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샬롬나비(상임대표 김영한 박사)가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횃불회관 화평홀에서 '교회와 정치'라는 주제로 제19회 학술대회를 개최했습니다. 본지는 당시 발표했던 안상수(자유한국당)·이언주(무소속) 국회의원과 원희룡 제주지사의 발제문을 차례로 소개합니다.

샬롬나비
▲샬롬나비 제19차 학술대회가 진행되던 모습. (왼쪽부터 순서대로) 안상수 의원, 이언주 의원, 이일호 교수(칼빈대, 사회), 김철홍 교수, 임종헌 박사, 김성봉 교수. 원희룡 지사는 불참했지만 발제문을 보냈다. ⓒ크리스천투데이 DB ⓒ김진영 기자
2. 스피노자의 17세기 자유주의 정치철학

○ 아드리한 콜바흐의 죽음

스피노자의 이야기에 앞서 아드리한 콜바흐의 이야기를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드리한 콜바흐는 의학 및 법학도로서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가장 급진적인 인물 중 한명으로 손 꼽힙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앞선 인물로 평가되며 교회의 타락한 역할을 비난하고 자연의 존재를 우선시 하는 범신론을 변호하며 종교의 타락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교도소에 수담되었습니다. 1669년 수감생활 도중 3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친구였던 스피노자는 맹목적인 종교인들을 비판하는 글을 쓰며 자유주의 정치철학이 등장하게 됩니다.

(※ 스피노자의 글: 경건, 슬프게도! 불멸의 신, 그리고 종교가 터무니없는 비밀이 되었다(Pietas, proh Deus immortalis, et Religio in absurdis arcanis consistit). 그리고 순전히 이성을 조롱하고, 지성을 원래부터 타락한 것이라며 거부하고 폄하하던 사람들, 가장 부당한 것들 중 하나인 바로 이들이 신의 빛(divinum lumen)을 가졌다고 여겨진다.)

○ 스피노자에 앞서

향후 말씀드릴 스피노자와 그의 신에 대한 접근 방식, 정치철학은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굉장히 신성모독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신에 대한 스피노자의 단순 입장이 아니라 교회의 타락한 모습을 경계하고 이 모습에 예속되면서 신의 부름에 제대로 응하지 못했던 것을 경계했던 스피노자의 지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신에 대한 스피노자의 입장은 분명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마음속에서 항상 품어야 할 근본적인 방향과 신의 목소리를 올바르게 듣고자 하는 갈망만큼은 귀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 스피노자의 시야

스피노자는 자연과 이성을 분리하여 '자연'에 대한 이성적 성찰을 부각시킴으로써 '신'의 섭리에 대한 맹목적 신봉을 합리화하는 철학적 접근을 옹호하는 중세의 그늘을 벗어나려고 하였습니다. 개인의 '자유'와 '이성'에 대한 스피노자의 확신은 정치와 종교의 엄격한 분리를 요구하였습니다.

○ 스피노자의 자연권 개념

스피노자가 서술한 저서에 나오는 '자연권에 의해 타의에 구속되는 사람은 없다'는 구절은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보존하기 위한 힘으로서의 자연권을 인정하고 자신 이외의 명령에 따라 구속 되는 것을 경계합니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는 이 문장은 당시에 신의 명령을 부정하고 인간중심의 사고로 전환을 이끌어내며 엄청난 탄압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우리가 집중할 부분은 '자연권에 기반한 자신의 명령'이 아니라 '구속 되는 것을 경계'한다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종교개혁 이후에 나타난 세대이지만 당시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와 카톨릭의 체계는 확고하게 자리잡기 전입니다. 종교개혁 중에 드러난 카톨릭의 부패와 사치는 스피노자 시대에는 확정된 사실로 받아들여졌으며 개신교의 분열로 교회의 권위는 일원화되지 못하였습니다. 스피노자는 이런 혼란한 시대에서 일반대중이 인간들의 언어로 나눠진 해석에 예속되어 갈등과 반목이 지속되는 것을 지독하게 경계하였던 것입니다.

○ 정치적으로 계산된 신학에 대한 경계점

생각하고 판단할 자유를 통제하는 법률은 권위에 의한 명령을 기초로 합니다. 가장 권위적인 명령에 근거하기 위해 결국 신학적 교리를 근거로 찾게 됩니다. 철저히 계산된 미신적 가치를 신학적 교리로 치환하여 법률화 한 후 법률에 대한 복종을 명예로 만들어 대중으로 하여금 의도한 대로 조종하는 일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신학화한 정치의 효과적인 대중 지배 수단을 종교라고 서술한 스피노자의 주장을 단순히 '종교'라는 의미로 단일하여 해석한 후에 기독교에서 대응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공포에 의해 미신(계산된 신학적 교리)을 믿고 예속을 갈구하는 인간의 성향을 탐구하였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적 행위에 따른 성향의 한도에서 탐구하였으며 감탄이나 좌절 같은 감정적 요소를 배제한 상태로 중립적인 관점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단순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존재 불운이나 여타의 상황으로 곤란하게 되었을 때 터무니없는 미신들을 쉽게 형성하고, 이성을 무력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하며 이런 성향의 근본적 추동력은 결국 공포이다' 라는 점입니다.

기독교는 터무니없는 미신으로 치부되는 것을 당연히 거부하였습니다. 당시 지배계급과 정치에 긴밀히 연결되어있던 종교계에 대한 스피노자의 경계는 오늘날에도 유의미한 견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언제나 기독교가 고민해야 할 부분은 정제되지 못한 교리와 혹세무민하는 인간의 목소리가 기독교를 대표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미신으로 치부되어야 하지 않음과 동시에 헛된 선동에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청렴하고 건강한 교회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진리의 근원에 뿌리하지 못하고 극히 지엽적인 부분만을 강조함으로서 세상을 혼란하게 만들고 사람을 악도에 떨어지게 잘못 인도하는 종교에의 예속을 경계하는 것에 반대할 기독교인은 없습니다.

○ 신학과 철학

'계시'와 '이성'의 긴장은 중세 기독교 시대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소포클레스(Sophocles)의 비극 『안티고네』에서 보듯, 옳고 그름을 놓고 벌어지는 도덕적 다툼이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초(超)인간적 질서'와 '이성적 판단'의 긴장이 발생합니다.

신학도 도덕적 원칙과 사회적 규범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 근거를 철학과는 다른 초월적 존재로부터 찾는다. 또한 초인간적이고 절대적인 신에 대한 믿음(pietas)을 자연적 질서에 대한 이성적 성찰보다 중시한다. 철학도 신학과 다른 근거와 접근방식을 강조한다. 초월적 존재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있더라도, 지성(noesis)으로 파악할 수 없는 우연적인 사건과 초자연적인 현상을 당연시할 수는 없다. 결국 신학이 설명하는 '신'과 철학에서 이해하는 '신'은 일치할 수 없다.

다만 '인간의 흠결' 또는 '이성의 한계'에 대한 자각이 '올바른 삶'에 대한 고민으로 귀결된다면, 이성으로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는 신학과 철학은 화해할 여지를 더 많이 갖게 될 수는 있습니다.

○ 철학자들이 주장한 종교의 정치사회적 기능과 경계점

정치철학자들은 늘 종교의 정치사회적 기능에 주목해 왔습니다. 그 기능은 스스로를 '선택된 민족'(goy qadoshi)이라고 믿는 집단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불신앙'(asebeia)이 정치공동체의 단합을 해친다고 믿었고,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보듯 종교의 통합적 기능은 기독교적 '사랑'(caritas)과 결합해서 시민적 유대를 강화하는 역할로 진화되었습니다. 그리고 토크빌과 같이 많은 정치철학자들이 종교는 정치 공동체에서 이기심을 억제해서 시민적 연대를 증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던 마키아벨리에게서도 이러한 종교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발견됩니다. 시민의 공동체에 대한 전투적 헌신을 강화하던 고대 로마의 종교와는 달리 비정치적인 덕성을 강조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 그리고 시민들에게 법을 위반했을 때에 받을 처벌에 대한 공포를 심어줌으로써 사회적 통합과 시민적 연대를 확보하는 데에 기여한 로마 종교의 역할에 대한 강조, 이 모든 것이 이른바 '시민 종교'의 정치사회적 기능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근대 국가도 정치와 종교의 결합 형태 중 하나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16세기 후반부터 국가(stato)는 군주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영토적 경계를 가진 특정 집단의 통합된 실체로 간주되기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중세부터 시작되었던 세속 권력에 의한 종교적 권위의 차용이 가속화되면서 군주에게 신화적 색채를 덧입히려던 시도가 '주권(sovereignty)의 확립'이라는 정치적 과제를 통해 노골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각기 다른 정도로 진행되었지만 신학적 교리를 이용하여 대중을 통제하고 신학을 복종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 행위는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대한 세속적 입법행위에 신적 권위를 부여하는 근대적 기획에 동원될 경우 신을 부정하는 세력이나 범신론자들의 공격에 다시 한 번 노출될 위험이 있습니다.

○ 현대사회까지 연결된 스피노자의 물음

17세기 자유주의 정치철학이 등장한 이래, 정치와 종교는 엄격하게 구분되어 정치사회적 역할을 수행되고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나라가 '정교분리(政敎分離)'를 헌법적 원칙으로 채택하고 있고, 종교 전쟁을 경험했던 서구 유럽은 물론 민주주의 국가라면 예외 없이 종교적 관용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사실 다원성의 보장이 개인의 자유에 중요한 조건으로 인식되고 있는 지금, 정치와 종교의 분리는 더욱 절실할 것입니다. 전자의 역할은 세속적인 것에 국한되어야 하고, 후자는 영적인 것만 돌봐야 한다는 개념은 우리 모두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정치와 종교는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종교적 신념과 신앙은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시민적 의무감을 부여하고 종교의 전통적 기능인 사회적 연대를 유지하는 기재(器材)는 여전히 강조된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발흥한 '종교적 근본주의'와 '종교적 민족주의'에서 보듯, 종교는 대중의 지지를 상실한 세속 정치를 대체하는 가공할 파괴력까지 갖추며 다시금 부상하고 있습니다.

맺음말

근대 국가의 특성이 보여주듯, 종교는 결코 개인적 신앙이나 비이성적 행위로만 치부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치도 순전히 합리적 판단과 이성적 토론만이 허용되는 공적 영역으로 남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의 정치사회적 역할에 대한 냉철한 분석만큼이나 중요한 정치철학적 과제가 있습니다. 바로 '정치와 종교가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만약 이러한 오랜 문제를 염두에 둔다면, 근대 국가에 내재된 정치와 종교의 결합만큼이나 정치로부터 종교를 분리하려는 정치철학적 요구 또한 간과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저는 세속적으로 타락한 카톨릭을 개혁하고자 발생했던 종교개혁과 정치철학자들이 신학을 악용하여 지배수단으로 전락한 종교의 역사, 그리고 이를 신랄히 비판하며 신 자체의 부정과 범신론으로 이어진 스피노자의 지적에서 선별해낸 기독교의 문제점 등을 살펴보았습니다.

기독교가 근대 국가의 신화적 채색이나 종교의 세속적 권력화에 이용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헐뜯으며 피를 흘렸던 역사는 재현되어서는 안될 것이며, 값진 희생으로 얻은 기독교의 자정작용이 훼손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진실하고 고귀한 존재의 부름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어떤 부름인지 정확히 듣기 위해 절실히 노력해야 합니다. 타락하는 세상이 구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누구보다 고민해야 합니다. 정치와 종교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우리가 기독교의 근본적인 존재에 얼마나 다가갈 수 있는가에서 출발하며, 이를 통해 세속적인 정치가 종교의 절대선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가로 귀결될 것입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