던 욥을 그들은 말로써 얽어맸습니다. 그들은 욥을 이유 없이 괴롭혔습니다. 죄인이라고 하면서 불의한 말로써 상처에 소금을 뿌렸습니다. 그렇지만 욥은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이렇듯 정말 욥은 그 고난의 자리에서 그들을 용서했기에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축복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벗어나는 가장 성경적인 방법은 원망을 그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성녀, 혹은 “천사들의 밀실을 지키는 수호자”라고 불리우는 코리 텐 붐(Corrie Ten Boom 1882-1983) 여사가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을 숨겨준 일이 화근이 되어 일가족이 모두 독일군에 의해 수용소에 끌려가 참혹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독일군은 코리 텐 붐 여사와 그의 언니에게 여자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악랄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언니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고문으로 죽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코리 텐 붐 여사는 전도자가 되어 온 세계에 다니며 용서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특별히 그녀는 패전의 후유증으로 정신적인 공황 속에 놓인 독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코리 텐 붐 여사가 독일에서 집회를 열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모여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집회가 끝나면, 많은 사람들이 코리 텐 붐 여사와 악수를 하기 위해 줄을 서서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코리 텐 붐 여사는 피가 거꾸로 용솟음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바로 수용소에서 자신과 자신의 언니를 가혹하고 잔인하게 고문을 했던 그 간수였던 것입니다.

물론 그 간수는 코리 텐 붐 여사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코리 텐 붐 여사는 그 간수를 똑똑히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도저히 손을 내밀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온 세상 사람들을 다 용서해도 이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속으로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 속에 “그를 용서하라. 나는 그 사람까지도 구하기 위해 십자가를 졌노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코리 텐 붐 여사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손을 내밀었고 그 간수를 끌어안았습니다. 그때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큰 기쁨과 평안을 맛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용서해주고 나니까 자신도 진정으로 자유롭게 되어 마음이 그렇게 평안할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쁨과 평강을 주신 것입니다. 남을 용서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용서는 결국 나를 위한 것입니다.

셋째, 용서의 기도 후에 욥에게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욥기 42장 10절에서 보듯이 욥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시점은 욥이 친구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한 직후입니다. 용서의 기도를 드린 후에 욥의 삶에 회복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용서는 기적’입니다. 자기를 괴롭힌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은 인격의 기적이고, 신앙의 기적입니다. 용서의 기적이 일어나야 욥처럼 상황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욥기 42장 11절에 보면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에 알던 자들이 다 와서 그 집에서 그와 함께 식물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양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과 금고리 하나씩 주었더라.”

11절에 그의 모든 형제자매와 전에 알던 자들이 나오는데 성경신학자들이 고민을 했습니다. 전에 알던 사람들 가운데 그의 아내가 포함됐느냐, 안 됐느냐? 한번 물어봅시다. 포함 됐겠어요, 안 됐겠어요? 결론은 포함됐다고 봤습니다. 이것이 위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아내를 용서하고 자기를 괴롭혔던 사람들까지 다 용서했습니다. 자신이 가장 낮은 곳에 내려갔을 때 자신을 떠나갔던 그 사람들을, 자신이 가장 높은 자리에 있을 때 다시 받아 준다는 것이 힘든 일입니다. 이유 없이 나를 욕보인 사람들을 마음으로 용서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용서하려고 하면 내가 제일 먼저 당했던 아픔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상처의 쓴뿌리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기적인 것입니다.”

내가 죄가 있어 고통을 당하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 죄가 없는 무고한 사람을 그렇게 억울하게 만들어 놓고 사과도 없다면 정말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품는 것이 인간인데 그것을 나쁘다고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너무나 힘겨운 현실입니다. 그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라도 다 마음이 그래요. 그것은 내 육신의 본성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안 됩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그것을 끝까지 갖고 가는 것은 잘못입니다. 과정이야 어쨌듯, 끝은 반드시 용서로 끝내야 합니다. 믿음으로 욥은 그들을 용서해서 받아들이고 집으로 초청해서 잔치를 나눴습니다. 용서의 기도 후, 욥이 받은 축복의 내용은 네 가지입니다.

첫째,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둘째, 재산이 갑절로 늘었습니다.
셋째, 인간관계가 회복이 되었습니다.
넷째, 자녀와 장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회복의 기적은 욥에게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와 욥은 상황은 다르지만, 그와 동일한 점이 있습니다. 욥의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으신 분입니다. 어느 때나 자기의 자녀를 다루시는 원리는 같습니다. 구약시대에 욥을 다루시던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다루실 때도 똑같은 원리를 적용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욥의 이야기가 우리 마음 속에 감동적으로 와닿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욥이 절망의 자리에 앉았을 때, 그 크신 발로 안아주시던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게 찾아오셔서 땅바닥에 앉아서 탄식하고 있는 나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욥의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란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어떠한 환난과 고난도 이겨나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기적으로 이끌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