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님이 2019년 12월 1일 노숙인 사역을 하고 있는 서울 영등포 광야교회(담임 임명희 목사)에서 설교한 내용을 전문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본문: 요한계시록 2장 1-4절, 골로새서 3장 1-2절, 베드로후서 3장 13절

김명혁 목사
▲김명혁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제가 2008년 1월 13일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다음 지난 11년 11개월 동안 주일마다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주로 방문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고, 이따금씩 큰 교회들도 방문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광야교회와 중국동포교회도 매년에 한두 번씩 방문하고 있습니다.

제가 2008년 4월 26일 주일 광야교회에 처음으로 와서 ‘루디아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같은 일꾼’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19년 1월 6일 새해 첫 주일에 열네 번째로 와서 ‘새해의 소원: 하나님을 기쁘시게’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오늘 2019년 12월 1일 첫 주일에 열 다섯 번째로 와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성경과 역사의 종착역은 이 세상이 아닌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신자들의 문제의 하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을 너무 바라보고 귀중히 여기면서 세상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 라고 가르치지만, 우리 신자들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너무 바라보고 사랑하면서 세상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의 삶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것이고 들의 풀과 꽃과 같은 것이라고 가르치지만, 우리 신자들은 이 세상의 종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삶이 아주 중요한 것처럼 모든 관심을 이 세상의 종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문제에 기울이면서 세상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의 삶과 일들이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그 든든히 선 때에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시 39:5).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이니다”(시 90: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시 103:15).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사는 삶이 너무 귀중하고 너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에 무책임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현실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는 말입니다.

가룟 유다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로마 세력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나라의 종교 정치적 회복을 이루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자 예수님께서는 현실에 집착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로부터 임할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행 1:3).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6-8).

오늘 본문의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1-4).

여기 사도 요한이 바라본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이 네 가지로 묘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진 모습이었습니다. 즉 죄와 허물로 가득했던 인간 사회뿐 아니라 하늘과 땅과 자연계도 죄와 허물이 없는 깨끗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진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이었습니다. 여기 새 예루살렘은 구약과 신약과 교회 시대의 신자들과 교회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죄와 허물이 없는 깨끗한 새로운 모습을 지닌 교회가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장막이 내려와서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하늘에 계시던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사람들과 친밀하게 함께 거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넷째는 하나님께서 친밀하게 사람들과 함께 하시므로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게 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세상과 우주의 놀라운 변화가 종말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질 것을, 성자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사도 요한에게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살았던 성자 예수님과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선배님들과 교회 역사에 나타난 믿음의 선배님들의 모습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1. 하늘을 바라보며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사신 예수님

첫째로, 성자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바라보시면서 사셨고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상설교의 초점은 하늘이었습니다.

팔복의 내용은 세상의 복이 아닌 하늘의 복이었습니다.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행함도 구제도 기도도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를 행하고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마 5:19).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의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마 6:1).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 6:4).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마 6:9).

성자 예수님께서는 의를 행할 때나 구제할 때나 기도할 때에 자기 자신이나 사람들을 의식하지 말고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쌀아 두라”(마 6:20). 무엇을 하든지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자 예수님께서 자주 하늘을 바라보시곤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오병이어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고 했습니다(마 14:19).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키실 때도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셨다” 라고 했습니다(요 11:41).

십자가를 지시기 하루 전에도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보시면서 하나님께 기도 드리셨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 17:1).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셔서도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이렇게 부르짖으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친히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 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 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행 1:10, 11).

사실 성자 예수님께서는 3년 동안 제자들을 훈련시키시면서 세상과 땅을 바라보던 그들의 눈을 높이 들어 하늘을 바라보도록 훈련시키셨습니다. 우리들의 본향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늘 집이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집을 바라보며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땅만을 바라보면 마음이 더러워지고 복잡해 지고 무거워지고 어두워지고 악해지고 근심 걱정 원망 불평에 쌓이게 됩니다. 신경 쇠약에 걸리게도 되고, 여러 가지 병에 걸리게도 됩니다.

땅만 바라보면서 살던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취미는 땅에 떨어져 있는 단추와 바늘을 주어 모으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수 많은 단추와 바늘을 주어 모았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한 평생 동안 29,516개의 단추와 54,172개의 바늘을 주어서 모았다고 합니다.

저는 땅만 바라보면서 단추와 바늘을 주어 모으는 취미가 좋은 취미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선 목과 허리가 굽어 질 것이고 눈은 근시가 될 것이고 마음은 좁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실제로 목과 허리가 굽어졌고 성질은 인색해졌다고 합니다. 박윤선 목사님의 시편 주석 144쪽에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그 대신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의 것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깨끗해지고 선해지고 단순해지고 가벼워지고 밝아지고 평안해 지고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마음과 몸이 건강해집니다.

저는 하늘을 날아가는 꿈을 한 평생 꾸면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직사각형의 나무 판자 두 개를 날개로 삼고 날고 어떤 때는 직사각형의 종이 판자 두 개를 날개로 삼고 날기도 했습니다. 이십여 년 전부터는 아무 판자도 없이 그냥 하늘을 날아가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저는 또한 산을 좋아하는데, 산에 오르면 언제나 날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오래 전에 하와이 섬 바람 산에 올라갔을 때는 정말 날고 싶어서, 꿈에서처럼 종이나 나무 판자를 가지고 날기를 시도해 보려고까지 했었습니다. 알프스의 정상 융프라우에 올라 갔을 때는 하늘을 만지는 듯한 뿌듯한 흥분과 감동에 쌓여 어쩔 줄 몰랐습니다.

예일대학교 자로슬라브 펠리칸 박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땅을 바라보면 비관주의자가 되고, 하늘을 바라보면 낙관주의자가 된다. 땅을 바라보면 우울한 사람이 되고 하늘을 바라보면 밝고 즐거운 사람이 된다.”

2. 하늘을 바라보며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사신 성경 속 믿음의 선배님들

둘째로,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선배님들이 모두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선배님들은 모두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고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데리고 나가서 하늘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창 15:5).

야곱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하늘을 바라보도록 하셨습니다. “꿈에 본 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창 28:12).

모세가 시내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산 꼭대기에 강림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꼭대기에 강림하시고 그리로 모세를 부르시니”(출 19:20).

다윗도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한 다음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솔로몬이 무릎을 꿇고 손을 펴서 하늘을 향하여 기도와 간구로 여호와께 아뢰기를 마치고”(왕상 8:54, 대하 6:13).

히스기야왕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히스기야왕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대하 32:20).

느헤미야도 하늘의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기도하여 가로되”(느 1:4).

신약에 들어와서 스데반 집사가 순교 당할 때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고 했습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 7:55).

사도 바울은 언제나 하늘을 바라보며 천국을 사모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아나니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고후 5:1,2).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 3:20).

사도 베드로도 하늘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3).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면서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았다고 했습니다.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 11:13-16).

사도 요한이야말로 누구보다도 하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제일 많이 사랑하시던 제자였는데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던 사도 요한으로 하여금 마지막 날에 새 하늘과 새 땅과 우주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심판의 모습을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듣게 하셨습니다.

계시록 4장부터 22장까지 “내가 보니” “내게 보이니” “내가 들으니” 라는 고백들이 매장마다 나옵니다.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계 4:1).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계 4:2).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책이 있으니”(계 5:1).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니”(계 6:1). “이 일 후에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계 7:1).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하더니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시위한 일곱 천사가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계 8:1,1).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내가 보니 하늘에서 땅에 떨어진 별 하나가 있는데 저가 무저갱의 열쇠를 받았더라”(계 9:1).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 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계 10:1).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계 11:19).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계 12: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계 13: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계 14:1).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계 15:1).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계 16: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계 17: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계 18: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계 19: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잡아 일천년 동안 결박하여”(계 20: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사도 요한은 세계와 우주의 운명이 로마 황제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을 보고 또 보고 또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밧모 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의 마지막 모습과 마지막 말은 “내가 보니” “내가 보니” “내가 보니” 라고 고백하면서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이었고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라고 구원의 주님께서 오시기를 사모하는 신부의 말이었습니다(계 22:20).

3. 하늘을 바라보며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사신 교회사 속 믿음의 선배님들

셋째로, 교회 역사에 나타난 믿음의 선배님들도 모두 하늘을 바라보며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초대교회의 완성자 어거스틴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서기 410년 알래릭이 이끄는 동 고트족의 군대가 로마를 함락하고 불태웠을 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망했다고 절망에 빠졌었습니다.

대표적인 보수 신학자인 제롬도 이제는 “온 세상이 한 도성과 함께 망했다” 라고 탄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신의 도성」이란 책을 쓰면서 로마 도성이 망한다고 하나님의 도성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하늘을 바라보라고 충고했습니다.

어거스틴은 현세를 무시하고 부정하는 이원론자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현세를 잠정적이고 어둡고 덧없는 과정으로 보았고 하늘을 영원하고 밝고 복된 곳으로 보았습니다. 사무엘하 7장 10절 이하에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이 솔로몬의 시대에는 물론 어떤 다른 시대에도 성취된 적이 없었다고 지적했습니다.

“누구든지 그렇게도 큰 축복이 현세에서 그리고 땅 위에서 성취되기를 바란다면 그의 지혜는 어리석음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변화무쌍한 인간 사회 안에서는 그와 같은 큰 평안과 축복이 결코 주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약속된 평화롭고 안전한 처소는 영원한 처소인데 그것은 참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게 될 자유의 어머니인 하늘의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신국론」 17:13).

어거스틴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도성과 왕국에 대한 예언이 현세에서 성취되고 있다는 유세비우스의 현세주의적 낙관주의를 어리석고 모순되는 것으로 일축했습니다. 현세에는 행복도 평안도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이 약속이 현세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극히 염치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 단 한 명의 성도가 현세에의 비참 가운데서 눈물이나 고통 없이 살고 있거나 살아왔거나 또는 살게 될 것이라고 고집을 부리며 주장할 만큼 어리석고 맹목적인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나이다’ 라는 고백이 하늘의 도성 예루살렘의 시민의 고백이 아니었는가?”(「신국론」 20:17).

어거스틴은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에서 완성될 영원한 ‘신의 도성’인 천국을 바라보았습니다. 「신의 도성」 마지막 권 마지막 장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과 성화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며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쉬고 보며, 보며 사랑하고, 사랑하며 찬양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마지막이 없는 마지막에 이루어질 것이다.”(「신국론」 22:30).

어거스틴은 결코 현세에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 문화와 문명을 꽃피운 기독교 최고의 신학자였고 목회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은 시대를 초월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땅을 바라보지 말고 땅에 집착하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라고 충고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칼빈주의 신학자요 부흥사요 대각성 운동의 주역인 요나단 에드워즈도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친밀하고 달콤하게 느꼈습니다.

“나는 걸으면서 하늘과 구름을 쳐다보았다. 그때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엄위와 은혜에 대한 달콤한 느낌이 쏟아져 들어왔는데 그것을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다. 나는 가끔 앉아서 달을 쳐다보곤 했고 낮에는 구름과 하늘을 쳐다보며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달콤한 영광을 바라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창조주와 구속주를 명상하곤 했다.”

얼마나 멋진 모습입니까?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친밀하게 느끼면서 산 것이 미국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위대한 철학자요 신학자요 목회자요 부흥사였던 요나단 에드워즈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아버지이신 길선주 목사님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요한계시록을 1만 독을 하면서 암송을 했는데 사도 요한처럼 하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가볍고 청빈하게 살았습니다.

이기풍 목사님도 맨날 회개의 기도를 드리시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았고, 최권능 목사님도 맨날 “예수 천당”을 외치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한국교회의 무디’라고 불리던 이성봉 목사님도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다시 오시는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재림 신앙을 가지고 한평생을 살았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밤에 자다가 옆집 방앗간에서 방아 찢는 소리만 들어도 주님이 오시지 않나 하고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쳐다보곤 했다는 간증을 저는 중학생 때 직접 열두 번이나 들었습니다.

이 세상은 잠깐 지나가는 허무한 과정이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한 재림신앙을 가져야 하며, 재림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무상하고 허무한 이 세상에서 성결하게 살아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성봉 목사님은 허사가를 자주 불렀습니다.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공명 장수는 무엇 하리요….” 이성봉 목사님에게 있어 재림과 천국은 기독교 신앙의 목적이었고 종착역이었습니다.

“예수의 재림은 하나님의 최대의 계획이요, 성도의 최대의 소망이다. 만물이 고대하는 소망이요 마귀를 진멸하고 세상을 심판하고 성도의 눈물을 씻어주시고 당신의 신부들을 영접하시는 주의 날이다.”

그리고 재림의 날이 임박했음을 지적했습니다. “오리라, 도적같이 오리라는 약속을 굳게 잡고 요제인가 고제인가 눈물로 기다리는 주님의 재림, 천지는 변하여도 그 약속은 변치 않으시리라. 아무리 보아도 시대는 점점 절박하여간다. 자연의 징조를 보든지, 국제 사회의 징조를 보든지, 교회와 인심의 징조를 보든지, 유대나라 독립하는 무화과 잎이 나는 것을 보면 재림의 복음을 믿는 자들의 가슴은 뛰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깨어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재림을 준비하여야 한다. 깨어라.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 밝게 켜 들고 거룩함과 인애로 신 혼 신을 단장하고 공중 혼연을 고대하는 신부들은 복이 있으리라. 사랑하는 나의 주님 언제나 오시렵니까? 택한 신부 맞으시려 언제나 오시렵니까? 일구월심 오래도록 주님 생각 간절합니다. 사모하는 나의 주님 속속히 오시옵소서.”

지금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설교에서나 삶에서, 그리고 우리 신자들의 신앙과 삶에서, 종말 신앙과 천국 소망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세가 전부인 것처럼 현세에 집착하면서, 세상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성봉 목사님의 재림 신앙과 천국 소망은 현재와 미래에 대해 둔탁해진 우리들의 신앙을 일깨우는 청량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도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삶은 종말과 천국 신앙에 의해 지배된 소망의 삶이었습니다. 그의 가슴과 의지와 시선은 세상이나 세상의 안일에 매이지 않았고 오직 내세와 천국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이 세상의 재물이나 평안이나 명예에는 티끌만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난을 애처로 삼고 고난을 스승으로 죽음을 소망”으로 삼으며 천국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옥중 생활을 하면서 힘들고 지칠 때마다 손수 지은 ‘주님 고대가’를 불렀습니다. 이 가사를 보면 그가 얼마나 간절히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소망을 지니고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주님 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 옵소서.”

손동희 권사님은 아버지 손양원 목사님의 천국 신앙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할 뿐, 현세의 안락과 풍요를 약속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가끔 안수 기도를 해 달라고 찾아오는 병자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특별히 병 고침을 위한 안수기도를 한 적이 없다.

‘나는 영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육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병들면 어떻습니까? 병신이면 또 어떻습니까? 잠깐인 나그네 세상에서 병신으로 살다가 천국 가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다구요.’

이런 말로 병자를 돌려보낼 뿐이었다. 나병환자들과 평생을 같이 보내며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았지만, 그들의 병든 상태를 나쁘다거나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지 않았다.”

손양원 목사님은 결국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2주일간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9월 28일 밤 11시쯤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당하여 48세에 순교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를 죽이려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총 개머리판으로 입을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저들의 죄를 용서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리면서 하늘 나라로 가셨습니다. 그가 그렇게도 그리고 사모하던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순교적 믿음을 지닌 믿음의 사람이었고, 생명을 다 바쳐 나환자들과 원수를 사랑한 사랑의 성자였으며,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사신 소망의 사람이었습니다.

4. 결론: 땅에 집착할 것인가, 하늘에 오를 것인가?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성향이 있습니다. 한 가지 성향은 땅에 집착하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 성향은 하늘에 오르려는 것입니다.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영혼은 위로 올라가려 하고 육체는 땅으로 내려가려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흙으로 지음 받은 몸은 땅으로 돌아간다” 라고 기록했습니다. “육은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사람에게는 두 가지 성향이 있습니다. 육체와 세상 일에 집착하려는 성향과 영혼과 하늘 일에 집착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땅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라고 권면했습니다.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엣 것 즉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고 분부했습니다. 땅의 것들은 음란한 것, 부정한 것, 악한 것, 정욕적인 것, 탐욕적인 것들인데 이와 같은 것들을 바라보거나 생각하지 말라고 분부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1-2).

땅엣 것들만 생각하면 마음이 더러워지고 복잡해지고 무거워지고 어두워지고 악해지고 근심 걱정 원망 불평에 쌓이게 됩니다. 신경쇠약에 걸리게도 되고 여러 가지 병에 걸리게도 됩니다.

그 대신 하늘을 바라보고 하늘의 것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깨끗해지고 선해지고 단순해지고 가벼워지고 밝아지고 평안해지고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마음과 몸이 건강해집니다.

저의 스승이신 자로슬라브 펠리칸 박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땅을 바라보면 비관주의자가 되고 하늘을 바라보면 낙관주의자가 된다. 땅을 바라보면 우울한 사람이 되고 하늘을 바라보면 즐거운 사람이 된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사는 것이 너무너무 귀중합니다. 하늘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우리들이 돌아갈 본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늘을 바라보면 하나님과 천국을 친밀하게 느끼게 됩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우리들의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게 됩니다.

우리들은 하늘과 가까워지고, 하늘은 우리들과 가까워지게 됩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천국이 그리워지고, 천국이 가까워집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우리들의 모습이 하늘처럼 아름다워지고 신비로워집니다. 우리들이 하늘이 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사십시다! 땅에 집착하면 망합니다. 롯의 처는 자기 집과 재산에 집착하다가 망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 재물과 돈에 집착하다가 망했습니다. 데마는 세상에 집착하다가 망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하늘을 바라보며 살다가 죽어서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사도 바울도, 사도 요한도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다가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주기철 목사님도 이성봉 목사님도 손양원 목사님도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다가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겼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천국 소망”을 지니고 아름답고 멋지게 살다가 죽읍시다!

제가 2년 전인 2017년 12월 28일 ‘나의 마지막 소원과 기도’라는 제목의 글을 쓴 일이 있는데, 마지막 부분을 그대로 그리고 조금 추가해서 인용함으로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인 저도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사랑에 미치고, 나환자 사랑에 미치고, 원수 사랑에 미쳐서 살다가 죽게 하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앞서 가신 신앙의 선배님들이 사시다가 죽으신, ‘미친’ 삶과 ‘미친’ 죽음을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살다가 죽게 하시옵소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부족한 죄인에게 베푸신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 제물로 다 드리고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도움과 섬김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아주 가볍게 하늘 집으로 올라가게 하시옵소서! 성자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성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