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 그리고 그것의 경륜 믿음

개혁신학포럼 18차 세미나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기독교는 영원한 것을 지향하며, 영원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별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풀의 꽃과 같은 육체의 영광과 영원한 복음(벧전 1:24-25)’, ‘멸망할 세상과 영존하시는 하나님(히 1:10-11)’, ‘썩을 면류관과 썩지 아니할 면류관(고전 9:25)’ 등의 대비(對比)는 영원한 것을 지향하는 성경의 가치관을 잘 반영한다.

이 영원한 것은 오직 영생이신 하나님과 그에게 속한 것들에 한정된다. 따라서 하나님과 그의 계시가 차단된 피조물 세계에는 영생의 개념이 없다. 설사 그들이 영생을 말하는 경우에도 기독교의 영생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불교에서 억겁(億劫)의 ‘윤회(Reincarnation, 輪回)’를 말하나 그것은 비인격적인 ‘인과원리(因果原理)에 의해 끝없이 돌고 도는 것일 뿐이다. 헬라 철학에서도 유사한 ‘영생’ 개념이 있지만 이원론적인(dualistic) 플라톤(Plato)의 이데아(idea)에 근원한다.

그들은 ‘육체는 더럽고 영혼은 깨끗하다’고 믿기에, ‘부정한 육체’는 죽음으로 사멸되고 ‘순결한 영혼’이 영원한 ‘이데아’에 진입하는 것을 영생으로 본다.

역시 같은 플라톤의 이원론(dualism)에 뿌리를 둔 영지주의는 ‘영생’을 ‘즉각적 깨달음’을 통한 죄와 물질에서의 ‘해방 상태(free state)’로 이해한다. 이들의 영생 개념은 ‘시·공간(時空間)’이 배제된, 단지 ‘관념의 상태’이다.

이 모든 개념들은 성경의 ‘영생’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기독교의 ‘영생’은 죄인이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요 5:26)’을 의미하며, 그것은 영육(靈肉)의 온전한 영생이다.

인간에게 ‘영생’이 가능함은 몇 가지 점에 근거한다. 먼저, 그것이 하나님의 경륜으로서의 ‘명령’이라는 사실에서이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3)”,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요 12:50)”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피조물 된 인간에게는 그것에 대한 선택의 여지도, 그의 설득을 받고 안 받고 와도 무관하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경륜’으로서의 ‘명령’에는 무조건적인 수납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영생의 명령’은 ‘영원 전 하나님의 작정’에 근거하며, 이것이 그 명령에 더욱 권위와 무게감을 부여한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는 말씀은 그것의 예시 구절과도 같다.

사도 누가는 여기서 ‘영생’을 단지 멸망에 처한 인간을 구원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결과물로서가 아닌, 그것의 ‘원(原)기원’으로서의 ‘하나님의 작정’에서 접근했다.

또 하나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말은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인 ‘영생’을 가졌다는 뜻이다. 물론 ‘인간의 영생’은 ‘하나님의 영생’과의 동일성, 차별성을 다 공유한다.

웨스트민스트 소요리문답서(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는 ‘하나님은 영원성은 인간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변한다.

“어떤 피조물들(인간의 영혼과 천사)은 시간 안에 시작하였으나, 시간과 함께 혹은 시간 안에 끝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피조물과는 달리 영원 전부터, 시간 세계 이전부터 시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영원까지 존재하신다.”

인간이 비록 유한된 시공간 속에서 창조된 피조물이지만, 독특하게도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이 입혀진다. 이 가능성은 하나님이 육체를 입으신 ‘성육신(Incarnation, 成肉身)’에서 찾아진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육체를 입을 수 있듯, 인간의 육체가 영생을 담을 수 있다. 이는 영생에 육체를 배제시키는 플라톤주의의 이원론과는 배치된다.

◈영생은 본래적인 것

‘영생’은 본래적(本來的)이고 기원적(起源的)이다. 영생에 시작과 끝이 있다거나 중간에 유입될 수 있다고 말하는 자체가 언어모순이다. 그것의 기원은 영원이다. 실제로 성경은 ‘영생’을 영원한 때에 전부터 약속된 것으로 말한다(딛 1:2).

다시 말하지만, ‘영생’을 단지 죄인이 구원받은 결과물 혹은 어떤 것의 후속조치로 보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아담 이래로 사망이 인간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원리가 됐지만 사실 ‘사망’은 중간에 유입된 것이고 ‘영생’이 기원적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느니라(롬 5:12)”,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라(딛 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요 3:16)”,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47)”,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요 5:24)”라는 말씀들은 영생이 믿음을 통해 현재적으로 획득될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 말씀들의 진의는 ‘만인구원론(universalism, unlimited Atonement)’이 말하듯, 본래 영생과 무관했던 죄인이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를 위해 이루어 놓은 구속을 믿기만 하면 누구나 그것을 획득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정확한 의미는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 주기로 작정한 자들을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 그들의 죄를 구속하시고 그들에게 믿음을 주어 영생을 취하게 하셨다는 뜻이다.

영생의 획득이 현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지만, 그것의 기원은 창세전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도 “영생 주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행 13:48)”고 한 말씀이 다시 한 번 적용된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 5:13)”는 말씀 역시, 이것을 쓴 목적이 ‘예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비로소 영생이 왔다’는 것을 알게 하기위해서가 아닌, ‘예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미 창세전부터 영생이 예비 돼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영생의 경륜은 율법이 아닌 믿음

인간에게 영생을 주기위해 하나님이 제정하신 경륜은 ‘율법’이 아닌 ‘믿음’이다. 율법은 그것의 연약성으로 인해(롬 8:3-4) 죄인에게 영생을 갖다 주지 못한다. 죄인에게 율법은 다만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로 한정될 뿐이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범죄하여 하나님의 정죄아래 있었음에도 자신들의 죄와 심판을 명확하게 깨닫지 못했기에, 하나님이 율법을 보내 그것을 깨닫게 하셨다. 사도 바울이 율법이 유입되지 않았으면 죄를 죄로 알지 못했을 것(롬 7:7)이라고 한 것이 그 뜻이다.

율법의 목적이 ‘사람의 의를 드러내어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닌, ‘그의 죄를 드러내어 사망을 선고’하는데 있음을 말한 것이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6)”,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

그러나 ‘율법’이 사망을 선고하여(롬 6:23) 죄인을 절망의 나락으로 빠뜨리는 ‘부정적 기능(Negative function)’만 하는 것은 아니다. 거기서 진일보한다. 곧 죄인으로 하여금 자신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하는(갈 3:24)’ 순기능(the right function, 順機能)을 한다.

아니 어쩌면, 이 율법의 ‘순기능’이 본래 하나님이 율법을 내신 궁극적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그토록 인간을 절망으로 내모는 율법을 성경 기자들이 ‘축복과 즐거움(시 1:1-2; 19:9-10)’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몽학선생(눅 24:44, 요 1:45, 행 28:23, 갈 3:24)’ 등으로 칭송하는 것도 이 율법의 역설적(paradoxical)인 순기능을 두고 한 말이다.

마지막으로 ‘율법’이 인간의 범죄 후 ‘도중에 유입됐다(갈 3:19, was added)’는 점에서, 그것이 ‘영생’의 동반자일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한다. 이는 ‘영원한 것은 영원한 것과만 어울린다’ 는 ‘동류교호법칙(同類交互法則)’과도 궤를 같이 한다.

영원한 ‘영생’은 초월적 경륜인 ‘믿음’과만 짝을 이룬다. ‘영생’의 기원이 창세전이었듯이, 영생을 얻게 하는 ‘믿음’ 역시 초월적이다. 하나님은 영원의 경륜인 ‘영생’을 초월적이고 초역사적인 경륜인 ‘믿음’으로 획득하게 하셨다.

아브라함이 율법보다 430년 전의 믿음(약속)으로 유업(의와 영생)을 받았던 것은(갈 3:17) ‘믿음’이 영생을 얻게 하는 초역사적인 경륜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의 경륜은 영생을 값없이 받는 은사로 만들었으며(롬 6:23), 율법이 개입할 여지를 차단시켰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갈 3:17-18).”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