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포럼 18차 세미나
▲개혁신학포럼 대표 이경섭 목사. ⓒ이대웅 기자
◈완전을 감당할 수 없는 인간

역사상 예수를 닮았다고 추앙을 받던 이들이 수없이 있어왔다. 그들 중 이단 수괴로 전락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주지하듯, 한국에도 탁월한 도덕성과 신령성으로 추종자들로부터 추앙받던 이들이 ‘현림(現臨) 예수’로 여럿 등극했다.

이는 교만에 빠지기 쉬운 인간의 연약성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고, 결코 인간은 완전할 수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동시에 인간은 ‘결함적 타락(lack-corruption)’도 하지만, ‘완전함적 타락(complete-corruption)’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자도 문제지만 사실 더 큰 문제는 후자이다. 전자는 ‘인간적’인 죄라면 후자는 ‘마귀적’인 죄이다.

무죄했던 아담의 타락 역시 후자에 속한다. 물론 아담이 자신의 완전함에 도취돼 있던 중 ‘네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창 3:5)'는 뱀의 꼬드김에 넘어간 것인지, 아니면 ‘네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뱀의 꼬드김에 넘어가 비로소 그런 마음을 품게 됐는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가 뱀의 꼬임을 받을 만큼 완전했다는 점이다. 만일 그가 형편없는 사람이었다면, 뱀이 ‘네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창 3:5)’고 미혹하지도 않았을 터이고, 아담이 뱀의 꼬드김을 들었을 때 ‘무슨 소릴!’ 하며 일언지하에 거절했을 것이다.

뱀이 보기에도, 자신이 보기에도 ‘그럴 만한가?’라는 여지가 있었기에 미혹됐던 것이다.

무죄했던 아담의 타락은 그의 완전함이 ‘불완전한 완전(lack-complete)'’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가 정말 타락불가한 ‘완전한 완전(full- complete)’을 가졌다면, 뱀의 미혹을 받았을 때, 예수님이 자신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한 부자 청년에게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눅 18:18-19)”고 했듯 무시했을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부패성으로 말미암은 죄’를 범하지만, 무죄했던 아담은 그의 ‘완전함으로 말미암은 죄’를 범했다.

인간은 ‘죄’ 때문에도 문제이지만 ‘죄 없음(완전함)’도 문제이다. 아이러니이다. ‘완전’을 추구하면서도 ‘완전’을 감당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이다.

◈완전할 수 없는 전적 부패한 인간

사람들은 인간이 완전무결할 수 없다는 논증을 펴기 위해, 다양한 논리들을 동원한다. 그 중 하나가 몸의 세균들을 떨쳐낼 수 없듯, 인간의 불완전성을 떨쳐낼 수 없다는 주장이다. 진부해 보이지만, 죄인의 실상을 실감나게 빗댄 말이다.

의학자들에 의하면, 실제 사람 몸에는 수십 수백억의 병균들이 존재하며, 그것들을 다 구제(驅除)해 버리면 인간은 생존할 수 없다고 한다. 그것들이 각기 신체에 유·불리하게 작용하며 건강을 유지시킨다고 한다.

‘B형 간염’이 청결하지 못해 생긴 병이라면, A형 간염은 너무 깔끔을 떨어 ‘면역성 저하’로 생기는 병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때때로 넘어지고 실수하는 죄인은 오히려 그를 겸비시켜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하도록 만들므로 그의 구원을 보장받는다. 만일 인간이 완전하다면 구원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게 될 것이고, 그 결과 구원에서 멀어지게 된다.

완전주의(perfectionism)는 심리학적으로 역사적으로 그 폐해성이 증명됐다. 완벽주의자들이 결백증(Mysophobia, 潔癖症)에 시달리고, 율법주의자들이나 완전한 경건을 추구했던 청교도들이 우울증에 시달렸다.

높은 수도원 담장 속에 칩거했던 수도사들에게서 은밀한 매음(賣淫), 사생아(私生兒) 출생, 낙태(落胎)가 횡행했다는 것 역시 완전할 수 없는 죄인이 완전을 추구하려다가 드리운 음영(陰影)이다.

애시당초 제어 불가한 정욕을 끊으려고 한 자체가 무모한 짓이었고, 그러한 무모함이 수도원을 ‘호박씨 까기 경연장’으로 만들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질타를 받은 것도 사람들에게는 율법의 완전을 요구했으면서도 스스로는 실패한 그들의 호박씨 까기 때문이었다.

오늘 최첨단의 화장실은 완전할 수 없으면서, 완전한 것처럼 포장된 인간의 이중성을 드러내 보인다. 최첨단 오수처리가 사용자로 하여금 더러운 분뇨를 대면하는 일 없이 깔끔하게 볼일을 보게 하지만, 사실 그것들은 단지 오수관(汚水管)에 잠수됐을 뿐 근원적으로 처리된 것은 아니다.

인간의 더러운 죄를 아무리 종교, 도덕, 교양으로 포장해도,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무사태평할 땐, 그것들이 가라앉은 구정물처럼 전면에 표출되지 않지만, 자극을 받거나 극한 상황에 이르면 구정물이 된다.

한적한 시골 버스 안에서는 ‘형 먼저 아우 먼저’ 하며 좌석 인심이 넉넉하다. 반면 서울 도심의 지하철 좌석은 출퇴근 시간마다 좌석 쟁탈전으로 아비규환이다.

시골 사람이 특별히 착해서도 그들의 인심이 유별나게 좋아서도 아니다. 좌석 쟁탈전을 벌이지 않아도 남아도는 시골 버스의 넉넉한 좌석 덕분이다.

◈완전할 수 없는 인간을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의 완전

인간(아담)이 무죄했을 때까지도 그의 불완전성을 아시는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그의 아들을 대속자로 세워 타락 불가한 ‘완전한 완전(full-complete)’을 예비하셨다. 그리고 그것을 타락 후 믿음으로 획득하게 하셨다.

이렇게 범죄 후 ‘획득된 완전함’은 당연히 그의 ‘실제적 불완전함’과 실존적(實存的) 갈등을 일으켰다. 나아가 그의 실존적 불완전함이 믿음으로 획득한 완전함을 실감하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실존적 갈등을 루터(Martin Luther)는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 표현했고, ‘존 맥아더(John MacArthur)’는 ‘속속들이 완전이 아닌 법적인 완전’이라 표현했다(만일 속속들이 완전했다면 구태어 ‘법적인 완전’을 선언할 필요가 없었다).

하나님이 채택한 죄 처리 방식인 “죄 사함, 죄의 가리움, 죄의 불인정(롬 4:7-8)” 역시 성도의 ‘완전’이 그의 실존적인 ‘불완전’과 더불어 있음을 예시한다.

만일 그가 완전함을 받은 후 실제로 완전해져 다신 죄를 범치 않게 됐다면, 죄의 반복적인 해결책인 “죄 사함, 죄의 가리움, 죄의 불인정”의 방식이 채택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가진 ‘완전에의 확신’ 역시 죄인의 실존에서 갖는 ‘불완전함 속에서의 확신’이다. 전자는 완전한 그리스도에 기원되고. 후자는 불완전한 자기에게 기원한다.

사도 바울이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21)’,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고 말한 것도 ‘의인이면서 죄인’인 인간의 이중성의 갈등을 토로한 것이다.

그러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롬 7:20)’는 말씀에서는, 그의 갈등의 종말에 접근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는 자기 죄에 대한 책임 면탈(免脫)이 아닌, 자기 안에 독자적인 세력을 가져 죄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 객관적인 죄의 실존에 대한 긍정이다.

그는 그 긍정에서 멈추지 않고 진일보하여 승리의 개가(凱歌)를 부른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7:25-8:2)”.

육체를 입고 입는 한 죄를 벗을 수 없는 ‘죄의 숙명성(destiny of sin)’과, 그로 인한 실존적 갈등.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의 완전만을 의존케 되므로 완전해질 수 있음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다.

‘완전’과 ‘불완전’ 사이에서의 ‘낌(in a strait betwixt two)’의 갈등을 극복하고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부르는 승리의 개가(凱歌)이다.

자신의 ‘불완전’을 목도하면서 ‘완전’을 노래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성령이 없는 ‘기계적 완전주의자들(mechanical perfectionists)’에게는 불가능하다.

그들에게 그것은 결백주의자들이 더러운 분뇨통 안에서 자기의 완전함을 노래하는 것처럼 도무지 불가능한 일로 뿐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