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포럼 18차 세미나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하나님은 우리가 위대한 일들을 이루는 것보다, 당신만을 전적으로 의뢰하는 것을 더 귀히 여기신다. 성경은 ‘믿음’을 탁월한 ‘하나님의 일’로 칭송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 6: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요 11:40)”,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히 11:6)”.

성자 예수께서도 철저한 성부 의존적 삶으로 성부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요 5:30)”,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요 5:19)”.

‘하나님 의존’이 하나님께 최고의 영광됨을 아는 어느 성도의 겸비한 고백을 들어보라. “내가 내 허물과 내 약함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당신의 긍휼만을 의지하게 하므로 당신께 돌아갈 영광이 무엇이며, 당신께 유익될 것이 무엇입니까? 어찌 당신은 나를 비천한데 두시고 당신만 의지하도록 하시는지요?”

그의 고백은 더욱 확장된다.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나 다윗 왕 같은 위대한 인물이라면 몰라도, 나 같은 무지렁이가 당신을 의존한다고 당신께 무슨 영광이 되겠나이까? 그러나 당신은 ‘내가 원하는 것은 너의 위대함이 아니라 나에 대한 너의 의존이다’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은 많이 다른 것 같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도모해 내는 것이 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허물 투성이 죄인이 하나님을 의존한다고 그게 무슨 대수라고, 사람들의 ‘허물’에는 눈감고 그것에서 영광을 취하시겠는가, 이는 ‘공의롤 구하시는 하나님(미 6:8)’의 속성과도 어긋난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남에게 굴복해본 적이 없는 강하고 존귀한 자가 하나님을 의존한다면, 하나님의 위대함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하면 그 같은 사람을 그 앞에 무릎 꿇리었을까?’라며.

반대로 그들은 비루하고 약한 자가 성자나 영웅이 된다면,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하면 저런 무지렁이를 위대한 성자로 만들었는가’라며. 그러나 지체 높은 왕이던 비천한자이든 하나님 의존은 모두 동일하게 하나님께 가치롭다.

이는 죄로 하나님과 원수 되고, 마귀의 지배 아래 있는 모든 인간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하나님을 의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전 12:3). 십자가에 달려 죽어감에도 예수님을 조롱하며(눅 23:39) 끝내 그를 영접하지 않은 강도의 완악함을 통해서도, 믿음은 인력으로 되지 않음이 입증됐다.

죄인은 초자연적인 성령에 의해 견고한 진(陣, 고후 10:4)인 ‘자립심(自立心)’이 부서지고, 그들을 묶은 마귀의 사슬이 끊어지지 않는 한 누구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

우리의 ‘하나님 의존’이 가치로운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이 그것을 성자의 그것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성자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 구속을 이룬 후에는 우리가 성자와 일체시되고, 하나님 의존을 비롯해 우리의 모든 몸짓이 성자의 몸짓으로 간주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짓에서 성자의 그것을 보시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이 그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심(고후 5:21)”에 근거한다. 주님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내 아들이 널 대신한 후엔 너는 내게 그와 동일하단다. 그가 너를 위해 죄가 되고 네가 나의 의가 됐듯, 이젠 너의 모든 것이 그의 대신이란다.”

성자의 피로 구속을 받은 자가 겸비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드렸던 의존과 동일시되고, 그것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취하신다. 우리의 하나님 의존을 하찮게 여길 수 없는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약하여 하나님을 의존할 때, 나를 그의 곁에 두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구현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가치롭다. 부모가 장애 있는 자식을 평생 옆에 끼고 살듯, 하나님도 우리를 항상 곁에 두고자 우리를 약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16)”는 말씀은 ‘하나님께는 사랑이 전부이시다’는 말이다. ‘우리에 대한 그의 사랑’이든 ‘그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든 그에게는 사랑이 전부이시다. ‘당신 외엔 누구와도 사랑을 나누기를 허락지 아니하시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신 6:15, 약 4:4-5)’이시다.

우리를 사랑하여 자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셨듯, 우리의 사랑을 독점하시려 우리를 약하게 하여 그 만을 바라보게 하신다. 야망에 불타는 집념의 사나이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평생 절뚝거리며 살게 하심도(창 32:25, 31), 그를 당신 곁에 두시려는 그의 꼼수(?)였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를 곁에 두고, 당신에게서 날아가 버리지 못하게 하려 때때로 그들의 날갯죽지를 부러뜨리시는 것이다. 전쟁마다 전승하며 승승장구하던 다윗의 날갯죽지를 하나님은 밧세바(Bathsheba)로 부러뜨리셨다(삼하 11:1-4).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눅 22:33)”고 자만하던 베드로의 날갯죽지를 부러뜨렸고(마 26:72), 3층천(天) 낙원을 주유(周遊)하며 온갖 영계의 비밀을 향유(享有)하던 바울의 날갯죽지도 부러뜨리셨다(고후 12:7).

우리의 약함이 우리를 당신 곁에 두고자 경륜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발현임을 알 때, 어찌 그 약함에 낙담하고 그것을 부끄러워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 사랑에 감읍할 뿐이다.

일찍부터 하나님은 의지할 것 없는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시 146:9)”이시고,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는(시 145:14)”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시련과 외로움 속에서 눈물의 밤을 지새고 있는가? 낙담하거나 부끄러워 마시라. 그것은 당신을 그의 곁에 바짝 두시려는 하나님의 손짓이고, ‘내가 너와 함께 있고 싶다’는 속삭임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1-2)”라는 목가적(牧歌的)인 ‘다윗의 시’가 사울에게 쫓기며 깜깜한 동굴을 전전하며 쓴 시(詩)라는 것을 아시는가?

그의 현실은 말 그대로 음부 같은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했지만, 그것은 또한 하나님이 그에게 가장 가까이 계셨던 시간이기도 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하나님은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 그에게 가장 가까이 오셨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