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포럼 18차 세미나
▲대표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확신은 구원의 조건인가

성경은 근본 ‘믿음’과 ‘확신’을 구분 짓는다. 그러나 ‘믿음’을 중시하는 기독교는 ‘확신’도 중요시하며, 때때로 둘을 동일시하는 듯 보이는 성경도 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라(살전 1:5).”

그러나 이는 둘의 동일시라기보다는 ‘믿음의 성장(살후 1:3)’을 말한 것이다.

만일 ‘믿음’을 ‘확신’과 동일시한다면, 흔들림 없는 견고한 믿음, 곧 ‘확신’이 있어야 구원받는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확신’은 ‘믿음’과 동일하지 않으며, 구원의 조건도 아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때때로 확신이 엷어지고 의심에 빠질 수 있다.

그리고 이 확신의 결여는 근본적인 문제에서 오기보다는, 대개 부차적인 데서 온다.

예컨대 ‘성화의 결핍감(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서는 ‘확신’을 ‘금생에서 칭의, 양자, 성화를 깨닫고 바라봄으로서 얻어지는 유익이라고 했다)’, 지속적인 경건생활의 결여, 구속의 도리를 피상적으로만 아는데서 연유한다(딤후 3:14).

구원은 확신과 무관하게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 스펄전(C. H. Spurgeon, 1834-1892)의 말대로, 확신이 결여된 ‘깨진 쪽박 같은 믿음’으로도 구원받는다.

확신이 구원의 조건이 아님은 유월절 때, ‘어린양의 피’를 집 문설주에 발라놓고 D-day를 기다리는 이스라엘 집들의 분위기를 상정(想定)해 봄으로서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어린양의 피의 구원’을 확신하고 안심하던 집이나 불안 속에서 전전긍긍하며 그 밤을 기다리던 집이나 모두 다 구원받았다.

이는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 집을 넘어간 것은 가족 구성원의 구원의 확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문설주에 뿌려진 피를 보고서였기 때문이다(출 12:23-30).

우리의 구원 역시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음(벧전 1:2)’ 곧,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 때문이지, 확신 때문이 아니다.

‘겨자씨’ 같이 작은 믿음일지라도(마 13:30-31),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생명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한다.

물론 그렇다고 확신을 구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확신이 주는 유익은 너무나 많다. 우리를 죄의식과 심판의 두려움에서 건져주고 감사와 기쁨의 삶을 살게 한다.

스코틀랜드 언약도(Covernanters, 言約徒) 토마스 보스턴(Thomas Boston, 1676-1732)이 말했듯 확신은 우리에게 ‘천국’을 경험시킨다. 그리고 믿음을 두텁게 하는 방식은 당연히 성경적이어야 한다.

이성주의자들처럼, 합리성에 기반한 이성적(理性的) 발분을 통해서가 아니다. 혹은 신념신앙인들처럼, ‘믿습니다’를 되뇌이며 자기 최면(催眠)과 암시(暗示)를 거는 신념강화의 방식도 아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는 말씀그대로, 복음을 듣는 중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된다.

◈깨달음으로 구원받는가

기독교에선 믿음만큼 ‘깨달음’도 중시한다. 성경은 ‘깨달음’을 구원의 증거로, ‘무지’를 죄의 결과로 말한다. 죄의 결과로 “사람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무지함과 마음의 굳어짐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됐고(엡 4:18)”, 죄에서 구원 받아 하나님을 알게 됐다(엡 1:8-9).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6)”,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요 17:3)”.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이 ‘깨달음’은 헬라 철학에서 가르치는 신적 이성(divne reason), 곧 ‘로고스(λγος)’적 깨달음이 아니다.

또한 신적 실체와 접촉하는 순간 진리에 도달한다는 ‘영지주의적(gnostic)’ 깨달음 혹은 불교에서 말하는 소위, 한 순간에 해탈을 갖다 주는 돈오적(頓悟的) 깨달음과도 다르다.

기독교의 ‘깨달음’은 어느 한 순간 득도(得道)하는 도통(道通)의 방식이 아닌, 복음을 믿어 성령으로 깨닫는 ‘신앙인식론’이다.

이 ‘신앙인식론’에는 ‘순간성’과 ‘점진성’ 모두가 함의된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즉시’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점점 깨달아가면서 ‘점진적’으로 더 하나님을 더 알아가게 된다.

구원을 받았지만 처음에는 ‘믿음의 저급함’과 ‘이해력의 결핍’으로 깨달음이 저급하다가 믿음과 이해력의 성장으로 깨달음도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10)”, “내가 어렸을 때에는...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

이 ‘믿음’과 ‘깨달음’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서로를 세워주는 ‘선순환(virtuous circle)’ 관계를 형성한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고(요 6:69), 복음을 깨달아 하나님을 더 확신 있게 믿게 된다(요일 4:16).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알게 하는 지혜(고전 1:24)’라고 한 말씀도 그리스도를 무슨 주문처럼 되뇌이면 신통력이 생겨 절로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신비주의적인 깨달음의 방식 같은 것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산상수훈의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본다(마 5:8)’는 말씀 역시, 수양으로 마음을 명경(明鏡)알처럼 깨끗이 하면, 마음에 하나님이 비친다는 동학(東學)의 인내천(人乃天) 사상 같은 것과 다르다.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아(행 15:9) 하나님과 화목하면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뜻이다.

이 외에도 창조를 비롯해 다양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이해력 역시 그리스도를 믿는 구속 신앙에서 나온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창조’는 그들 존재와 신앙의 근간이지만, 우리가 볼 때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그들에게는 진정한 창조 신앙이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알게 하기(히 11:1) 때문이다.

◈믿음인가 신념인가?

‘믿음’을 ‘신념’과 동일시하는 것은 심리주의(心理主義) 신앙 영향 때문이다. 그들은 ‘믿음’을 일종의 ‘종교심리’ 차원에서 접근한다.

그들에게 있어, 신앙은 인간의 마음에서 만들어진 ‘신념’에 다름 아니다. 이런 신념적 믿음에는 반드시 종교적 숭배 대상이 필요치도 않으며, 꼭 어떤 특정종교여야 할 필요도 없다.

이들에게 ‘신앙 대상’은 자기의 신념을 세우는 가상의 ‘지렛대(lever)’ 일 뿐이다. 물론 이런 ‘신념적 신앙’도 때론 기대 이상의 결과물들을 내기도 한다.

사람을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며 치유와 마음의 위안을 갖다 주기도 한다.

이러한 효능들이 사람들로부터 환호와 맹신을 이끌어 내기도 하나, 실상 그것들은 일종의 염력(念力), 암시(暗示)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그리스도의 대속에 뿌리박은 참된 ‘믿음’이 있다. 이는 그야말로 초자연적인 성령의 결과물이다(고전 12:3). 성경이 믿음을 ‘선물(엡 2:8)’로 말한 것은 그것이 인간 마음의 산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앉은뱅이를 낫게 한 베드로를 사람들이 신격화하려 하자, 그는 자기 개인의 권능과 경건이 아닌(행 3:12)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행 3:16)’이라고 한 것은 믿음의 뿌리가 ‘그리스도’임을 말한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성령의 믿음만이 죄인에게 구원을 갖다 주고, 초자연적인 결과물들을 산출한다. 기독교의 치유, 이적이 인간 마음에 기반한 ‘염력’이나 ‘암시’의 결과물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가 여기 있다.

‘백부장 하인의 치유(마 8:8-13)’, ‘가나안 여인의 딸의 축사(逐邪)’는(마 15:22-28) 전혀 염력이나 암시가 미칠 수 없는 환경, 곧 치유자 피치유자가 서로 일면식도 없고 물리적 공간도 전혀 다른 위치에서 일어났다.

끝으로, 신념적 신앙은 현재 자기의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의지에서 급조된 심리의 소산으로 어떠한 객관적 근거도 역사적인 뿌리도 없는 허상임을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믿음’은 다르다. 그것은 영원에 근거하며 하나님의 작정에 뿌리박고 있다.

곧 창세 전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작정과 그리스도의 피(엡 1:4-7)와 성령의 거듭남에 기초하고, 구원 작정을 받은 택자에게 복음의 부르심을 통해(살후 2:14) ‘믿음’이 구현된다(행 13:48).

이 초자연적인 삼위일체 신앙은 인간의 신념, 결단과 전혀 무관하다.

오늘 ‘신념적인 신앙’을 ‘기독교 신앙’으로 대치하려 하거나 이 둘을 섞으려고 하는 것은 거룩한 성령의 믿음과 그것을 내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