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천로역정>과 <이집트 왕자>
▲모세 이야기를 담은 <이집트 왕자>.
본문: 베드로전서 4장 12-19절


삶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삶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어떤 분은 삶의 고통라고 정의할 것이다. 어떤 분은 삶을 축복이라고 정의할 것이다. 저는 지난 10년 동안 인생을 ’집중, 반복, 지속‘이라고 정의내렸다. 이런 정의를 내리기 전에는 ’목회를 열심히 하자‘였다.

요즘에는 조금 바뀌었다. ’삶은 해석이다‘라고 정의를 내린다. 이렇게 정의를 내리는 것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한 사건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느냐? 부정적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180도 달라진다. 결국 ’삶은 해석이다‘라고 할 수 있다.

신앙생활도 해석이 중요하다

그럼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신앙생활을 어떻게 정의를 내리는가? ’신앙생활도 해석이다‘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신앙생활을 해석이라고 정의를 내리는 것은 그 정의에 따라 신앙생활의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할 때마다 많은 문제들에 부딪힌다. 그 문제가 크냐 작냐를 우리는 중시한다. 아니다. 그 문제가 큰 가 작은가가 아니다.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다.

사람들마다 문제를 해석하는 것이 다르다. 더 나아가 매 문제도 시대에 따라 다르게 해석한다.

얼마 전 숙명대학교 법학부 교수인 홍성수 교수의 책 《말이 칼이 될 때》를 읽었다. 이 책에서 ‘혐오표현’이란 단어를 이야기한다. 혐오표현을 쓰는 대상은 여성, 이주민, 장애인 등 약자들이다.

저의 경험으로는 ‘혐오표현’이라는 표현은 10년 전만 해도 쓰지 않았다. 작년에 화두가 된 ‘미투(Me Too)’ 운동도 얼마 전만 해도 상상도 못했었다.

시대가 달라지니 이젠 ‘혐오표현’이나 ‘미투(Me Too)운동’이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즉 시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석은 시대와 사람마다 다르다

해석은 시대는 물론 사람마다 다르다. 꽤 오래 전 조유식의 책 《정도전을 위한 변명》을 읽다가, 해석의 중요함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그 책은 조선의 개국 공신 정도전에 관한 이야기였다.

여러분은 정도전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정도전은 고려 쪽에서 보면 역적이나, 조선쪽에서 보면 충신이다. 불교 쪽에서 보면 역적이나, 유교 쪽에서 보면 충신이다.

태종 이방원 쪽에서 보면 죽여야 할 사람이나, 태조 이성계 쪽에서 보면 개국 1등 공신이다. 정도전이 없었다면 조선은 시작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결국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것은 해석의 문제였다. 정도전 일파가 작은 것을 사소하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조선에 유교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했지만, 요동정벌을 둘러싼 권력투쟁에 휘말렸다.

정도전의 정책에 이방원이 걸림돌이었다. 그래서 정도전은 이방원을 길들이고자 했다.

정도전이 생각해 낸 것은 이방원의 요동정벌을 위한 진법 훈련에 불참한 수하를 혼내는 방법이었다. 정도전은 전법 훈련에 불참한 이방원의 수하에게 태형 50대를 때렸다.

정도전은 이런 해석이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일이 결정적인 실패를 가져왔다. ‘이방원 망신주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방원의 날개를 꺾는 데는 실패했다.

정도전 일파가 결정적으로 해석을 잘못한 것이 있다. 정도전 계열로 도성 경비대를 책임지고 있었던 사람이 박위였다. 어느 날 밤 그는 이방원의 부름을 받았다.

박위는 이방원이 설마 자기를 죽이기야 하겠어! 라고 사소하게 해석해, 엄청난 수의 부하를 두고 홀로 갔다. 조선의 모든 수하가 그에게 있었지만, 엄청난 군사를 동원도 해보지 못한 채 칼에 맞아 죽었다.

해석이 이만큼 중요하다. 해석을 잘못한 결과, 정도전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이방원의 시대가 막이 올랐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해석도 다르다. 보수는 진정한 대통령이라고 해석한다. 진보는 독재자라고 해석한다.

한국과 일본이 경제 전쟁을 치르고 있다. 한국이 일본에 일방적으로 경제적 침략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 문제도 해석의 문제다. 일본은 한일협정으로 개인까지 징용 관련 보상이 끝났다고 해석한다. 한국은 국가적 보상은 끝났지만 개인적 보상은 끝나지 않았다고 해석한다.

다윗과 골리앗 싸움에서 승리한 것도 해석에 대한 문제였다. 골리앗은 다윗이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는다고 무시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힘으로 나가면 가능하다고 해석했다.

인간적으로 해석한 골리앗은 패배했다. 하나님 중심으로 해석한 다윗이 승리했다. 다윗은 하나님의 힘으로 이길 수 있다고 해석했다.

골리앗은 다윗이 자신을 절대 이길 수 없다고 해석했기에, 방심했다. 다윗은 하나님의 힘으로 이길 수 있다고 해석했기에, 결국 이겼다.

삶은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작아도 아주 작다. 작은 것에 대한 해석을 잘 해야 한다. 작은 것을 해석을 잘 할 때 멋진 삶을 살 수 있다.

저는 작은 것을 아주 소중하게 여긴다. 어떤 사람들은 작은 것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무시한다. 이 역시 작은 것에 대한 해석의 차이다.

제가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가 있다. 작은 한 시간, 작은 행동, 작은 습관이 인생을 결정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제 인생 가운데 작은 것, 해석을 잘해서 지금 하나님께 사용 받고 있다.

성도들의 삶의 관건은 주일예배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있다

오늘은 주일이다. 지금 주일 예배에 참석 중이다. 오늘 주일예배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저는 주일 예배가 인생을 바꾼다고 해석한다. 어떤 사람들은 매주 드리는 주일 예배, 이 한 시간쯤이야! 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오늘 드리는 주일 예배 1시간은 아주 적은 시간이다. 일주일의 168분의 1에 불과하다. 하지만 해석에 따라 주일 한 시간의 의미가 달라진다.

저는 1시간의 예배가 일주일 168시간을 좌우한다고 해석한다. 1시간의 예배가 인생을 좌우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 이런 해석 때문에 예배 1시간에 인생을 건다.

제가 10년 독서를 마음먹기 전에 기도원에서 드린 1시간 예배가 독서를결단하게 했다. 그 때 1시간의 예배가 지금의 저를 있게 했다.

그러므로 작다고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인 주일예배 1시간에 인생을 걸어야 한다. 주일예배 1시간은 물론, 끝난 뒤 10분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아니 흘러가는 1분마저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저는 1년의 365분의 1인 하루하루가 인생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작은 것을 해석 잘해야 한다

저는 작은 것을 무시하는 사람을 종종 만났다. 흐르는 1시간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한다. 흐르는 시간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소멸된다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작은 것이 중요하다. 그럼 작은 것이 왜 중요한가? 작은 것이 큰 것을 만들기 때문이다.

작은 벽돌로 하나가 고층 건물을 만든다. 21세기에는 한 명이 인재가 나라를 먹여 살릴 정도다.

이사야서 60장에는 작은 것의 힘이 어떠한가를 이야기 해준다. 22절 말씀이다. “작은 것이 천 명을 이룬다”,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룬다”.

우리는 알고 있다. 언제나 시작은 작다. 하지만 끝은 엄청나다. 욥기는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창대하다(욥 8:7)”고 말했다.

언제나 작은 것이 강하다. 적은 것이 큰 것을 이룬다. 그러므로 작은 것에 대한 해석을 잘 해야 한다. 작은 것에 대해 큰 것을 이룬다고 해석해야 한다. 그럼 작은 것을 가치 있게 여긴다.

성경도 ‘작은 것이 힘이 있다’고 말한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작은 것에 힘이 있다고 언급한다. 보잘 것 없는 아브라함 한 사람의 순종 때문에, 이스라엘은 수백만 명의 민족을 이루었다. 예수님 한 분 때문에 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다.

작은 것 해석을 잘 해야 한다. 작은 것, 해석을 잘못해 고위직에서 낙마한 사람이 꽤 있다. 그 중 한 명이 전 청와대 대변인 김의겸이다.

그는 2018년 7월 후배가 지점장으로 있는 은행에서 돈 10억을 빌려 흑석동의 건물을 매입했다. 이를 대수롭지 않게 해석했다.

저는 몇 년 전 은행에서 “10원도 빌려줄 수 없다”고 했다. 얼마 전 친구가 교회 건축 때문에 15억을 빌렸다고 했다. 그 때 엄청 부러웠다.

청와대 대변인이기에 10억을 빌릴 수 있었을 것이다. 저와 같이 은행 문턱이 높은 사람들은 이 대출을 엄청난 특혜라고 해석한다. 결국 김 대변인은 10억 대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 대변인 직에서 사임했다.

작은 습관이 복리로 작용한다


작은 것이 큰 것이다. 마찬가지로 작은 습관도 큰 힘을 발휘한다. 저는 작은 습관이 아주 큼을 알고 있다. 작은 습관이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기 때문이다.

파워블로거이자 자기계발 전문가인 제임스 클리어는 그의 책 《아주 작은 습관의 힘》에서 아주 작은 습관의 힘이 큼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습관은 복리로 작용한다. 돈이 복리로 불어나듯이 습관도 반복되면서 그 결과가 곱절로 불어난다.”

작은 습관은 복리로 계산된다. 복리는 원금에 대해서뿐 아니라, 원금에서 생기는 이자에도 원금과 동일한 이율의 이자를 붙이는 계산법이다.

예를 들면, 제1년의 이자는 단리와 마찬가지로 10원이지만, 2년째는 원금이 110원이 되고 이자는 11원이 된다.

작은 것, 해석을 잘 해야 한다. 작은 습관, 해석을 잘 해야 한다. 작은 것이 큰 것 된다. 작은 습관은 복리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작은 시간, 작은 행동, 작은 습관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히브리어 글자 중 가장 작은 글자가 뭔지 아는가? ‘요드’라는 것이다. 이 ‘요드( י )’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중 10번째 단어다. 이 단어는 가장 작지만, 가장 위대한 표현에 사용된다. “예수님, 이스라엘, 예루살렘, 야곱, 여호수아” 등에 사용된다.

작은 것, 작은 행동, 작은 글자를 무시해선 안 된다. 오늘 일주일 중 작은 시간인 1시간 동안 드리는 예배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작은 행동 다시 한 번 체크해야 한다. 작은 습관을 통해 인생의 답을 찾고자 해야 한다.

해석, 영적으로 하라


삶은 해석이다. 그러므로 해석을 제대로 해야 한다. 해석을 인간적이지 않고 영적으로 해야 한다. 그것은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제가 종종 하는 말이 있다. “삶을 쉽게 살지 말고 어렵게 살아라.”

이것도 삶에 대한 해석의 문제다. 우리는 쉽게 사는 것을 잘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 저의 해석은 다르다. 어렵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이다.

그 이유는 쉬운 삶은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 어렵게 살아낸 삶은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얻게 한다.

사람들은 쉽게 살려고 한다. 아니, 편하게 살려고 한다. 삶은 일부러라도 어렵게 살려고 해야 한다.

오늘 본문은 고난에 대해 이야기한다. 고난은 어려운 삶이다. 고난이 고난으로 그치면 어렵게 살 이유가 없다. 고난으로 살면 성경은 영광이 선물로 주어진다고 말씀한다.

저는 독서를 하고, 글을 쓰고, 책을 쓴다. 이 세 가지는 어려운 삶이다. 어려운 독서를 10년 동안 5,000권을 넘게 하니 독서가가 되었다.

이 독서가 제가 죽을 때까지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글쓰기를 하니 설교자들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책을 쓰니 많은 설교자들이 제 책을 읽고 도움을 받고 있다.

‘쉽게’가 아니라 ‘어렵게’로 해석하라

삶을 해석을 잘 해야 한다. ‘쉽게’로 해석하지 말고, ‘어렵게’로 해석하며 살아야 한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예수님 믿으면서 받는 고난을 해석을 잘 해야 한다. 저주로 해석하지 말고 은혜로 해석해야 한다.

고난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를, 베드로를 통해 배워야 한다. 베드로는 고난을 아주 멋지게 해석을 한다. 그것이 12절부터 16절까지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2-16)”.

베드로는 고난을 불같은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으로 여기지 말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하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라고 이야기한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제대로 해석해야 한다. 제대로 하는 고난 해석은 인간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오늘 베드로는 고난에 대해 인간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영적으로 해석했다. 다른 말로 인간 중심적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 중심적으로 해석했다.

연단받는 것은 인간 중심적으로 해석하면 12절처럼 이상한 것이 된다. 하지만 하나님 중심적으로 해석을 하면, 13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삶은 해석이다. 신앙생활도 해석이다. 삶에서 해석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말이 있다. ‘위기는 기회다’라는 말이다.

위기는 해석에 따라 더 큰 위기가 되기도 한다. 해석에 따라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위기는 위기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해석의 문제다. 해석을 제대로 하면 위기는 하나님의 개입의 기회가 된다. 하나님께서 동행하는 기회가 된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의 14절도 해석의 문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그리스도인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두 가지 해석을 하게 된다. 한 가지는 내가 왜 남 때문에 치욕을 당해야 돼! 라고 해석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은 남이 아니라 나의 구주이니 치욕을 당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야!라고 해석할 수 있다.

베드로는 이렇게 해석을 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다. 이런 해석이 그리스도인이 해야 될 해석이다.

해석이 관건이다

신앙생활하면서 많은 인간적인 갈등을 겪고 만난다. 그럴 때마다 해석을 잘해야 한다. 갈등이 문제가 되지 않고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해석의 문제는 다른 말로 관점의 문제다. 관점을 어디에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기 때문이다. 갈등을 겪으면 나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그럼 모든 것이 다 이해가 된다.

서울대 심리학과 최인철 교수는 그의 책 《프레임》에서 프레임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그는 사람들이 두 가지 프레임으로 살아간다고 말한다. 하나는 ‘접근 프레임’이다. 다른 하나는 ‘회피 프레임’이다.

최 교수는 접근 프레임은 성취하는 사람이 사용한다고 말한다. 반대로 안주하는 사람은 회피 프레임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접근 프레임을 사용하는 것은 보상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회피프레임을 사용하는 것은 실패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실패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프레임을 잘 사용해야 한다. 세상 문제는 접근 프레임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련된 문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다가 고난을 당하면, 고난이 유익이 된다는 접근 프레임을 사용해야 한다. 오늘 베드로가 사용한 프레임은 ‘접근 프레임’이다.

즉 자기 중심적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관점을 가졌다.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은 접근 프레임을 사용한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회피 프레임을 사용한다.

하나님 중심적으로 해석하라

오늘 베드로는 고난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해석한다. 베드로가 하나님 중심적으로 해석한 이유가 있다. 신앙생활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함을 믿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19절과 같이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벧전 4:19)”.

고난은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을 때 선을 행하는 가운데에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하라고 권면한다.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신앙생활을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하므로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께 의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고난당할 때 하나님께 의탁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 중심적으로 해석했다는 증거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 중에 겪는 것에 대한 해석이다. 우리가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고통이 될 수 있고, 감동과 울림이 될 수 있다.

욥은 고통을 하나님의 중심적으로 해석했다. 하나님 중심적으로 해석하니 감동과 울림이 컸다. 멜기세덱과 에스도가 민족의 고난을 하나님 중적으로 해석하니 이스라엘 민족에게 부림절이라는 감동과 울림의 축제를 한바탕 벌일 수 있었다.

우리도 하나님 중심적으로 해석을 해야 한다. 하나님 중심적으로 해석할 때 세상에게 울림을 줄 수 있다.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베드로는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것이 12절부터 14절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2-14)”.

반전 있는 신앙생활은 해석에 의해 결정된다

‘도리어’의 신앙생활을 살라고 한다. 즉 반전 있는 신앙생활을 하라고 한다. 할 수 없는 신앙생활을 하라고 한다.

신앙생활 하면서 해석을 하나님 중심적으로 해야 한다. 해석을 인간 중심적으로 하면 세상에서 울림이 아니라 손가락질을 받는다. 15절 말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처럼, 손가락질을 받게 된다.

저는 고난이라는 말이 떠올릴 때마다 성경에서 세 명이 생각난다. 그 세 명처럼 고난을 통과의례, 단련의 도구, 변화의 기점으로 삼는다. 그 세 사람은 욥, 바울, 예수님이시다.

세 명은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저 통과의례로 여겼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을 믿다가 받는 고난은 통과의례로 여겨야 한다. 마치 한국 남자들이 군대를 갔다 와야 하는 것처럼 통과의례일 뿐이다.

해석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앙생활은 해석이다. 신앙생활을 할 때 마다 해석할 것이 많다. 해석하되 기준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는가에 여부에 따라 통과의례가 되기도 하고, 불평이 되기도 한다. 오늘 베드로는 고난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해석했다.

베드로가 한 해석을 보자.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즐거워할 수 있다(13절).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지 않으면 시험 당함을 이상하여 여긴다(12절). 더 나아가 치욕으로 여긴다(14절). 15절 말씀처럼 부끄러워한다.

우리는 신앙생활 가운데 발생하는 일들을 믿음의 조상 요셉처럼 해석해야 한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서 애굽에 왔다. 요셉은 형을 만난 뒤 형들에 대한 원망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으로 해석했다. 그것이 창세기 45장 5절부터 7절이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창 45:5-7)”.

저는 여러분들이 요셉과 같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도, 심지어 모함도 가장 멋지게 해석하길 바란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이 합하게 해석하길 소망한다.

신앙생활은 해석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부딪히는 것들을 잘 해석해야 한다. 목사님과 다른 생각, 교인들과 의견 불일치, 사회생활을 하다가 부딪치는 것들 해석을 잘 해야 한다.

해석 중 최고의 해석은 감사로 해석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해석하셨다. 우리는 감사로 해석하면 된다. 그럼 어떤 것도, 나와 다른 생각들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 없다.

우리가 감사로 해석하려면 기준이 분명해야 한다. 그 기준은 하나님 말씀이어야 한다. 기준이 없으면 모든 말이 답이 된다. 내 말을 답으로 삼으려 한다. 그럼 혼란과 싸움만 가중된다.

우리나라 정치가 매일 싸우는 이유도 기준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국민이 아니라 당리당략이기 때문이다. 정권 창출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말씀이어야 한다. 요즘 이단이 활개를 친다. 기준이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기준이 없는 해석은 난장판이 된다.

신앙생활을 할 때도 해석을 잘 해야 한다. 해석을 잘 하느냐가 중요하다. 해석을 잘 하느냐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될 때, 다툼이 없다. 고난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도리어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 하나님의 개입이 충만하다. 기준이 말씀이 되면 고민이나 방황이 거의 없다.

그리스도인은 신앙생활을 할 때, 기준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세상 풍조나 사람들의 의견이 아니라 말씀이어야 한다. 기준이 말씀이 되면 신앙생활이 천국이 된다. 반대이면 지옥이 된다. 기준에 말씀이면 신앙생활 할 맛이 난다. 반대이면 죽을 맛만 난다.

말씀으로 해석하면 ‘근심 보따리’가 ‘웃음 보따리’가 된다

해석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근심 보따리’로 사는 사람과 ‘웃음 보따리’로 사는 사람이다. 근심 보따리를 이고 사는 사람은 기준이 나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웃음 보따리로 사는 것은 기준이 말씀이기 때문이다.

삶은 해석이다. 신앙생활도 해석이다. 오늘 베드로와 같이 하나님 중심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여러분들도 베드로와 같이 하나님 중심적으로 해석하기를 축복한다. 하나님 중심적으로 하면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같이 해석을 잘해서, 고난이 ‘도리어’ 즉 전화위복이 되는 것을 경험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복한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