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송(LA 동서성서학회)

우리는 두 한글성경 재번역 시도 자체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광범위한 사용이 요원해 보이는 현 시점에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을 지적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들 성경을 회피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논의해 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글개역성경의 “무엇”이 문제가 되어 성경을 재번역해야 했다면 그 문제가 된 “무엇”은 그들의 재번역의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주기도문과 사도신경도 재번역의 필요가 있었다면, 그 필요가 “무엇”이었는지를 분명히 하는 작업이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무엇”을 규명했고 그 “무엇”이라는 동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재번역을 시도했다는 흔적을 보지 못하는 것이 매우 유감이었다.

두 성경에 있어서, 그 동기의 최 우선은 17-18세기적 문체가 아니었다. 개역한글성경의 최 우선적 문제점은 어휘에 있었다.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중국식의 어휘들이 편만하여 이해를 막고 있었던 것과 불분명한 구두점과 이해를 가로막는 길게 늘어진 문장 구조가 그 첫 번째 문제였다. 두번째로는 원어에서 영어를 거쳐서 중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다단계 번역에서 온 번역오류에 있었다.

영어를 일상어로 사용하는 미국 교회의 성도들이 KJV를 피하고 다른 번역본들을 읽는 이유 역시 고대 문체가 그 원인이 아니고 이해하기 힘든 어휘들의 문제와 원문을 영어의 문법 및 어법체계를 고려하지 않고 문자적으로 옮겨온 번역에 기인된다.

즉, 동적인 대등성(Dynamic Equivalence)에 의해서 번역되지 않은 결과로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고대적 문체가 이해를 방해하는 주요한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체적으로 명령이다. 언약(Covenant)은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조건을 수반하는 약속이고 그 조건들은 권고나 권유나 충고가 아닌 명령이다. 다른 말로, 유언적 의미(Testament)에서 생각하는 성경 역시 조건적 명령이다.

한 예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파멸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는 조건적 약속의 명령이다. 명령은 한국어의 체계에 있어서 반말로 표현된다. 아비는 아들에게 반말을 하는 것이 상식인 언어체계이다. 스승은 제자에게 “하라”고 말하지 “하십시오”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반말과 존댓말의 차이가 너무도 극명한 한국어에 있어서, 명령을 명령에 적절한 문체로 번역하는 것이 정서에 맞는 가장 중요한 번역요소일 것이다.

그 말씀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선지자의 말씀이든 혹은 사도의 말씀이든 간에 혹은 지난 일을 회고하여 서술체로 기술한(narrative) 복음서 저자의 말씀이든 간에 그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명령이다. 예를들어 사도들의 서신들의 말씀을 인간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한글개역성경의 그 권위적 반말이 낯설겠지만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매우 적절한 문체일 것이다.

그런데 심지어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도 존댓말을 하라고 권하고 선생이 학생들에게도 존대하라고 권하는 인본주의의 영향이 바로 두 성경의 번역에 여지 없이 반영되었다.

성도가 성경을 읽는 자세는 역사책을 읽는 자세이어서도 아니되고 소설책이나 자서전을 읽는 자세이어서도 아니된다. 명령을 받는 자세로 성경을 읽어야 된다는 기본적 원칙이 성경을 읽는 자세임을 성경의 문체가 표방해야된다. 텔레비젼 연속극에서 우리가 보듯이 옛적 왕의 칙서를 받는 신하는 멍석을 깔고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채 왕의 칙서를 대했고, 왕의 칙서를 전달하는 자는 왕의 권위로 그 칙서를 받는 자의 앞에 섰다. 이와 동일한 자세를 여지없이 반영하는 문체가 성경에 적용되어야 한다. 성경의 저자는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는 자세이고, 이를 읽는 자는 무릎을 꿇은 신하임이 여지없이 반영되는 문체가 성경의 문체여야 한다.

옛적의 왕들은 백성들 앞에 무릎꿇고 사죄하는 일이 없었으나, 오늘의 지도자들은 표를 얻기 위해서 때로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는 것을 우리는 본다. 왕과 신하적 성경적 배경을 오늘날의 국가 지도자들의 연두교서나 기자 회견과 동일한 수준의 환경이나 분위기로 이끌어 오려 한다면 그 자세는 매우 잘못된 자세이다. 잘못된 분위기 해석이고, 동적으로 대등하지 않은(dynamically non-equivalent) 상황해석이다. 누군가가 부모가 자식에게 존댓말을 하는 자세나 선생이 학생들에게 존댓말을 하는 분위기로 성경을 이해하려 한다면 아마도 그는 결코 하나님의 명령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두 번역성경을 읽어본 이들에게 의견을 물었을 때 흔히 듣는 의견은 물 흐르듯이, 소설책 읽듯이 부드럽기는 한데 성경이 무척 “가벼워졌다”는 것이다. 개역한글 성경은 읽을 때 말씀이 무척 무겁게 느꼈었는데 새로 번역된 성경들은 무게를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강력하게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이다. 강력한 명령을 존대의 말로 표현된 권고나 충고로 격하시키면 당연히 가슴에 와 닿지 않고 머리에 귀착된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받아야 할 명령을 소파에 비스듬이 누워 레코드 테잎 듣는 분위기로 바꿔 놓았으니 당연한 결과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죄인들에게 칙사를 통해서 전하는 말씀이다. 왕의 칙사 앞에 깔린 멍석위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고 사약을 기다리는 자세와 소파위에 비스듬히 누워 대통령의 연두교서를 듣는 자세를 떠 올려 비교해보자. 이들 한글 성경을 읽은 많은 이들이 말하되, “분명히 왜 그런지 말할 수는 없지만, 무겁기만 했던 말씀의 권위가 사라졌다”는 것이 독후감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들 번역성경들의 사용을 반대하는 이유도 이러한 이유에서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만일 한글개역성경의 명령체의 문체에 불편한 이들이 있다면, 그는 성경을 읽기 전에 인본주의나 자기존중(self-esteem)의 인습부터 벗어야 할 것이다. 성경 번역에서 피해야 할 한가지가 의역(paraphrase)이라면, 두 번역성경의 문체는 성경의 색깔을 바꾼 엄청난 의역이고 과오이며, 중대한 말씀해석(exegesis-hermaneutics)의 오류이며, 성경의 권위를 인본주의적 평지에 끌어내린 한심한 번역이다.

덧붙여서 이 글의 맨 처음에 언급되었던 두가지 개역 필요의 측면에서, 특히 표준새번역성경은 어휘의 문제에 매우 나태해서 많은 이해하기 힘들었던 중국어적 표현들을 거의 그대로 답습했다. 중학생들에게 국어시간에 “성경을 현대문체로 바꿔와 봐!“라고 주문했을 때의 결과보다 조금도 나은 바가 없다. “표준”이라는 이름도 “새번역”이라는 이름도 모두 어울리지 않는 번역이다. 어떤 근거에서 “표준”을 주장했는가를 알 수가 없다. 이에 비해서 공동번역 번역자들은 곳곳에서 어휘에 매우 고심하고 수고한 흔적이 역력히 발견된다.


LA 동서성서학회 마이클 송 ewbiblesociety@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