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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베드로후서 1장 1-4절


적자생존의 세상

1982년 독일에서 ‘올해의 낱말’로 꼽힌 단어가 있다. 바로 ‘팔꿈치 사회’다. 이 말은 ‘옆 사람을 팔꿈치로 밀치며 앞서가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라는 뜻이다.

누구나 남을 이기려 한다. 빨리 적응해 남보다 앞서가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법칙을 알기 때문이다.

세상 법칙은 살아남으려면 이겨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법칙의 일반화로 사람들은 남과 경쟁에서 이기려 한다.

기업들은 제품 점유울 경쟁에서 이기려 한다. 삼성과 LG는 가전제품 등에서 경쟁이 치열하다. 스마트폰은 SK, KT, LG가 사활을 건 점유율 경쟁을 치르고 있다.

경쟁과 점유율은 진정한 승자가 되지 못한다. 진정한 이김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김이다. 저의 책 《이기는 독서(절판)》에서는 자기를 이기려면 독서를 하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자기를 이기는 것이 곧 세상을 이기는 비결이라고 이야기 한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겨라

다른 사람과의 경쟁도 해야 한다. 다른 회사와 경쟁에서도 이겨야 한다. 하지만 진정한 싸움은 다른 사람과의 싸움이 아닌 자기와의 싸움이다.

하수와 고수의 차이점이 있다. 고수는 자기와 싸운다. 하수는 다른 사람과 싸운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그 뜻은 “몸을 닦고 집을 안정시킨 후 나라를 다스리며 천하를 평정함”이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는 고수가 추구 하는 삶이다. 고수는 가자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 자기 관리다.

저도 스스로 관리가 되지 않으면 일주일간 주어진 과제를 거의 해낼 수 없다.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일주일 분량의 반도 해내지 못한다. 그러기 위해 급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일에 우선순위를 둔다. 그럴 때 겨우 해낸다. 제 삶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관리다. 즉 자기와의 싸움이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가 있다. 프로는 자기를 관리한다. 아마추어는 남을 관리하려 한다. 그래서 프로와 아마추어를 가르는 기준은 ‘얼마나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가?’다.

고수나 프로는 자신을 제어할 줄 안다. 하수나 아마추어는 자기를 제어할 줄 모른다. 그 결과 아마추어는 영원한 아마추어로 살아가는 지도 모른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신앙생활도 자기 관리에 따라 결정된다. 신년이 되었다고, 1년간 해야 할 일을 무척 많이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 생각해야 할 것은 ‘자기 관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저는 2020년에도 자기 관리에 집중하고 있다. 자기 관리 여부에 따라 2020년 12월 31일에 희비가 엇갈리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에서 자기 관리를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자기 관리가 될 때 신앙의 차원을 한 차원 높일 수 있다.

오늘 말씀처럼 보배로운 믿음(1절)이라면, 믿음을 더 보배롭게 해야 한다. 하나님 안에서 은혜와 평강도 더욱 더 많아져야 한다(2절). 하나님을 아는 믿음도 지금보다 더 많이 알아야 한다(3절). 마지막으로 정욕을 쫓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쫓는 하나님의 성품을 소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4절).

그리스도인은 신앙생활은 물론, 삶에서도 한 차원 높아야 한다. 소수에게 존중 받았다면 다수에게 존중을 받아야 한다.

자기만을 위한 삶이었다면,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한다. 교회 공동체만 바라보았다면, 사회 공동체도 바라봐야 한다. 즉 신앙생활은 물론 삶도 한 차원 높여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다.

2020년, 한 차원 높이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왜 그리스도인은 신앙생활을 한 차원 높여야 하는가? 세상적인 사람에서 영적인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영적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의 뜻은 탐욕스런 사람, 마귀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 삶은 영적인 삶이다.

영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채움이 아니라 나눔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보태기‘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빼기‘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인간 차원의 낮은 수준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 치원의 높은 수준의 삶을 뜻한다.

인간 차원의 삶을 사는 사람의 특성은 육적이다. 즉 자기 욕망 채우기다. 성경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의 부자를 통해 알 수 있다. 나눔이 없고 채우기만 있는 부자는 결국 지옥에서 이를 갈면 살아갔다.

구약의 아간, 신약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은 삶도 자기 욕망 채우기였다. 이들도 결국은 하나님께 버림받아 인생에서 불행의 막차를 탔다.

하나님 차원의 삶은 영적이다. 영적인 삶은 자기 재산에서 ’빼기‘를 할 줄 안다. 삭개오를 보면 알 수 있다. 삭개오는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다고 말한다. 만약 다른 사람의 것을 속여서 빼앗았다면 네 갑절로 갚겠다고 말한다.

우리는 신앙을 한 차원 높여야 한다. 2020년에는 적어도 신앙을 한 차원 높여야 한다. 한 차원 높이지 않으면, 사울왕과 같이 살게 된다. 사울왕은 자기만 살겠다고 했다. 금쪽같은 사위를 죽이겠다고 평생을 쫓아다닌다. 애굽와 바로도 마찬가지다. 바로도 자기의 욕심만 챙기다가 결국 하나님의 어마무시한 징계를 받았다.

반면 신앙을 한 차원 높인 믿음의 사람들은 달랐다. 다니엘은 믿음과 목숨을 바꾸며 살아갔다. 욥은 모든 것을 다 잃는 고난과 신앙을 맞바꾸었다. 신앙을 한 차원 높이면,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2020년은 신앙을 한 차원 높여야 한다. ’육적인 차원‘에서 ’영적인 차원‘으로 한 차원 높여야 한다. ‘보태기’의 삶에서 ‘빼기’의 삶으로 한 차원 높여야 한다.

손해를 보며 살아가야 한다

어릴 적부터 귀에 딱지가 붙도록 듣던 말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손해를 보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손해를 보고 사는 삶을 기쁨으로 여기라고 설교했던 선배 목사님들의 설교를 많이 들으며, 손해를 보는 삶을 살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지금은 어떤가?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은 손해가 아니라 욕망 채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이미 영적인 일은 뒷전이 되어버렸다. 영적인 일이 뒷전이 되니, 영적인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 도리어 육신의 일을 도모하려고 눈치 보기 바쁘다. 하지만 현대 교회의 모범인 초대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손해와 나눔이 그 중심에 있었다.

강변교회 원로 목사인 김명혁 목사가 이런 말을 했다. “기적은 철, 신학은 동, 설교는 은, 사랑은 금”이다. 그는 회개와 참회의 영성과 함께, 사랑과 섬김의 영성보다 귀중하고 아름답고 보배로운 영성은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덧붙이길,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 세상에 오셔서,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다 죽으신 성자 예수님이야말로 ‘사랑과 섬김의 영성’을 최고로, 아니 절대적인 최고로 지니신 분이라고 밝혔다.

그렇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영적인 차원으로 살아가야 한다. 자신을 위한 육적인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과 섬김의 삶으로 살아가야 한다.

세상은 채움으로 살아간다

세상은 육적인 차원으로 살아간다. 나눔이 아니라 한없는 채움이다. 그 정도가 아주 지나치다. 최근에 집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올랐다. 그것도 부족해 더 올리려고 용을 쓴다.

개인이 이 정도니, 재벌은 말할 것도 없다. 최근 한진그룹 경영진인 가족들이 경영권을 서로 쥐기 위해 가족 간에 경영권 분쟁이 있었다고 한다. 국민들에게 볼썽사납게 비치자, 조원태 회장과 어머니 이명희 씨가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다.

삼성그룹 등 재벌들은 달력 숫자가 바뀌면 계열사가 엄청나게 늘어난다. 2017년 4월 뉴스에 이런 기사가 있다.
“대기업집단 계열사 1,155개, 한 달 새 24곳 증가”. 대기업은 계열사를 엄청나게 늘리고 있다. 끝을 모르는 채움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이런 채움만 가득한 현상이 왜 벌어지는가? 인간이 끝없는 욕심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성경은 엄중하게 경고한다. “육신을 따르면 사망이니, 육신이 아니라 영을 따르라”고 한다. 그것이 로마서 5장 5-6절이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일을 도모하면, 사망으로 치닫는다. 그러니 영적인 일을 도모해야 한다. 영적인 일을 도모할 때 사망이 아니라 생명과 평안으로 인도받는다.

어떤 사람이 사업을 통해 60억원의 수입을 올렸다. 돈이 많아지니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든단다. 세상의 돈맛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더욱 더 육적인 일을 쫓게 되었다.

전에는 돈이 조금만 넉넉했으면 다른 사람에게 베풀기 위해 돈을 벌고자 했다. 자신에게 돈이 20억원 정도 있을 때도 친구들에게 맛있는 것과 좋은 옷 사주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돈이 더 모아져 60억원이 되자, 친구들에게 인색해졌다. 주위 사람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삶에서조차 ‘짠내’가 펄펄 난다.

이젠 돈을 모으기 위해 돈을 거의 쓰지 않는다. 이유는 하나다. 돈 ‘100억원 모으기’로 삶이 목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육신의 일은 끝 모를 탐욕으로 향한다.

교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 저도 교회 개척을 했다. 교회를 개척하면 처음에는 순수함이 넘쳐난다. 사람 자체가 영적으로 똘똘 뭉쳐진다.

하지만 대형교회가 되는 순간 개척 때와는 확연히 다른 사람이 된다. 순수함은 사라지고, 세상적 욕심꾸러기로 변질되어 있다.

대형교회가 되었으면 교인들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고자 해야 한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대형교회가 되고 나면, 초대형교회를 추구한다. 초대형교회가 되고 나면, 강남에서 제일 큰 교회를 추구한다. 건물도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크게 짓는다.

서울의 한 대형교회 목사가 교회를 개척했다. 개척할 당시 교인들에게 “교인이 300명쯤 되면 교회를 분립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사임할 때까지 전혀 분립하지 않았다.

결국 한국 최대 교회 근처인 초대형교회까지 성장했다. 성장시킬 대로 성장시킨 후, 외형 늘리기를 잘 하는 사람을 후임자로 삼고 은퇴했다.

초대형교회인 명성교회가 사회와 교계의 질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습을 강행했다. 당대 대형교회 목사로 부족해, 2대 대형교회 목사 집안까지 만들었다.

한국교회가 영적 차원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있다. 육적 차원으로 존재한다. 말만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이야기할 뿐이다. 한국교회는 영적으로 한 차원 높아져야 한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 육적 차원에서 영적 차원으로 한 차원 높여야 한다.

영적 차원을 한 단계 높인 교회가 있다. 서울영동교회다. 서울영동교회는 개척 시 교인 수가 300명이 넘으면 분립개척하기로 결의했다. 교인이 300명일 때는 분립개척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교인이 500명이 되자 분립 개척을 했다.

분립해서 개척한 교회가 한영교회, 일원동교회, 서울남교회, 샘물교회 등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한영교회는 다니엘교회, 샘물교회는 수지샘물교회, 은혜샘물교회, 좋은나무교회를 분립 개척했다. 즉 9개 교회가 서울영동교회의 뿌리에서 생겨났다.

이런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 영적 차원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다. 분립 개척을 말로만 하는 초대형교회들은 아무리 큰 교회라 할지라도, 육적 차원에 머무는 교회에 불과하다.

저는 최근 ‘NEXT 세대 MINISTRY’ 대표인 김영한 목사를 만났다. 그는 육적 차원이 아닌, 영적 차원으로 목회를 하고 있었다. ‘보태기’가 아니라 ‘빼기’의 목회를 하고 있었다.

그는 혼자 할 수 있는 것도 다른 사람과 함께 한다. 자기를 빼야 다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다. 그는 자기만의 성을 많이 쌓기 위한 사역을 하지 않는다. 자기 것을 더 많이 빼려는 사역을 한다.

김영한 목사를 통해 배운 것이 있다. 나눔을 위한 책 출간이다. 저는 지금까지 제가 쓴 글이니 저만을 위해 책을 출간했다.

그는 책도 자신이 기획을 한다. 그 기획에 다른 사람들도 동참케 한다. 이젠 영적으로 한 차원 높이려 한다. 이제 저도 제가 많이 쓴 글이라도, 다른 분들과 공저를 통해 책을 출간하려 한다. 이미 몇 사람과 의논이 끝난 상태다.

그리스도인들이 육적 차원으로 살고 있다면, 영적 차원으로 삶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교회가 개척해서 대형교회가 되었으면, 분립개척을 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 분립개척을 하지 않는다. 육적인 차원으로 살고자 하는 욕심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어제 한 집사님에게 자기 동생이 돈 100만원을 주었단다. 그러자 어떤 선교사님이 생각나 망설임 없이 100만원을 송금했단다. 그렇다고 자신의 형편이 좋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육적 차원으로 살고자 하지 않고 영적 차원으로 살고자 했기에 송금했다.

삶이 힘드니 여행도 가고 싶었다. 당장 여행을 갈 만한 여력이 못 된다. 하지만 영적 차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자기보다 선교사님에게 돈이 더 필요할 것 같아 송금을 했다.

그리스도인은 매년 한 차원 높아지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만약 한 차원 높아졌다면, 이젠 두 차원 높여야 한다.

저는 2020년 삶의 모토가 ‘영적으로 한 차원 높이는 신앙생활과 삶을 살기’다. 그러기 위해 내적 성장을 먼저 추구하고자 한다. 내적 성장은 세 가지다. 영적 성장, 지적 성장, 인격적 성장이다. 성장이 되어야 한 차원 높아진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하나님께서 제게 한 차원 높은 신앙생활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저는 설교자들에게 설교 글쓰기를 가르친다. 하나님께서는 설교자들을 가르쳐야 하므로, 제게 사고력과 통찰력, 그리고 한 차원 높아진 글쓰기의 성장을 원하신다. 당대 설교자들에게, 당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창의성, 더 깊은 통찰력 있는 책을 쓰기 위해서 한 차원 높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차원 높은 신앙성장을 원하신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은 영적 성장 투구다.

그럼 왜 그리스도인은 영적 성장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이런 말을 했다. “세상을 움직이려면 자신을 움직여라.”

자신이 성장해야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 자신이 성장하지 않았는데,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법은 없다. 영적이지 않고, 육적인 사람을 움직일 수 없다. 그러므로 세상을 움직이려면 자신을 움직여야 한다. 자신을 영적으로 성장시켜야 한다.

사람의 가장 약점 중 하나가 일정 시간이 흐르면 성장이 거의 없어진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성장을 해야 한다. 신앙도 한 차원 높아져야 한다. 삶도 한 차원 높아져야 한다.

즉 삶이나 신앙도 시간이 흐르면서 한 차원 높여야 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한 차원이 높아지지 못한 채, 그대로일 경우가 많다.

심리학 용어 중 ’붉은 여왕 가설(The Red Queen hypothesis)’이란 것이 있다. “계속 발전(진화)하는 경쟁 상대에 맞서,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발전(진화)하지 못하는 주체는 결국 도태된다”는 가설이다.

사람이라면, 시간이 흐를수록 한 차원 성장해야 한다. 한 차원 성장하지 않으면 결국 도태되기 때문이다. 결국 신앙이나 삶이나, 성장이 답이다. 어제보다 한 차원 높아져야 한다. 작년보다 한 차원 높아져야 한다. 만약 어제나 작년과 같다면 이는 이미 도태된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세울 모토가 있다. ‘눈덩이 효과(Snowball effect)’다. 눈덩이 효과는 ‘작은 성공’으로 ‘큰 성공’을 이루는 효과다. 눈덩이 효과는 어떤 사건이나 현상이 작게 시작해 점점 커지는 과정을 뜻하는 용어다.

세상에는 눈덩이 효과가 먹히고 있다. 신앙도 눈덩이 효과와 같이 한 차원을 높여야 한다. 그 이유는 영적인 것을 한 차원 높이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난도는 그의 책 《트렌드코리아 2020》에서 ‘업글 인간’을 이야기 한다. 그는 ‘네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라’고 이야기한다. 성공보다 성장을 추구하는 새로운 자기 계발형 인간인 ‘업글 인간’이 등장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세 가지 업글 인간을 이야기한다. 그 세 가지는 몸 업그레이드, 취미 업그레이드, 지적 업그레이드다.

저도 아트설교연구원 회원들에게 입만 열면 하는 말이 있다. “매년 눈에 띄게 성장하라.”

매년 눈에 띄는 성장이 영적 지도자들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영적으로 눈에 띄게 성장해야 한다. 설교자는 지적으로 눈에 뜨이게 성장해야 한다. 설교자는 인격적으로 눈에 뜨이게 성장해야 한다.

저도 신앙생활과 삶에 한 가지 과제를 안고 살아간다. 삶, 영성, 인격이 눈에 띄게 성장하는 것이다. 결국 바울과 같이 예수그리스도의 자녀다운 사람으로 업그레이드되는 것이다.

제가 설교자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면서 가장 기쁠 때도, 회원들이 성장할 때다. 순천에서 사역하는 목사님께서 영적으로 한 차원 높은 성장을 이루었다. 설교자가 한 차원 성장을 하자, 교회가 외적으로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때가 각 교회에서 2019년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는 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국내가 아닌 외국에서 연말과 2020년 새해를 맞는다. 핑계는 책을 쓰기 위함이다.

2020년을 맞이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새해 소망을 물으니, 대부분 재정적으로 넉넉해지거나 자신과 가족이 건강한 것이었다.

저는 여전히 개인적인 성장과 성숙이 저의 소망이다. 한 차원 높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저의 소망이다. 이는 개인 성장이 외적 성장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됨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다. 하나님의 영광을 살아간다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성장과 성숙이다. 작년보다 한 차원 높은 성장을 이루는 것이다.

그럼 신앙과 삶을 한 차원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보물’을 찾고자 해야 한다.

본문 4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정욕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한 차원 높아지는 것이다.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도록 예수님 안에 숨겨진 보물을 찾아야 한다.

예수님 안에 감추어진 것이 있다. 그 감추어진 것을 찾고자 해야 한다. 감추어진 것을 찾는 노력이 한 차원 높은 사람이 되도록 한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숨은 것을 찾아야 한다. 예수님 안에 숨은 것 찾으려면 두 가지를 찾아야 한다. 하나는 ‘숨은 그림 찾기’다. 또 다른 하나는 ‘숨은 보물 찾기’다. 우리가 찾을 것은 ‘숨은 그림’이 아니라 ‘숨은 보물’이다.

숨은 보물을 찾았다 해서, 여기서 그치면 안 된다. 그 보물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예수님 안에 있는 보물 만들려면 먼저 할 일이 있다. “내 소유를 팔아야 한다”.

마태복음 13장은 천국 복음이다. 마태는 천국 복음을 한 마디로 정의 내린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

그렇다. 천국은 예수님의 밭에 감추어져 있다. 보화를 발견하면 내 소유를 팔아 구입해야 한다. 그 말씀이 마태복음 13장 44-46절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사람들은 좋은 지역에 좋은 아파트가 매물로 나오면 자기 재산을 다 터는 것은 물론, 은행 융자까지 받아 반드시 구입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구입하는 순간, 몇 억원 이상이 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 나라의 땅은 구입하려 하지 않는다. 당장 이익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당장 이익이 눈에 보이는 예수님 안에 감추인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 감추인 것을 찾느라 정신없다.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을 찾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예수님 밖에 있는 것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부자 청년이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 안에 감추 인 구원을 찾으려면 “네 소유를 팔라(마 19:21)”고 하자, 예수님이라는 보물 찾기를 포기했다.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Viktor Frank)은 저서 《삶의 의미를 찾아서》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행복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행복할 수 없다.”

세상에서 행복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일하는 사람은 도리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상이 아니라 행복의 근원이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냥 들어갈 수 없다. 자기 것을 다 팔아야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은 행복은 자기중심적일 때 찾을 수 있지 않고, 하나님 중심적일 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2020년을 살면서 딱 한 가지를 하고자 해야 한다. 신앙생활의 차원을 한 단계 높여야 한다. 신앙생활을 한 차원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적 스위치’를 눌러야 한다. ‘채움의 스위치’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는 보물을 찾는 것에 내 소유를 파는 스위치를 눌러야 한다. 즉 인간의 본능이 원하는 스위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스위치를 눌러야 한다.

우리가 영적 스위치를 누르고 싶다고 누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적으로 한 차원 높아져야 누를 수 있다.

‘파동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파동의 법칙의 특성은 단순하다. “파동은 오직 자신과 비슷한 파동만 끌어당긴다. 반면 자신과 다른 수준의 파동은 밀어낸다.”

파동은 자신과 같은 것만 끌어당긴다. 다르면 밀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파동을 맞춰야 한다. 그럼 하나님께서 세상의 아파트나 땅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는 보물을 찾는 안목을 갖게 해 주신다.

3절 말씀을 보라.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파동을 맞추면 하나님의 것을 주신다.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보물은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육적인 것에서 한 차원 높아지면,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을 소유하게 된다. 만약 차원을 낮추면 세상에 보기 좋은 것, 갖고 싶은 것에 혈안이 된다. 그럼 결과는 삶의 피폐함으로 귀결된다.

신앙생활은 예수님 안에 있는 보물 찾기다. 그러려면 영적으로 한 차원 높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찾는 자가 된다.

세상에 답을 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그 하나님께 신앙의 파동 법칙을 맞춰야 한다. 그럴 때 예수님 안에 있는 보물찾기를 시작한다. 삶과 신앙이 한 차원 더 높아진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신앙을 한 차원 높이는 것이 진정한 성장이다. 그 성장 안에 인간의 평생의 꿈인 행복이 들어 있다. 삶의 의미가 담겨 있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도인 목사
아트설교연구원 대표
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