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정식 목사는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고 불순종함으로 오는 가난이 바로 저주라고 설명했다. ⓒ고준호 기자

최근 홍정식 목사가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진행된 ‘대회개부흥성회’에서 “가난은 저주”라고 발언해 교계에 논란이 일었다. 그는 이 발언에 대해 “가난이 무조건 저주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오는 많은 저주 가운데 하나가 가난이라고 설명한 것”이라며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게으름과 불순종으로 돈도 벌지 못하고 사회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한다면 이것은 곧 저주가 되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홍 목사는 “기독교계가 그동안 등한시하던 물질적 부분에 관심을 갖고 세상을 적극적으로 변혁시킬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발언의 취지”라며 “강연 시간이 부족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홍 목사는 자신의 강연에 대해 “한국교회가 세계적인 흐름을 알아야 한다”며 인터뷰에 최대한 자신의 입장과 취지가 반영되기를 요청했다.


-가난은 저주인가?

그렇다. 가난은 저주다. 그러나 내가 말한 가난의 저주란 신명기 28장 6절에 나와 있는 하나님의 축복언약에 관련된 메시지로서 불순종한 사람들에게 임하는 저주가 가난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설명한 것이다. 가난한 것이 무조건 저주라는 뜻이 아니다. ‘불순종의 가난’을 지칭한 것이다. 열심히 살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하심에 따라 어려움이 계속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강연시간이 부족해 전반적인 설명을 다 못했다. 부연 설명을 하지 못하고 오해를 사게 했던 점은 인정한다.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물질의 축복과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가난의 저주를 이해해야 한다. 일반적인 가난이 아니라 불순종에 따른 가난이 저주라는 것이었다.

-이번 강연에서 주로 비판을 받았던 부분은 ‘가난은 저주’란 것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큰 힘은 돈이기에 ‘교회가 돈을 가져야 한다’는 두 가지 주장이었다. 이에 대해 목회자들로부터 극단적인 기복주의라는 지적도 이어졌고, 한국교회가 돈이 많아 부패하고 있는데 오히려 부패를 조장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었다.

단지 우리가 기복적인 부를 누리자는 메시지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갖고 부를 누리고 그 부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 취지다. 선한 동기를 통해 번 돈으로 사회를 변혁시키는 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세계 역사의 흐름을 아름답게 이끌어 갈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기복주의에 대해 나처럼 강도높게 비난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고착화돼 있는 상황에서 ‘일터교회가 오고 있다’ 등 피터 와그너 박사의 저서들을 접하게 됐고, ‘아, 내가 그동안 순종을 통해서 얻어지는 부까지도 기복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정죄함으로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구나’라고 깨달으며 회개하게 됐다. 교회가 부에 대한 개념을 가져야겠구나 생각하게 된 동기가 바로 피터 와그너 박사의 저서들이었다.

불순종을 통한 가난은 추방돼야 한다. 그것은 저주임에 틀림없다. 일터에서 부를 창출하지 않으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현재 미국에서는 일터교회에서 일하는 사람이 헐리웃에 들어가 영화사를 사고 있다. 또 예수님 믿는 사람이 TV네트워크를 사고 있다. 로렌 커닝햄 목사의 아들도 감독이 돼 영화를 만든다. 기독교인들이 세상에 뛰어들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방법과 전략을 갖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정치, 경제, 사회가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가난에 대한 발언이 보도된 이후 주로 복음주의자들로부터 큰 반발이 있었다. 이들의 주장은 故 한경직 목사도 부유할 수 있었지만 청빈한 삶을 살았고 성 프란체스코는 오히려 부를 버리고 가난을 택한 성자였듯 ‘가난의 미덕’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가난의 저주’라는 발언에 대해 극단적 해석은 삼가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청빈한 삶을 사는 성자들은 은사로서의 가난을 택한 것이다. 피터 와그너의 ‘일터교회가 오고 있다’란 책에서는 은사로서의 청빈한 삶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은 자신이 받은 은사로서 그렇게 사신 것이다. 주를 위해서 고자가 된 사람이 있듯 주를 위해서 가난하게 된 은사도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교회로의 부의 이동을 강조하고 있는데 정통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물질적인 부를 강조하는데 대한 거부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세상의 부를 교회가 가져야 한다. 돈이 있으면 사회변혁 운동을 할 수 있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욕심을 버려야 한다. 욕심이란 물질 소유에 대한 지나친 욕망을 의미한다. 욕심이 생기면 탐욕스럽게 되고 또 인색하게 된다. 피터 와그너 박사도 기독교인이 돈을 버는 데 대해서 존 웨슬리의 충고를 따르라고 강조한다. 존 웨슬리의 어록 중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 중 하나가 “벌 수 있는 만큼 벌라. 할 수 있는 만큼 모으라. 줄 수 있는 만큼 주라”는 말이다. 주어진 환경과 부르심을 따라 최대한 많이 벌고 쓸 만큼만 쓰고 사회를 변혁하는데 자신의 부를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홍정식 목사는 교회가 사회변혁운동을 하지 않는다면 이슬람의 확장에 교회가 무방비가 된다고 강조했다. ⓒ고준호 기자
이슬람이 현재 돈을 갖고 사회저변을 얼마나 크게 확장하고 있는지 교회가 알아야 한다. 무슬림이 늘고 있는 원인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돈이다. 이슬람도 돈을 갖고 세력을 확장하는데 교회들이 적극적으로 돈을 벌지 않고 부자에 대한 반감만 갖고 있다면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확장해 나갈 수 있겠는가. 이단들도 돈을 가지고 있기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교회만 유독 부를 강조하면 기복신앙이라고 비판하고 관심을 갖지 않도록 만드는데 이런 의식이 개선돼야 한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반드시 창조적인 방법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길을 주신다. 부동산 투기와 같은 사회에 아무런 공헌도 없이 부를 창출하는 것이 아닌, 사회에 반드시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상품을 통해 돈을 벌게 하신다. 피터 와그너 박사가 알고 있는 일터교회 사역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아이디어로 바닷물을 담수화하는 제품을 아주 싼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다. 이 밖에도 좋은 아이디어로 사회에 공헌을 하면서도 부를 가져오는 일터교회 사역자들이 늘고 있다.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부의 창출이란 설명인데, 이같은 주장과 해석에 대해 신학자들의 비판은 없었나.

물론 비판은 많았다. 많은 신학자들이 아직도 이 메시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물질을 경시하고 영을 우선시 하는 경향이 아직도 있다. 총신대를 나온 본인도 은혜를 받지 않았던 상황에서 피터 와그너의 저서들을 봤다면 심각하게 비난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학이란 진리를 말하고 있지만 학술이라는 점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3백년 전 의술과 지금의 의술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다. 의술도 시대에 따라 진보하듯 신학도 그래야 한다고 본다. 굳어진 신학의 전통만을 배우고 있어 하나님 나라의 다양한 측면을 보지 못하고 배운 바에 어긋나면 비판하곤 한다. 신학은 계속해서 나타나는 사회현상들을 어떻게 해결할지, 또 어떤 해석을 내릴지 늘 고민해야 한다. 신학이 너무 오랫동안 정체돼 있어 현대의 문제들을 해석해 내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 잇따른 기독연예인들의 자살은 우울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총체적인 사회문제다. 실제로 교회나 선교회에서 기도를 하면 우울의 영, 자살의 영들이 너무 많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의 발언 중에는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이후 이 가난의 영이 들어왔다는 설명이 있었다. 이때부터 물질 문제는 다 제쳐놓고 하나님만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이 중세 수도원 운동 때 극에 달했고 지금의 복음주의 모든 교회들이 영향을 받았다고 강조했는데, 기독교 역사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물론 수도원 운동의 긍정적인 측면도 크다. 수도원 운동은 영성 운동을 진전시킨 공로가 있다. 수도원 운동을 싸잡아 비판한 것이 아니다. 수도원 운동을 통해 세상을 멀리하고 주님만 바라보도록 한 것이 한쪽 면에서는 좋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역사의식이 사라진 결과를 낳았다. 그저 가난해도 하나님 뜻이라고 생각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마인드가 사라진 것은 분명히 비판을 받아야 한다.

교회는 돈을 가짐과 동시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돈이 주어졌을 때 돈을 어디에 쓸 것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되는 돈은 많이 벌수록 좋은 것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복지시설인 엘림복지타운을 건설했고, 선교사도 개교회로서는 가장 많이 파송했다. 국내 교회 중 여의도순복음교회만큼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기도, 선교, 전도에 힘쓰는 교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대형교회를 무조건 비판할 것이 아니다. 대형교회의 특성상 돈이 많게 되는데 그 돈으로 선한 사역을 더 많이 펼칠 수 있다.

-예수님이 가난하지 않았고 부유하셨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비판이 일었다.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셨다는 가르침을 받은 정통 기독교신앙에는 다소 도전적인 발언으로 다가오는데.

이 내용도 피터 와그너 박사의 ‘일터교회가 오고 있다’는 책에 있는 내용인데,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을 순종하셨기에 신명기 28장 말씀과 같이 복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예수님의 가게도 잘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예수님의 탄생 때 유황과 황금과 몰약을 예물로 받으셨고, 공생애 기간 중에는 3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로 발을 씻으셨다. 이것이 초자연적인 부의 이동이다. 예수님께서는 치유사역도 하셨고 당시에 감사헌금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가롯 유다는 돈궤를 맡기도 했다. 예수님이 가난하게만 사신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지 반드시 그렇다라는 것은 아니다.

-이번 여의도순복음교회 강연에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여의도순복음교회 강연을 통해서 연합을 이뤘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의 재도약을 갈망하고 있는 현재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에 대해서 잘못했다고 고백한 사례가 없는데 그런 일을 2007년도 들어 처음 시행한 것이다. 옛날부터 설교할 때 조용기 목사님을 만나면 꼭 용서를 구하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늘 이런 마음을 갖고 있었고 마침 트랜스포메이션 2007 대회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평소의 다짐들을 실천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조 목사님이 언젠가 내 손을 꼭 잡으면서 회개운동을 시작해 주어 감사하다고 말했다. 조 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이나 한가지로 이번 일을 통해 마음 안에 응어리가 풀린 것에 감사를 표했고, 새롭게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또 나의 회개가 계기가 돼 어떤 한 목사님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장로님과 화해를 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와그너 리더십인스티튜트(WLI)에서 일하는 이 목사님은 조 목사님께 무릎꿇고 용서를 구했던 내 모습이 생각나서 장로님 집에 직접 찾아가 그동안 잘못했던 것을 무릎을 꿇고 사과했는데 30분 동안 장로님이 눈물을 흘리면서 마음 안에 상처들을 치유 받게 됐다고 나에게 고백하는데 매우 감격적이었다. 한국교회에 화해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 이런 흐름이 한국교회 가운데 더욱 확산돼 나간다면 얼마나 큰 축복이 있을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