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포럼 18차 세미나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율법적 행위가 아닌 관계로 구원하시는 하나님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원한 하나님의 작정 속에서 오직 하나님 주권으로 경륜되지만, 실제로 그것이 택자들에게 시행될 땐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된다.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과의 관계 파탄에서 왔듯(아담의 선악과 범과(犯過)는 ‘행위’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탄 낸 ‘불신앙’의 표현이다), ‘구원’도 믿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과의 화목(롬 5:1) 곧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결과이다.

성경이 ‘구원’을 부르심(calling, 살후 2:14)으로, ‘믿음’을 영접(receiving, 요 1:12)으로 표현한 데서도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관계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타락과 구원’을 ‘행위의 문제’로 몰아가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을 파쇄하고, 믿음을 인간 내면에서 만들어진 신념이나 결단으로 보는 심리주의 종교와 구별짓는다.

하나님이 택자를 향해 복음을 통한 구원에의 부르심을 부르면, 택자는 그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여 구원받는다.

이를 성경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양(요 10:3-5)’과 ‘누구의 방문을 받고 문을 여는 사람(계 3:20)’의 비유 등을 통해 설명했다. 한 마디로, ‘믿음’은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그리고 이 ‘믿음’은 회심(悔心)만을 위한 단발적(單發的) 행위로 그치지 않고, 구원에 이르도록 평생 지속 모드(mode)를 취한다.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듯(요 15:4), 성도는 그리스도에게 믿음으로 붙어있으며, 이 지속적인 믿음을 통해 구원의 보장이 확보된다.

성도의 구원을 위해 성령이 하시는 주된 사역도 성도 안에서 ‘믿음을 일으키는 일’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해설서 저자 ‘토마스 빈센트(Thomas Vincent, 1634–1678)’도 그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이 믿음의 조성자는 하나님이신 바, 그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 속에 믿음의 은혜를 일으키신다(엡 2:8, 골 2:12).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 속에 이 믿음의 은혜를 불어넣으시는 방법은 전파된 말씀을 듣게 함으로써이다(롬 10:17, 고전 15:11).”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지켜내는 방식도, 하나님이 우리를 강하게 만들어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서가 아닌, 성령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지속적인 믿음(continuous faith, 고후 13:5)’을 통해 하나님이 지켜내신다.

◈이차적이고 수동적인 믿음

이렇게 말해도, ‘믿음에 의한 구원’을 사시적(斜視的) 시각으로 보는 이들 중에는 여전히 그것을 ‘신인 협력적(synergistic)’인 의미, 예컨대 ‘구원은 오롯이 자기 믿음에 달려 있다’ 혹은 ‘믿음이 구원의 전제 조건이다’라는 의미로 왜곡시킨다.

구원의 일차적 원인은 오직 하나님의 ‘구원 작정’과 그의 ‘은혜’이다(엡 1:4-6). ‘믿음’은 구원 작정을 받은 택자에게 시여된 하나님의 선물로서, 다만 ‘2차적 지위’만 가진다.

‘믿음’은 구원의 조건(前提, 先行)으로서의 ‘율법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 의지(意志)’에 복속된, 성령으로 말미암은 수동적인 것이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구원자 ‘하나님’과 피구원자 ‘우리’사이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파생되는 수납적인 어떤 것이다.

이 ‘성령으로 말미암는 믿음(faith by Holy Spirit)’은 오히려 ‘인간의 무능함’과 ‘하나님의 주권’을 돋보여 내어, 구원을 오롯이 ‘하나님 기원적인 것’으로 만든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는 말씀도 주의해서 접근해야 한다. 그것은 ‘구원을 내 하기 나름에 달리게 했다’는 ‘신인 협력적(synergistic)’구원 개념을 지원하지 않는다. 구원을 자기가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죄인에겐 분수를 넘는 교만이다.

구원은 죄인의 율법적 행위나 도덕적 선행에 의해 가늠되지 않는다. 구원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 속했다.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10)”.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라는 말씀의 진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선물로 시여한 믿음을 소중히 지키라는 뜻이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에 간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이루시도록 ‘성령의 믿음(faith by Holy Spirit)’으로 하나님께 피동되는 것이다.

더 이해를 돕기 위해, ‘믿음이 능력’이라는 말씀을 예로 들어보자. 이는 ‘믿음 자체에 무슨 마력(魔力)이 있어 믿음을 가지면 능력을 갖게 된다’거나, 아니면 차력(借力)을 하듯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이끌어낸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으로의 믿음(faith by Holy Spirit)’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일하신 결과물이다. 2차적이고 수동적인 ‘믿음’의 지위를 잘 설명해 주는 말이다.

◈죽인 후 구원하시는 하나님

‘구원’은 한 마디로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이라는 말에는 ‘죽음’이 전제된다. 죽지 않으면 구원도 없으며, 죽은 자가 없다면 구원받을 자도 없다. 그런데 ‘구원’에 ‘죽음’을 전제하지 않은 이들이 있다. 율법주의자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구원받겠다고 덤벼든다. 언어모순이다. 그들의 ‘구원’ 개념은 ‘죽은 자가 사는 것’이 아닌 기껏, 중상 입은 사람을 죽지 않도록 살리는 정도이다. 이런 죽음이 전제되지 않은 ‘계몽적 구원’ 개념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따라서 그들이 죽은데서 살림 받는 구원을 얻으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율법에게로 가서 그것의 정죄를 받아 죽임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 7:11)”.

정확히는 ‘자신들이 죄로 죽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 함이 옳다. 이는 모든 인간은 이미 죄로 죽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믿음의 역할’이 드러난다. 믿음이란 자기가 죄로 죽었음을 인정하고 살기 위해 구원자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성경이 ‘믿음’을 ‘죽음’과 연결 짓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자기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영접할 수 없으며, 나아가 구원받을 수 없다.

이 믿음의 정의를 통해,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유행하는 소위, 심리학과 결탁된 ‘적극적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구이며 왜곡인가를 보게 한다. 본래 ‘적극적 믿음’이란 없다.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는(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믿음’에 어떻게 ‘적극’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가? ‘적극적’이라는 말은 ‘산 자의 언어’이다. 둘의 조합은 언어모순이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눅 17:33)”는 말씀은 교회 안팎의 다양한 국면에서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때론 극렬한 전투에서 살아남은 전쟁 영웅들에 의해 “전쟁터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죽기 살기로 싸우면 살게 되고, 살겠다고 전쟁을 피해 숨어 다니는 자는 죽는다”는 의미로.

때론 박해를 견디고 살아남은 산 순교자들에 의해 “주님을 위해 죽으려고 하면 영원히 살게 되고 자기 본위로 살면 죽게 된다”는 의미로.

여기에다 한 가지 더 풍유적(諷諭的)인 의미를 덧붙인다면, “율법에게로 가서 사형선고를 받는 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게” 되고, “율법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께로 못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으로 받을 수 있다.

이는 죄인이 ‘몽학선생’ 율법으로부터 정죄와 죽임을 당한 후(갈 3:24), ‘율법의 마침’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받아 구원을 얻게 된다(롬 10:4)는 말씀과도 상통한다.

예수님 당시, 많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우상처럼 떠받들고, 입만 열면 율법을 외쳐댔지만 그들은 참으로 율법에게로 가본 적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 결과 그들은 율법에서 자기들의 ‘죄와 죽음’을 보기보다는 반대로 자기들의 ‘의(義)와 삶’을 찾아냄으로서, ‘율법의 마침’이신 그리스도께로(롬 10:4) 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의를 ‘더러운 옷(사 64:6)’, ‘외식(마 15:7)’으로 폄하한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죽였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