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막 9:23-24)”.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무한한 위로를 줍니다. 만약 가능하지 않았을 때, 오는 충격과 실망을 우리 믿음이 잘 감당할 수 있을까요? 혹시 우리는 이 말씀을 하신 주님의 의도를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는 말이 무슨 말이냐고, 주님께서는 반문하십니다. 즉 주님이 하실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 우리가 먼저 믿는 자인지 아닌지가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해 주시겠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는 오직 믿음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여기서 ‘할 수 있거든’의 주어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즉 ‘하나님이 할 수 있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믿는 자는 그 믿음으로 능히 못할 일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안 돼”의 ‘안’은 부사로서 용언(동사, 형용사) 앞에 쓰여, 부정이나 반대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어학사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안 돼”라는 말이 나오는 구절은 필자의 기억으로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성경은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임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죄를 짓거나 하지 말아야 할 금기사항에는 단연코 명령문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십계명은 ‘말라, 말고, 말라, 지키라, 그리고 하라, 말라’로 끝이 납니다. 모두 우리 인간들이 지켜야 할 계명이므로 단호하게 명령합니다. 십계명 중에는 ‘말라’는 말이 7개 계명이며, 말고, 지키라, 하라, 라는 명령문은 각 1계명씩 총 3개 계명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통해 “원수를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강력하게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지키고 실천해야 할 대목에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도 한쪽 강도에게 “오늘 너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확실한 신뢰와 믿음을 주십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역할과 사명이 끝났을 때도 “다 이루었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서의 직분 자들은 권력자들이 되어, 성도들을 향해 “안 돼”라는 말을 줄곧 사용하며 성도들에게 명령합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통합) 총회 헌법 속 정치원리를 보면, 양심을 주재하는 이는 하나님뿐이시라고 합니다.

‘그가 각인에게 양심의 자유를 주어 신앙과 예배에 대하여 성경에 위반하거나 지나친 교훈이나 명령을 받지 않게 하였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신앙에 대하여 속박을 받지 않고 그 양심대로 할 권리가 있으니 아무도 남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지 못한다.

개인에게 양심의 자유가 있는 것 같이, 어떤 교파 또는 어느 교회든지 교인의 입회 규칙, 입교인의 자격, 교회의 정치의 조직을 예수 그리스도의 정하신 대로 설정할 자유권이 있다. 진리는 믿음과 행위의 기초이다. 진리가 진리 되는 증거는 사람을 성결케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진리와 행위는 일치되어야 한다.’

위와 같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성경이 요구하는 말씀은 사라진 채, 교회 안의 힘 있는 권력자들에 의해 정해진 룰들이 그들만의 소유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그들에 의해 교회가 좌지우지되는 모습은,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고 성도가 성도답지 못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의 지도자라는 분들이 성경 한 구절 읽지 않고 있는 현실을 보면, 참으로 딱해 보입니다. 하지만 어떤 분들은 열심히 성경책을 들고 다니지만, 말씀을 보고 읽거나 뜻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수십 독 하더라도, 성경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알 수 없고, 오히려 자신의 도구로 만들어 잘못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암송하며, 늘 성경을 끼고 살다시피 하지만, 성경 속에 담긴 하나님의 신실하신 뜻과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는 온데간데없고, 빈껍데기인 율법 신앙인으로 생활을 한 결과 그들은 오히려 메시아를 십자가 나무 형틀에 매달아 죽인, 인류 역사 최대의 뼈아픈 죄를 짓고 말았던 비극의 민족들이었습니다. 그 유대인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교회 안의 서열 문화와 기득권자들의 텃세 놀음은 복음을 방해하며 주님의 참된 평화를 저해합니다. 목사님을 청빙할 때는 스펙만 보고 결정하며, 유명한 목사님의 추천만으로 청빙하는 모습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힘 있는 권력자의 입김에 의해 결정되는 청빙과 교회의 모든 사무는 세상보다 못한, 어두운 창살 없는 감옥 같기도 합니다.

성도들이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 건의 또는 제안을 하면, 무조건 “안 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건의하거나 옳은 말을 하는 성도들을 멸시 천대합니다. 그리고 자기편에서 무조건 “예스”로 일관하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교회를 마구잡이로 흔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죄 짓는 일입니다. 이처럼 죄로 인한 고통과 슬픔은 성도들이 죽을 때까지 짊어져야 하는 멍에입니다. 죄로 인한 고통과 슬픔은 믿지 않는 자들과 성도들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믿지 않은 자들은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죄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크게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 잊어버립니다. 간혹 크게 느끼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에게 죄책감은 절망을 가져다 주고, 심하면 소중한 삶을 자살하거나 포기하게 합니다. 예수님 십자가 형틀에서 매달리실 때 한쪽 강도처럼 포기하거나 가룟 유다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그 가룟 유다 보다 못한 지도자들이 현재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성경에는 부정적인 사람들이 성공한 사례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항상 긍정적 마인드를 가졌던 분들만 하나님의 참 된 제자로 성공을 했던 기록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늘 함께 염려하며 머리를 맞대고 소통하며 양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세상을 향한 복음의 메아리가 아름답게 퍼져가는 교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죄악이 만연하고 갈수록 사랑은 식어가는 이 시대에,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수 있을지 기도하며 성도로서의 삶을 통해 본을 보이는 행위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매사 정직하고 죄를 멀리하며 이웃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까이 접근 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쟁이들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복음의 길은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마인드를 우선 제거해야 합니다. “안 돼”라는 말보다, 믿음으로 할 수 있다는 신뢰로 접근해야 합니다. 참 좋은 의견입니다. 아니면 함께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노력해보자는 취지의 발언은 상당한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교회마다 힘을 잃고 복음 사업이 잘 안 되며 사회를 향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성도들이 불신자들로부터 좋지 않은 평가나 욕을 먹는 이유역시 교회나 성도들의 의로운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는데서 오는 불신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 불신의 주인공들은 바로 교회 안 지도자들입니다. 지도자들의 모습에서 의로움은 찾을 수 없고, 부정과 불신, 그리고 시기와 모함으로 얼룩진 모습과 이기심, 그리고 금전과 물질에서 자유스럽지 못한 지도자들의 행위를 봅니다. “안 돼”라는 소리에만 목청을 높이고 있는 현실을 제거하지 않으면, 교회다운 교회의 사명에는 많은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