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50여 명의 순교자 자녀들이 참석해 순교신앙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길 것을 다짐했다. ⓒ고준호 기자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는 터툴리안의 말처럼 지난 1백년간 한국교회 성장의 밑거름이었던 순교신앙을 기리는 예배가 5일 서울 명성교회 월드글로리아센터에서 드려졌다. 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이사장 노태철 목사) 주최로 열린 예배 장소는 한국교회 초기 순교자였던 ‘토마스’의 이름을 딴 토마스홀이었다.


순교자 가족들을 초청해 위로하는 이번 예배에는 올해 99세인 순교자 김철훈 목사의 사모 연금봉 전도사를 비롯한 400여명의 순교자 유가족들과 후손들이 참석해 순교자들을 추억했다. 책자에는 순교자 50명의 주요 행적이 기록되었고, 이중 설교 후 ‘아버지의 순교신앙을 기리고 사모하며’라는 제목으로 직계자손 20명이 나와 순교자의 생전 모습들을 간증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들 순교자들은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도 옥고를 치르며 살아남았지만, 이후 공산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의 간증은 순교자 가정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만 여기고 있으리라는 예상을 빗나가게 했다. 먼저 하늘로 떠나가신 아버지의 뒤에는, 먼저 부모를 떠나보내고 남겨진 자의 가시와 아픔, 고통이 남아있었다.

순교자 오병길 전도사의 둘째딸 오영례 권사는 “여러분, 어린 나이에 부모 잃고 사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말로 간증을 시작한 뒤 “아버지는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셨지만, 그때 열세 살이었던 나는 하나님을 반대하고 자녀들 고생 안시켰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토로했다. 그녀는 “아버지는 신앙을 지키다 고문당하고 있는 제 오빠에게도 ‘하나님이 불러야 순교하는 거야’라며 신앙을 지켜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결국 아버지와 오빠는 순교했고, 저는 어린 나이에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사회로 열린 이날 예배 설교는 한국교회 원로 방지일 목사가 맡았다. 방 목사는 “한국교회의 이같은 큰 축복은 순교자들의 피값이었다”며 “우리가 순교자의 씨로 발아해서 더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했다. 방 목사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전용어가 아니고, ‘날마다 죽노라’는 사도 바울의 전용어가 아니다”며 예수님을 따라 순교신앙에 동참할 것을 강조했다.

이후 가족들에게 새문안교회, 정동교회, 왕십리교회, 명성교회 등에서 준비한 선물을 증정하고, 이들에게 축복송을 불러주며 50여년간 힘든 삶을 살아야 했던 이들을 축복했다. 예배 후에는 푸짐한 식사를 제공하기도 했다.

또 김인수 교수(장신대), 박용규 교수(총신대),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이덕주 교수(감신대), 이상규 교수(고신대) 등 한국교회 순교자들을 연구해 온 주요 교단 역사학자들이 나와 이들의 순교신앙에 대해 증거하기도 했다. 이중 이상규 교수는 “한국은 짧은 기독교 역사에도 공식적으로 1만명, 비공식적으로는 3만명의 순교자를 배출했다”며 “이는 400여년간 핍박받았던 로마 제국의 순교자 수보다 훨씬 많은 수치”라고 밝혔다. 이 교수는 “순교란 자기 희생이고, 자기 포기”라며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들은 자신의 일락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들이 있기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 이덕주 교수는 “6·25 때 감리교 소속 순교자만 170명이 넘는다”며 “이들은 최초 서울이 함락되는 상황 가운데서도 양떼 곁을 떠나지 않다가 목숨을 잃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순교자들이 마치 ‘너는 진짜 목사냐 삯군이냐?’라고 묻는 것만 같다”며 “순교자를 연구하는 내가 순교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느낀 시간이었다”고 나지막히 말했다. 박용규 교수는 “지난 1861년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가 씨앗이 돼 널다리골 교회가 됐고, 이 교회가 1907년 부흥을 이끈 장대현교회”라며 “이런 사실을 교회사적으로 널리 알려야 하는데, 요즘 토마스 선교사의 죽음을 순교로 보지 않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