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다 하면 안 돼… 남기고 묻어야
오래 봐도, 오래 안 봐도 사랑스러운 너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 저녁 온다

나태주
▲출판기념회에서 차미연 아나운서의 질문에 답하는 나태주 시인(오른쪽). ⓒ이대웅 기자
나태주 시인이 딸에게 보내는 시 106편을 모은 시집 <너의 햇볕에 마음을 말린다(홍성사)>을 펴내고, 14일 오후 7시 서울 합정동 양화진책방에서 독자들과 만남의 자리를 마련했다.

평생 충남 공주에서 교직 생활을 했던 나태주 시인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는 시 ‘풀꽃’ 등이 전 국민에게 사랑받으며 ‘풀꽃 시인’으로 불린다.

나태주 시인은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 사이에서 속지 말아야 한다. 잘하는 것을 찾아가지 말고, 좋아하는 것을 하라”며 “자녀들에게도 잘하는 것 대신 좋아하는 것을 시켜야 한다. 좋아하는 것이어야 평생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 시인은 “저는 은퇴 집사이지만, 부처님 말씀 중에 ‘자비(慈悲)’가 있다. ‘사랑하고 슬퍼한다’는 말인데, 생각해 보면 예수님 말씀의 ‘긍휼(矜恤)’과 같더라. 안쓰럽게 생각한다는 것”이라며 “공자님 말씀의 ‘측은지심(惻隱之心)’, 인(仁)도 그렇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거기서 시를 하나 얻었다. ‘이 가을에 아직도 너를 사랑해서 슬프다’. 이게 끝이다”며 “봄이 아니라, 이 가을이다. 다 추수하고 정리할 때인데, 아직 정리를 못했다. 손을 털어야 하는데 못 털었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 시인은 차미연 아나운서(MBC)의 다양한 질문에 답하며 독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다음은 나태주 시인의 출판기념회 주요 내용.

-시집이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3부로 돼 있습니다. 이게 원래 시집 제목이었다고 들었는데요.

“미국 여행을 갔는데, ‘예스터데이, 투데이, 앤 투모로우(yesterday, today, and tomorrow)’라 이름붙인 나무가 있었습니다. 어제 꽃핀 색은 좀 짙고, 오늘은 화려하고, 내일은 여리하고…. ‘and’가 세 번째에 가서 붙는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웃음). 이게 인생이구나 싶었습니다. 이것만 봐도 나태주가 얼마나 헐렁한지 알 수 있지요.

이 책도 원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었는데, ‘너의 햇볕에 마음을 말린다’가 되었습니다. ‘장마’라는 시도 다른 제목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제 시집만은 아닙니다. 독자, 그리고 편집자들과 함께 지은 책입니다. 독자들과 함께 완성되기를 바랍니다.”

-젊은 독자들이 많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이유가 헐렁함 때문 아닐까요.

“어른이 다 하면 안 돼요. 남겨줘야 합니다. 우리 문화의 기본이 그렇지요. 남기고, 묻습니다. 하지 못한 말은 가슴에 안고 살지요. ‘필설(筆說)로도 다 못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글로도 말로도 못해요.

우리 딸이 문자 보내면 가장 기분 좋은 답이 있습니다. ‘응’. 어제도 왔다. ‘응’ 하면 지가 기분 좋은 거고, 대답 안 하면 틀어진 거예요(웃음). 글자도 얼마나 이쁩니까. 여러분, 우리 사랑합시다. 이어령 선생님이 세종대왕이 한글 만들 때 영(0)과 일(1)로 만들었다고 그러셨어요.”

-선생님은 ‘응’, 한 글자에서도 사랑을 뽑아내시는 분, 다른 사람을 위해 남겨놓으시는 분이네요.

“풀꽃 마지막 부분에 ‘나도 그렇다’ 왜 안 썼냐고 해요. 패러디가 많이 되는 시입니다. 그렇게 남겨놔야죠.

예쁜 사람은 자세히 안 봐도 예뻐요. 차 선생님 같은 사람은 그냥 딱 봐도 예쁘잖아요. 오래 안 보고 잠시 봐도 사랑스러워요. 자세히 봐서라도 예쁘게 보자는 것입니다. 그럼 모든 것이 다 예쁩니다.

그냥 예쁜 사람은 대충 봐도 예쁘고, 안 이쁜 사람은 자세히 봐서라도 예쁘게. 오래 봐도 사랑스럽고, 오래 안 봐도 사랑스럽고. 그게 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너도 그렇다는 거예요. ‘풀꽃’은 제 축복이기도 하고, 독자들의 축복이기도 합니다.

나태주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이들의 모습. ⓒ이대웅 기자
시가 완성되는 단계를 다시 한 번 느낍니다. 편집자도 좋은 독자 중 한 사람인데, 저 가슴에 가서 시가 되어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는 것입니다. 이번에 그런 점에 대해 다시 한 번 깨닫고 배웠습니다. 오늘 오면서 핸드폰에 써 놓은 시가 있는데 읽어보겠습니다.

‘딸은 멀어지며 커지는 사람이고
아버지는 남아서 작아지는 사람
딸은 그래서 큰 별이 되고
아버지는 드디어 작은 별이 되는 사람
둘이서 마주 보며
마주 보며’.

제목이 ‘마주 보며’, 오늘 썼습니다. 이 시는 우리 편집자에게 주고 싶습니다.

아내가 왜 다른 여자랑 다를까요? 혼인신고를 해서? 자식을 낳아서? 자신의 가장 부끄러운 부분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내 앞에서 옷을 못 벗는다면, 그는 아내가 아닐 것입다. 아내 앞에서는 비뚤어진 발가락을 맨발로 내어놓을 수 있습니다. 아내 또한 그런 것을 남편에게 보여줄 수 있지요.

그런데 제 작품 세계는 아내가 다 모르는 게 있습니다. 하지만 편집자는 그걸 봐요. 그래서 작가들은 편집자들에게 가장 부끄럽고 못된 부분을 들킵니다.

작가들은 피(被)관음증 환자입니다. 내 것을 좀 봐줬으면 하고, 들키고 싶은 사람입니다. 보지 마세요 하면서 보길 원하는…. 정신병자들 같은 사람이지요(웃음).”

-시로 업을 삼은지 50년째라고 하셨는데, 그 50년을 매듭 짓는 말씀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50년이 꿈같이 갔습니다. 중간에 포기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아 다행입니다. 스타도 아니고 탤런트도 아니지만, 책을 읽어주는 독자들 있어 가능했습니다.

독자들이 중요합니다. 시인이 어떻게 존재합니까? 독자가 있어야 합니다. 정말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독자들이 있어 감사합니다. 자만이 아니라, 이제는 제 독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한 분 한 분을 섬기는 마음으로 글을 써야죠.

괴테가 말했습니다. ‘어린이에게는 노래가 되고 청년에게는 철학이 되고 노인에게는 시가 되는 글’에 대해서요. 한 계층, 한 부류에게만이 아니라, 계층과 연대를 초월해 감동을 주는 글이어야죠.

가장 중요한 것은 인류 공통의 진리와 감동이 있어야, 좋은 시가 됩니다. 그래서 시는 한없이 쉬워져야 하고, 한없이 헐거워져야 하고, 한없이 낮아져야 합니다. 누구나 읽어도 알 수 있는 쉬운 말이지만, 꼭 필요한 말을 써 주는 것입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니, 좀 더 가겠습니다.

소설가, 수필가, 성악가…, 다 가(家)를 쓰는데, 왜 시인만 인(人)을 쓸까요? 끝까지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라는 것 아닐까요. 사람답게, 사람을 존중하고 울고 감동하고 반성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살라고 말입니다.”

나태주
▲출판기념회에서 차미연 아나운서의 질문에 답하는 나태주 시인(오른쪽). ⓒ이대웅 기자
-오늘 오신 독자들의 사연을 미리 받았습니다. 시로 치유받기 원하는 이들에게 ‘짧은 처방전’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첫 사연입니다. ‘괜찮다가도, 도망가고 싶고 세상이 부담스럽습니다. 언제 다시 일상이 자연스럽던 과거의 나로 돌아갈까요?’

“과거의 나가 좋았다는 것이지요. 이것도 신달자 씨에게 들었습니다. ‘과거를 너무 많이 기억하지 마라. 오늘의 삶에 충실하라. 오늘의 삶을 즐겨라. 내일의 것은 신에게 맡겨라. 작은 일에 화내지 마라. 사람을 미워하지 마라.’

지난 때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기대 수준을 조금 낮추면 어떨까요. ‘어디엔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울어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는 시가 있습니다.

어디엔가 나를 위해 빌어주고 응원해주고 걱정해주는 누군가 있는지 찾아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자꾸 바라보려 하지 말고, 나를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는지 찾아봅시다.”

-다음 사연입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가장이 된 30대 중반의 동료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을 어떻게 들려주면 좋을까요.

“‘기 죽지 말고 살아봐 꽃피워 봐 참 좋아’. 시 ‘풀꽃 3’입니다. 놀랍게도 이 시를 고3 수험생 엄마들이 써 달라고 합니다. 마치 부적처럼요(웃음). 가끔 부적 쓰는 것 같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이 참 훌륭합니다. 할머니 드리고 싶다고 풀꽃을 써 달라고 합니다. 그 분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힘내세요. 내일도 해가 뜹니다.”

-윗사람들 갑질 때문에 힘들다는 사연도 있습니다.

“못됐네요. 갑은 있습니다. 을이 있으니까요. 갑들이 정신을 좀 차려야 해요. 백화점에서 손님이 왕이라고, 직원들 막 혼내면 안 됩니다. 내 자식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이쁘잖아요? 갑질은 바뀌어야 하지만, 견디라고 하면 욕일까요? 튀어나오라 하면 안 될까요?

갑질하는 사람이 반성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당한 것이 있다면, 그 반대로 하라’는 말도 있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들도 자꾸 얻어먹으려 하면 안 됩니다. 밥을 사고, 축복을 받으려 해야지요. 갑질하는 사람은 결국 후회하겠지만, 끝내 모를 수도 있습니다. 좀 참아야죠.”

-좋은 길인 줄 알고 따라가는데, ‘이 길이 아닌데’ 싶을 때가 있습니다.

“괴테가 말했습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우리는 속도만 계속 냅니다. 미쳤어요.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는데 누가 제가 타고 가던 차를 신고했대요. 너무 느리게 간다고. 정상적인 걸 신고하는 세상입니다.

정상적으로 가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인생의 종착지는 정년퇴직이 아니라, 공동묘지입니다. 시대가 다르지만 결론은 마찬가지입니다.

‘낮에 힘들었냐? 기다려라 저녁이 온다’는 시를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쉬고 싶지 않아도, 때가 되면 쉴 것입니다. 때가 되면 머리가 빠집니다.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그 사람, 산티아고 길 걸어가면 좋겠네요. 스페인 물가 싸요(웃음).

-다시 선생님께 묻겠습니다. 내 인생 최고의 페이지는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집사람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박수). 행복이지요. 저녁에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 속에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홀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사랑이란 관심과 신뢰와 존경입니다.

만남에는 3가지 축복이 있어야 합니다. 살아있음의 축복, 장소의 축복, 시간의 축복. 시간과 생명과 장소입니다. 우리는 지금 위대한 순간을 살고 있습니다. 저는 ‘날마다 버킷리스트’입니다.

16세 때 3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시인이 되는 것, 예쁜 여자랑 결혼하는 것, 그리고 공주에 사는 것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첫 번째가 어이없는 것이었지요. 한미한 집안이었는데,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아직도 시인이 되는 과정입니다. 계속 되고 있습니다. 제가 죽은 다음 시인이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시인(是認)해야 시인(詩人)이 됩니다. ‘프레드릭’이라는 동화를 읽어보세요. 생쥐 이야기인데, 마지막 문장이 ‘너 시인 같아’입니다. 생쥐가 ‘나도 알아’라고 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내가 시인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남이 말해줘야 합니다. 시인은 독자가 만드는 것이지요.

저는 독자들에 의해 ‘풀꽃’ 시인이 되었습니다. 독자가 그렇다면 그런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김영란법은 알아도, 시인 김영랑을 몰라요. 여러분들이 가진 것을 사랑하십시오. 자긍심을 가지고, 앞으로 더 잘 살아갑시다.”

너의 햇볕에 마음을 말린다
▲너의 햇볕에 마음을 말린다 나태주 | 홍성사 | 140쪽 | 11,000원
-독자 질문입니다. 선생님 시를 우연히 알게 돼 찾아왔는데, 20대이신 줄 알았습니다. 오랜 시간 깨끗한 글을 쓰시는 비결이 무엇인가요.

“저는 깨끗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더럽고, 욕심이 많고, 지저분하고, 불안합니다. 그렇지만 빨래를 하고 싶어요. 마음이 더러우니까.

사람의 마음은 걸레와 같다. 모멸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런데 알아야 합니다. 걸레는 원래 더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맹자가 명덕(明德)을 말했습니다. 우리는 원래 마음이 밝고 덕이 있었는데, 어두워진 것입니다. 명명덕(明明德)해야 합니다. 다시 밝게 해야지요.

원래 깨끗한 옷감인데, 걸레가 됐습니다. 빨아야 합니다. 그것이 기도하고 영화 보고 예배드리고 여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화 <기생충>을 보고, 얼마나 놀랐습니까. ‘돈이 다리미야, 부자는 구김살이 없더라’고 합니다. 저는 깨끗하지 않습니다. 깨끗해지고 싶은 사람입니다. 좋은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는 천사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천국이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천국을 품고 마음 속에 천사라고 생각하다 보면, 천사 비슷한 세상을 살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천사를 만날지도 모릅니다.

천사라고 생각하고 잘 대해주면, 그도 나에게 잘 해주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다 보면 천국으로 조금씩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깨끗한 사람이 아니라, 깨끗해지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빨래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시를 쓰는 것입니다. ‘어찌 그렇게 깨끗한 시를 씁니까’ 하고 묻는데, 내 마음이 더럽기 때문입니다. 깨끗해지고 싶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