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故 한경직 목사님의 생전 설교 전문을,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제공으로 매주 한 차례, 소개합니다. 한 목사님은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목회자' 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고인의 생전 설교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늘날 한국교회에 생생히 울려퍼지길 바랍니다.

한경직
▲故 한경직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요한계시록 3:14~22
1947년 건국과 기독교

라오디게아 교회는 불냉(不冷) 불열(不熱)의 교회여서 주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환영하되 아직 문 밖에 모시고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중심의 문을 열기 위하여 밖에서 두드리십니다.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관계는 개인도 그러하고, 가정도 그러하고, 교회도 그러하고, 민족도 그러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오늘 대한 민족 전체와 그리스도 곧 기독교와의 관계를 논하고자 합니다. 기독교는 조선 말기에 대한에 들어왔습니다. 조선은 건국 직후에는 세종대왕과 같은 왕을 중심으로 하여 한글을 창제하는 등 문화의 창조가 있었으나 점차로 유교의 문약(文弱)과 당쟁의 가열, 그 적폐(積幣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폐단)와 죄악 때문에 장차 무너질 운명에 직면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남은 자를 구원하시고, 죽은 나무 그루터기에서 새 가지가 나올 준비로써 기독교를 반도에 보내셨습니다.

이렇게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대한의 문을 두드린 것은 60~70년 전이었습니다. 문을 두드린지 이미 60~70년이지만, 아직 대한 민족 전체로 보면 그리스도는 겨우 마당에나 들어오신 셈이요, 아직 문 밖에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속하여 문을 두드리는 것이 지금 대한 민족의 영적 현실이 아닌지 나는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아직 문 밖에 있으나, 과거 50년 간에 대한을 위하여 공헌한 바가 적지 아니합니다.

예를 들면, 불교는 이미 고려조 이후 부패하여 생명을 잃은지 오래고, 유교는 다만 형식과 인습만 남아 의지할 데 없는 대중은 미신에 빠지고, 사신 우상의 종이 되어 참 종교의 내원(來援)을 대망하던 중 기독교는 참 신을 보여주고, 구원의 도를 가르쳐 개인으로 영원한 생명과 소망을 가지게 하고, 민족적으로 망국의 절망적 비애 중에서 위안을 얻고, 사회적으로 부활의 희망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실로 기독교는 우리 민족의 가장 암담한 과거 50년 역사에 있어서 우리 민족의 유일한 위안과 소망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부인치 못할 사실입니다.

기독교는 문화적으로 20세기 신문명 곧 과학 문명의 소재요,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문화의 수준이 제일 높은 영미에서 온 선교사들은 이 나라에 들어오면서 교회를 세우고 다음에는 반드시 학교를 세웠습니다. 재래 대한 서당에서는 오직 한문만 가르치던 때에 교회학교에서는 수학이니 이과니 과학적 지식을 보급시켰습니다.

벌써 50년 전에 서울에서는 배재학당(培栽學堂), 이화학당(梨花學堂)을 설립해서 이승만(李承晩) 박사와 같은 이를 교육시켰고, 평양에서는 숭실(崇實), 숭의(崇義)와 같은 학교를 세워 조만식(趙晩植) 선생과 같은 이를 양성하였습니다. 기독교를 떠나서 우리는 신문학의 선구자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은 기독교는 외래문화의 정수를 소개 할 뿐만 아니라, 대한 고유한 문화를 보존하고 발양(發揚 마음, 재주 같은 것을 떨쳐 일으킴)하기에 노력하였습니다. 과거 대한의 유교 선배들은 한문에 중독되어 한글을 언문이라 하여 우부우부(禹夫禹婦 어리석은 남자와 여자를 이름)의 글로 천히 여겼습니다. 기독교가 한글의 지식을 먼저 발견하고 성경과 찬송가를 한글로 발행하여 일반적으로 보급시켰고, 한글로 시를 쓰고 소설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는 특별한 일례에 불과하나 다른 문화 방면에서도 기독교는 대한 교육의 장점인 미풍양속을 보존하기에 노력하였습니다.

기독교는 대한에 있어서 사회운동과 사회사업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농촌 운동도 교회에서 먼저 했고, 소비 조합운동도 기독교  청년들이 먼저 한 것은 말할 것도 없으나, 이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지 못한 것은 오직 왜정 탄압에 인함이었습니다. 그러한 중에서도 위생시설, 자선 사업은 거의 기독교의 독점이었습니다. 병원, 나병원(癩病院), 요양원, 고아원,  양로원 등 거의 기독교 사업에 의해 건설되었습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가장 불행하고 가난한 자에게 먼저 복리를 가져오기를 위하여 노력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과거 반세기 간에 사회적으로 도덕적 중생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조선 말기의 유교의 도덕적 타락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극단의 형식주의에 흘러 효도라면 부모 생전에는 어떻게 대접하였든지 사후 삼상(三喪)을 잘 하는 제사주의로 변했고, '불효삼천이나 무후위대(不孝三千 無後爲大 자손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불효이다)'라 하여 축첩(蓄妾 첩을 둠)을 장려했으며, 남존여비의 봉건사상을 고조하여 부녀의 모든 활동을 막았고, 반상(班常)의 구별로 계급차별이 심하였습니다. 기독교가 들어와서 유교의 폐를 시정하고, 성(性)도덕의 정화를 부르짖어 가정의 신성을 회복하고 여자를 해 방하여 남자와 같은 교육과 활동의 기회를 주었고, 반상의 차별이 없는 만인의 평등을 주창하였습니다.

더욱이 기독교는 국가적 견지에서 보면 애국운동의 중심 세력이었습니다. 3·1 운동 당시의 기독교의 역할이 어떠 했는가는 말할 것도 없고, 조국 부흥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의 대다수가 신자였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도산(島山) 선생, 남강(南崗) 선생을 비롯하여 지금 생존하여 지도하시는 이승만(李承晩) 박사, 김구(金九), 김규식(金奎植) 박사, 그 외에 국가를 위하여 순국한 허다한 애국지사의 수는 오직 하나님만 아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과거 50년 역사에 있어서 오직 기독교만이 지금 많이 듣고 말하는 소위 민주주의 사상의 교육자였습니다. 개인의 생명 인격 권리에 대한 존중 사상, 인간의 자유사상과 인간의 평등사상은 오직 기독교만이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이 사상의 근본인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에 대한 견지인 까닭입니다. 또 왜정이 기독교를 압박한 이유도 사상적으로 기독교는 일본 제국주의와 근본적으로 배치되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이 민주주의 사상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모든 신교 특히 장로교회는 민주주의 정치의 실행자였습니다. 장로교회는 문자 그대로 민주주의 정치를 각 지교회(支敎會), 노회(老會)와 총회에서 실행하여 왔습니다. 지교회에서 장로와 집사를 선거하는 것, 목사를 청빙하는 것, 노회에서의 모든 정치는 민주주의 원칙에 의한 것입니다. 미국이 1776년 독립선언을 한 후에 헌법과 모든 정치를 민주주의로 한 것은 그들은 이미 각자 교회에서 그러한 정치 훈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금일 대한에 있어서 민주주의의 정치 훈련을 받은 이는 기독교 신자밖에 없습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아직 문 밖에 서 있는 기독교가 이상과 같은 위대한 공헌을 하였는데, 이 기독교를 우리 민족이 전적으로 받는다면 장래에 얼마나 더 큰 공헌을 하겠습니까? 과거 대한 50년 역사를 정관(靜觀)하면 하나님께서 벌써 1945년에는 해방이 있을 줄 아시고,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 날에 대비하기 위하여 기독교를 보내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 신자도 아직 이 사명을 확실히 깨닫지 못하고 있으며, 대한 민족 전체는 아직도 미지근하여 기독교를 문 밖에 세워두는가? "경찰서 열을 세우는 것보다 교회 하나 세우는 것이 낫다."는 김구 주석의 말씀은 얼마나 타당(妥當)한 말씀입니까?

지금 대한 민족은 중대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야말로 민족의 존망지추(存亡之秋 생존과 사망이 결정되는 아주 절박한 경우나 시기)입니다.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한다고 하면서 민주주의의 정신적 기반인 기독교를 떠나서 어떻게 잘 실행되겠습니까? 민주주의는 국민의 각성과 도덕적 향상이 없으면 불가능한데, 기독교를 떠나서 어디서 이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유물론적, 폭력적, 독재적 사상의 기초 위에 민주주의 대한이 건설될 듯싶습니까? 민주주의의 근본 정신은 자유인데,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하는, 생명보다 자유를 사랑하는 민족에게 독립이 있지, 자유보다도 자기의 이권부터 찾는 민족에게 독립이 있을 듯싶습니까?

이러한 중대한 시기에 아직까지 그리스도를 문 밖에 세워두는 우리 민족의 사회 상태가 어떠합니까? 그 사상이 얼마나 혼돈하며 그 질서가 얼마나 문란합니까? 저 영남사건(嶺南事件)의 잔인무도한 참상을 보시오. 우리 민족에게 이런 포악성과 잔인성이 있었던가요? 스스로 전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민족이나 사상이 악화되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동포를 모르는 사상이 그 머리를 지배하게 되면 이렇게도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폭동을 어떤 정당에서는 '조국 독립을 위한 궐기'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거짓 지도자가 장안 거리를 활보하는 모양입니다.

여러분, 기독교가 아니면 대한 민족은 서로 싸워 망할 일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때야말로 대한에 참 애국지사가 있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가 신앙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야말로 이 때는 민족을 살리기 위하여 생명을 내걸고 전도할 때입니다. 대한 민족의 유일한 소망은 그리스도입니다. 아직도 이것을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오, 대한 민족이여! 그리스도로 하여금 더 오래 문 밖에서 두드리게 하지 말고, 우리의 중심의 문을 열어 놓고 그리스도를 영접합시다. 남자나 여자나, 선생이나 학생이나, 노동자나 농민이나 다 구주를 영접합시다. 어떤 지도자들은 "글쎄, 다 믿으면 좋기는 하겠지만..."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미지근한 태도는 쓸데없습니다. 기독교가 과연 대한을 살릴 유일한 진리인 줄 알면 뜨겁게 환영해야 할 것입니다. 미지근한 신앙으로 구원을 얻는 자 없고, 무엇에나 미지근한 태도로 성공한 자 없습니다.

대한 교회야말로 뜨거운 마음으로 회개하여야 하겠습니다. 미지근한 소위(所爲 소행)를 버리고 뜨겁게 믿고 전도할 때입니다. 오늘 기독교에 대하여 편견과 반감을 가진 무리는 두 가지 종류입니다. 하나는 우상숭배적 사교(邪敎) 중심의 일본 문화에 감화를 받은 계급인데, 이들은 기독교가 진리인 줄 알면서도 일본 문화의 잔재가 아직도 머리에 남아 있어서 교회에 나오기를 싫어합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는 이렇게 종교에도 큰 영향을 줍니다.

또 하나는 유물론자들이니 이들은 육신 생활에 눈이 어두워 모든 정신적 측면을 잊어버리는, '배로 하나님을 삼는 자들'입니다. 영적으로 얼마나 가련한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회개치 않는 한 새로운 대한의 적(敵)인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신자는 이 두 가지 대적 곧 일본 신도 문화의 잔재와 유물주의 사상과 생명을 걸고 싸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주께서 감람산을 넘어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입니다. 굽이를 도니 시온산 위에 건설된 아름다운 예루살렘 전경이 눈앞에 전개됩니다. 아름다운 성전, 궁궐, 시가지, 주택,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 금성(金城)이었습니다. 얼마나 반가웠으랴! 얼마나 기뻤으랴! 그러나 주님은 크게 소리를 내어 우시면서 탄식하였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너희 자녀를 모으기를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여러 번 하려 하되 너희가 원치 아니하니 이제라도 너희가 평안한 일을 알았으면 다행이려니와 오직 네 눈에 숨겼으니 날이 장차 이를지라 네 원수도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을 에워싸고 또 너와 그 가운데 있는 자식을 땅에 내어던지며 돌 하나도 돌 위에 첩놓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하시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이라"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에서 특별히 두 가지를 주의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평안한 일을 알았다면"과 "권고하시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이라" 이 말씀입니다. 즉 평화로 인도하는 길을 보여주었으나 그 권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돌 하나도 돌 위에 첩놓이지 아니하는 멸망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민족은 어찌하려는가? 하나님께서 지금 기독교를 통하여 평화의 길을 보여 주십니다. 대한은 이 길을 따르려는가, 배반하려는가? 지금이야말로 권고의 날입니다. 이 권고를 들으려는가, 배치하려는가? 대한 민족아, 깨어라! 마음의 문을 열어라! 그리고 주를 영접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