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닥터 두리틀(Doctor Dolittle)>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동물들과만 소통하고 있는 주인공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로다주)가 여왕을 치료할 수 있는 ‘신비의 섬’을 찾아 동물들과 함께 모험을 떠나는 ‘코미디 판타지 가족 영화’입니다. 8일 개봉해 예매율 1위를 기록하며 11일까지 60만 관객을 모은 이 영화는 스티븐 개건 감독과 ‘로다주’, 톰 홀랜드(지프), 라미 말렉(치치), 안토니오 반데라스(라술리), 마리옹 꼬띠아르(투투) 등이 목소리로 출연합니다. 원작 소설 <닥터 두리틀> 시리즈는 1967년과 1998년 이미 제작됐습니다. -편집자 주

닥터 두리틀
▲인간과 동물의 협력과 공존을 주제로 삼은 영화, <닥터 두리틀>.
인간과 언어: ‘호모 로퀜스(homo loquens)’의 과학적-언어학적 고유성

서구 철학 및 과학 역사에서 전문적인 생물 분류의 시대를 연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마케도니아 왕궁 어의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생물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자신의 저서 <영혼에 관하여>(Περὶ Ψυχῆς, Peri Psyches)에서 그는 생물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스스로 운동(성장)할 수 있는 힘’, 즉 ‘영혼’을 가진 것.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세 부류, 식물의 영혼, 동물의 영혼, 인간의 영혼으로 분류한다. 식물의 영혼은 오직 생장하고 번식할 수 있는 기능만 가진다. 동물의 영혼은 생장, 번식하는 힘에 더하여 이동하고 감각할 수 있으며 낮은 수준의 기억력을 갖는다.

반면 인간의 영혼은 생장, 번식, 이동, 감각, 기억뿐 아니라 고등한 수준의 이성을 갖추고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고등한 수준의 이성이, 인간만 갖고 있는 고유한 속성들을 발현하게 한다고 믿었다. 그는 이 고유한 속성들을 여러 방면으로 규정했는데, ‘homo sapiens(지능을 가진 인간)’, ‘homo sociologicus(사회적 인간)’ 같은 유명한 규정들은 인간 고유의 속성을 명확하게 밝혀내려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이런 규정들 가운데는 ‘homo loquens(언어를 사용하는 인간)’라는 것도 존재한다. 이 규정은 동물들이 소통을 위해 주고받는 구음이나 몸짓과 인간의 언어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반영한다.

이런 생각은 19세기 말부터 서구 언어학과 인류학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준 구조주의(structuralism)에서 뚜렷하게 확인된다.

구조주의 언어학을 대표하는 스위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에 의하면 언어란 역사적 산물일 뿐 아니라 인간 고유의 사회적 산물이며, 인간이 세계 및 타인과 관계하는 고유한 ‘구조’를 반영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다시 말해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세계와 마주하며 관계하는 삶의 방식 자체를 결정짓는 거대한 구조물이자 얼개인 것이다. 이 얼개는 인간과 전혀 다른 존재 방식을 가진 동물들은 공유할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이다.

2004년, 미국의 언어학자 스티븐 앤더슨(Stephen R. Anderson)은 이 구조주의 언어 이해를 반영해, 소설 <닥터 두리틀>을 비판하는 저서 <두리틀 박사의 망상>(Doctor Dolittle’s Delusion)을 집필했다.

앤더슨은 <닥터 두리틀>에서 인간이 동물의 구음(口音)을 배우고, 그것으로 인간과 동물이 마치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처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사회과학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커다란 오해라는 것을 지적한다.

닥터 두리틀
▲언어학적 관점으로 보면 인간과 동물의 완벽한 소통이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망상에 불과하다.
인간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주어와 술어로 구성돼 있다. 주어는 발화(發話)의 주체이자 사고의 주체, 의지의 주체를 지목하고, 술어는 지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표현한다.

일단 주어가 성립되려면 확고한 자기 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동물에게는 인간처럼 분명한 자기 의식이 존재한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동물은 현상들을 비교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없으므로 술어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동물의 구음이나 몸짓에 의한 신호는 각각의 육체가 가지는 감각적 느낌과 본능, 그리고 학습된 반응이 하나로 뒤섞여 나오는 것으로서, 주어와 술어로 구조화되는 인간의 언어와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앤더슨은 이 점을 지적하면서 <닥터 두리틀>의 문학적 상상력, 더 나아가 인간과 동물 사이의 완벽한 의사소통을 묘사하는 모든 기록들(성경 포함)이 과학적으로 커다란 오류를 가진다고 판정한다.

동물과 언어: 종말론적 미래 속 동물과 인간의 협력과 공존

소쉬르나 앤더슨의 구조주의 관점으로 본다면, 성경의 기록, 특히 창세기에 나오는 여자와 뱀의 대화, 그리고 민수기에 나오는 발람과 나귀의 대화는 순전히 허구적인 공상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물론 우리가 접하고 있는 세계의 현실에서 죄악으로 인해 인간과 다른 피조물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가 무너진 상황에서는, 언어학자들의 분석과 논의가 분명하게 들어맞는다.

그래서일까. 성서학자 비벌리 스트래튼(Beverly J. Stratton)이 지적하는 것처럼, 다수의 성서학자들은 성서에 나오는 인간과 동물의 대화를 단지 하나의 신화적, 우화적 표현으로 간주한다.

이들은 인간과 동물이 구조화된 언어를 통해 대화할 수 있다는 가르침의 과학적-언어학적 불가능성을 깊이 유념하고 있다.

그리하여 고대 근동, 메소포타미아 지역 신화에도 동물과 인간이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장면들이 나온다는 것을 지목하면서, 성경에서 뱀과 나귀가 말하는 장면들이 이런 지역 신화들과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기록된 것이라 판단한다.

반면 인간과 동물의 대화 장면을 단순한 신화로 단정하고 싶지 않은 학자들은 뱀과 나귀가 인간의 언어를 구사했다는 기록, 그리고 여자나 발람이 그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점을 굳이 언급하지 않고 난해구로 남겨두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이 난해 구절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과학적 신빙성과 언어학적 타당성을 주장하기 어려운 이 사건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닥터 두리틀
▲에덴 동산에서 여자가 뱀과 대화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뱀이 인간과 언어로 대화한다는 기록이 당황스러웠던 듯, 뱀의 머리를 사람의 모양으로 그려 놓았다.
해석학적 관점으로 살펴보면 하나의 해법이 나온다. 바로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신앙고백의 논리, 통전적 논리 안에서 해석하는 방법이다.

성경 기록이 갖는 실존적-신앙적 의미는 사회과학이나 언어학 등 외적 준거가 아니라, 성경 자체가 제공하는 준거에 따라 파악되어야 한다는 논점으로 본다면, 이 문제는 어렵지 않게 해결된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간과 동물의 대화 장면들 가운데는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공통점이 존재한다. 이 장면들은 모두 하나님의 임재 혹은 현현이 이루어지는 시-공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이는 민수기의 발람과 나귀의 대화 장면(민 22:21-33)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이 장면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발람의 행로를 막기 위해 길에 내려와 있으며(민 22:22), ‘여호와께서’ 직접 나귀에게 인간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민 22:28).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존재가 충만하게 임해 있는 곳, 그의 권능이 지배력을 발휘하는 곳에서는 인간과 동물 사이 언어의 장벽이 허물어지며, 동물 또한 자기의식과 판단력을 가지고 주-술 구조를 가진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온전한 창조섭리 가운데 하나이다. 이 섭리의 과학적 증명 가능성 여부와 상관없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은 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지한다.

이사야 11장에 기록된, 사자가 양과 함께 뛰어놀고 독사가 아이와 함께 노는 이상향 역시 메시야의 임재가 충만하게 이루어진 시-공간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닥터 두리틀>의 핵심 모티프인 인간과 동물의 대화는 단지 하나의 망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가장 온전한 창조질서가 실현될 때 일어날 일들에 대한 믿음을 반영하는 서구 기독교 문화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닥터 두리틀
▲<닥터 두리틀>에서 인간이 동물과 언어로 대화하고 협력하는 장면들은 창조섭리의 완전한 회복을 기대하는 기독교 신앙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이 믿음은 지금의 현실에서는 바로 실현될 수 없다. 오로지 무너진 창조질서의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질 종말의 미래에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다.

전에 영화 <옥자>에 관한 평론에서도 밝힌 바 있듯, <닥터 두리틀>이 그려내는 것처럼 인간과 동물이 협력하며 인간과 우주 만물 사이의 불통과 대립이 해소되는 세계상은 기독교적으로 볼 때 오로지 하나님의 초월적 개입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은 과학적 타당성 여부보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삶에 주는 의미라는 측면에서 가치를 갖는다.

성경에 기록된 인간과 동물 사이의 완전한 언어적 대화, 그리고 이를 문학적으로 재해석한 <닥터 두리틀>의 장면들은 원본적인 창조섭리가 인간과 동물 사이의 협력과 공존을 지지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동시에, 이러한 협력과 공존의 완전한 실현이 인간의 힘이 아닌 종말론적 약속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 가르친다.

그리고 이는 동식물과 자연 만물을 포함한 생태 전체에 대한 인간의 책임과 윤리를 일깨운다.

인간과 피조물 간의 대립적이고 위계적 관계, 그리하여 인간이 생태계와 동물을 억압하고 때로는 일부 종들을 말살하기까지 하는 오늘날의 현실은 기독교적 창조섭리에 위배되는 것이다.

물론 인류가 동물을 다스리고 도축하고 이용하는 것까지 거부할 만큼 완벽한 조화는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인간은 스스로가 생태계와 맺는 관계 가운데 보일 수밖에 없는 이런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언젠가 온전하게 회복될 인간과 동물 간의 완벽한 공존 관계를 예비하기 위해 힘써야 하는 현실과 책임 사이의 긴장 속에 놓여 있다.

영화 <닥터 두리틀>이 보이는 선악의 구도는 바로 이 사실을 대변한다.

어떤 인간들은 동물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고 그들을 사냥하거나 강제로 가축화해 억압하지만, 동물들의 말을 알고 그들과 마음을 터놓고 소통하는 두리틀 박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분)와 그의 제자 토미 스터빈스(해리 콜렛 분)는 동물들을 격려하고, 치료하고, 집을 찾아주는 역할을 맡는다.

창조섭리가 무너진 세계에서 그 회복을 바라보는 소망을 가진 인간, 이는 두리틀 박사와 스터빈스를 통해 묘사된, 성경에서 바라는 인간상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닥터 두리틀
▲두리틀 박사와 제자 스터빈스, 인간과 동물 간 섭리의 회복을 바라보는 인간상을 대변한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