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베드로전서 4장 1-6절

태양
▲ⓒAndrey Grinkevich on Unsplash
‘아이템’이란 말이 있다. 아이템은 ‘인터넷 게임에서 사용되는 장비와 소모품을 통칭한다.’ 아이들이 게임할 때 ‘아이템’이 반드시 필요하다. 만약 아이템이 없으면 게임을 할 수 없다.

어릴 적 하는 게임은 성장의 한 과정이다. 어른들이 걱정하는 것은 중독이다. 중독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연세대학교 최재붕 교수는 그의 책 《포노 사피엔스》를 통해 아이들이 게임하는 것을 적극 권장한다.

하지만 게임할 때 부모의 관리는 필요하다. 초등학생들이 하루에 게임을 1시간 30분이나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하루 일과 중 중요한 시간이 스마트폰 등으로 게임하는 시간이다. 요리연구가이자 사업가인 백종원은 게임을 통해 아이들을 교육한다고 말한 적 있다.

자녀들이 이를 닦거나 아빠에게 ‘다녀오셨냐?’, ‘잘 주무셨냐?’고 인사하면 게임을 5분이나 10분 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고 한다. 그 결과 게임하고 싶은 아이들이 아빠가 잠자고 있는데 인사하려고 침대 앞에 서 있기까지 한단다.

아이들이 게임을 할 때는 아이템이 필요하다. 어른들도 아이템이 필요하다. 창업을 할 때다. 아이템을 어떤 것으로 잡느냐가 창업에 관건이기 때문이다. 창업을 할 때는 창업 종목이 사업 성패를 결정할 정도다.

즉 사업 아이템을 ‘카페로 할 것인가?’, ‘식당으로 할 것인가‘, 식당 중에서도 곱창이냐?’, ‘불고기냐?’, ‘짜장면이냐?’ 등이 중요하다. 창업 아이템을 결정할 때, 반드시 기억할 것이 있다. 아이템이 그 지역과 장소에 맞아야 한다.

카페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카페도 아이템이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이 오게 할 것인가의 아이템도 중요하다. 이전 사장님은 젊은 사람들이 올 수 있도록 운영했다. 그러자 젊은이들이 주 고객이었다.

지금의 사장님은 어른들을 중심으로 운영한다. 당연히 어른들이 주 고객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아주 시끄럽다. 저는 너무 시끄러워 다른 카페로 옮기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세상을 살 때만 아이템이 필요하지 않다. 신앙생활에도 아이템이 필요하다. 아니, 아이템이 중요하다.

신앙생활을 할 때 ‘기복적으로 할 것이냐?’, ‘하나님의 영광으로 할 것이냐?’ ‘세계관 세우기로 할 것이냐?’가 중요하다. 더 나아가 신앙생활의 중심을 ‘육적인 것에 둘 것이냐?’, ‘영적인 것에 둘 것이냐?’가 중요하다.

이 시간 한 번 질문해 봐야 한다. 삶의 아이템은 무엇으로 설정했는가? 신앙생활의 아이템은 무엇으로 설정했는가?

제 과거 신앙생활의 아이템은 기도였다. 몸이 몹시 아팠기에, 기도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한 집사님을 만났다. 이 분은 입만 열면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을 사용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란다. 집사님의 신앙 아이템은 ‘하나님의 은혜’다.

현재 저의 목회 아이템은 세 가지다. 하나는 책 쓰기다. 또 다른 하나는 설교 글쓰기 가르치기다. 마지막으로 강의하기다.

과거 신앙생활의 아이템이 기도이다 보니, 기도에 관심이 많았다. 그 결과 10년 간 중보기도 사역을 했다. 최근 저로부터 중보기도 사역을 받았던 한 분이, 기도 훈련을 받았을 때가 자기 신앙생활이 가장 행복했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당시 저의 목회 아이템이 좋았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지금은 책 쓰기, 설교 글쓰기 가르치기, 강의하기라는 아이템으로 살아간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두려웠던 미래가 두렵지 않다. 기대감을 갖고 목회를 하고 있다.

오늘 베드로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생활의 아이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한다. ‘육’이 아니라 ‘영’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믿음의 선배들은 아이템이 ‘영적’이었다. 아브라함의 아이템은 믿음이었다. 이삭의 아이템은 양보였다. 다윗은 아이템은 하나님의 마음과 합치였다.

구주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이었다. 하지만 ‘영’이 아니라 ‘육’이었던 사람들도 꽤 있다. 여로보암 왕은 우상숭배였다. 애굽 땅에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은 불평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영적인가? 육적인가?

세상 사람들의 특징은 육적이다. 육적인 것 중에서도 가장 힘이 센 돈이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저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합니다.’ 사실 이 말은 생소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돈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말로만 돈이 중요하다고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가 돈에 대한 욕심이 많으니 남들보다는 돈을 잘 버는 편이긴 하다. 그렇다고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돈 있을 만큼 있는데 늘 돈이 없다고 말한다. ‘돈, 돈, 돈’을 하니, 사람들이 가까이 가기를 기피한다.

육적인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오늘 본문 3절에 그 특징이 잘 그려져 있다. 그들의 삶의 특징은 방탕 함이다. 악한 욕망에 사로잡힌 술 취함이다. 흥청망청 떠듬이다. 우상에게 절하고 경배함이다.

이 모습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었다. 이들은 완전히 육적이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영적이어야 한다.

오늘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은 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따라 살아야 한다(6절).고 말한다. 그 말은 무슨 말인가?

지금까지는 육적으로 살아왔다면, 이젠 영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의 전반전을 ‘육’으로 살았다면, 인생의 후반전은 ‘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까지’를 인생의 전반전이라고 치자, 그럼 ‘오늘부터’는 인생의 후반전이다. 후반전인 ‘오늘부터’는 ‘육’이 아니라 ‘영’으로 살아야 한다.

영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영을 쫓지 않고 육을 쫓아 살면 죽음으로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6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영을 따라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영으로 거하신다. 하나님이 영으로 거하시면 우리도 영으로 살아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

육은 사망이므로 그리스도인은 사망을 쫓는 육이 아니라 생명과 평안이 임하는 영으로 살아야 한다.

현실은 어떤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육적으로 살아간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영적으로 살아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살아가야 할 삶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오늘까지는’ 인생의 전반전이라고 했다. 또한 ‘오늘부터는’ 인생의 후반전이라고 했다. 그럼 후반전인 오늘부터는 삶을 전반전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

그냥 다르게 사는 삶이 아니라, 믿음의 선배들처럼 믿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도록 살아야 한다.

베드로가 “그 후로는(2절)”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신앙생활의 전반기를 정욕 가운데 살았다는 말이다. 그것이 2절과 3절이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

신앙생활의 전반기에는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다. 하지만 이젠 달라야 한다. 신앙생활의 후반기는 영적으로 살아야 한다. 2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야 한다.”

신앙생활의 후반기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려면 할 일이 하나 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신앙생활의 전반기에는 사람을 만났더니 정욕으로 살았다. 신앙생활의 후반기를 전반기와 다르게 살려면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은 만남이다’라고 한다. 만남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는 책을 만났다. 책을 만났더니 신앙생활의 후반기를 주님의 손길로 살아가고 있다.

세상에 발 딛고 사는 사람은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인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밝은 사람을 만나면 밝은 사람이 된다.

부정적인 사람을 만나면 부정적인 사람이 된다.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면 콧노래가 저절로 나온다.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만나면 불쾌감을 떨치는데 시간이 걸린다.

어떤 분은 남편을 잘못 만나 평생 고생만 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 고생을 평안으로 바꿀 수 있었다고 했다.

어떤 분은 좋은 분이라고 어떤 분을 소개받았단다. 처음에 잘 해주어서 좋았단다. 하지만 그 만남으로 인해 경제적인 손실이 이만저만 아니었단다.

최근 어떤 분이 보이스피싱으로 고생을 했다. 다행히 은행의 기지로 경제적 손실은 보지 않았다고 한다.

만나지 않아야 할 만남이 있다. 빅뱅 멤버 승리와 1박 2일에 출연했던 가수 정준영의 만남이다. 이 둘은 잘못된 만남이었다. 만남으로 인해 둘은 경찰 조사를 받았다. 정준영은 구속되어 있다.

이런 만남은 김건모의 노래 제목처럼 ‘잘못된 만남’이다. 언제나 만남이 중요하다, 만남에 따라 삶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왕 만난다면, 도움이 되는 만남을 가져야 한다.

어깨동무대안학교 교장인 윤은성 목사는 《세상을 바꾼 한국사 역사인물 10인의 만남》이란 책을 썼다. 그는 역사 속의 살았던 사람들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다.

“역사 속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에는, 만남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의 방향 전환이 일어나고, 만남을 통해 예상하지 못했던 성장의 계기기 찾아오고, 만남을 통해 생각하지 못했던 기회들이 주어졌다.

역사 속에서 알려진 사람들, 자기 인생과 자기 시대를 책임 있게 살았던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다. 영향을 받은 사람이 존재한다. 생각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 책 들이 있다. 삶의 견문을 넓히는 여행을 통해 또 다시 새로운 만남을 경험했다.”

그는 그 책에서 만남으로 인생이 바뀐 10명을 소개한다, 그 중 한 명이 백범 김구다. 윤은성은 김구의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백범이 걸어간 길마다 만남의 흔적이 남아 있다. 동지를 얻었고 동지를 귀하게 여겼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순국선열들의 가족들을 끝까지 챙겼다. 임시정부조차 살림이 어렵고 계속하여 옮겨 다니는 상황에서도 어떻게 하든지 대식구인 유가족 모두를 함께 충칭까지 이끌고 갔다.”

또 언급된 한 명이 시대의 풍운아 김옥균이다. 김옥균은 사람과의 만남에서 의리를 중시했다고 한다. 그가 의리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배반을 당해도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믿어주었다. 의리가 있었기에 주변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정승 출신 박규수, 중인 역관 출신 오경석, 미국공사 푸트, 망명지에서 끝까지 함께 한 유혁로와 이윤고, 마지막 길을 함께 해준 와다 엔지로, 죽어서도 김옥균 곁에 묻히길 원했던 가이 군지, 일본 정계의 거물들, 일본 바둑계의 명인들 등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다양한 사람을 만남으로 인해 쇄국정책으로 외국의 변화에 캄캄한 조선에 근대적 개혁운동을 이끌었다. 비록 3일 만에 실패했지만 위대한 개혁인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삶은 만남이 중요하다. 사람과의 만남이 중요하다. 만나서 도움이 되는 사람을 만나냐 한다. 세상에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이왕이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좋다. 그래서 언제나 만남은 위대하다.

그리스도인도 만남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이 있다. 하나님이시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예배당으로 간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이 만나야 사람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나야 할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최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셨다. 지금도 세상을 통치하신다. 마지막 때에는 세상을 심판하신다.

저는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을 만나 인생이 바뀌었다. 죽음의 사경에서 생명의 영역으로 옮겨졌다. 절망의 상황에서 희망의 상황으로 바뀌어졌다. 죽음의 사경을 헤맬 때는 육으로 살 때였다. 죽음의 위기 속에서 영으로 바뀌면서 다시 생명을 갖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절망의 시기가 다가오자 목회를 더 이상 할 수 없을 상황이 되었다. 더 이상 설교를 할 수 없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 희망의 책을 들게 하셨다. 20대 때 성경책을 들고 생명으로 옮겨졌다. 지금은 책을 통해 희망으로 옮겨주셨다.

인생의 전반전이 ‘육’이었다 해도 괜찮다. 인생의 후반전이 ‘영’이면 된다. 지금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인생의 전반전이 ‘육’이었다면 인생의 후반전이 ‘영’이면 된다. 지금 그리스도인이라면 신앙생활이 전반전이 ‘육’이었다면 신앙생활의 후반전이 ‘영’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일지라도,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을 만나기 전과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바울을 보라. 인생의 전반전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인생의 후반전인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났다. 그 결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는 인생의 전반전에 스데반을 죽이는 데 앞장섰다. 스데반이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던 악한 사람이었다(행 8:1). 교회를 진멸하고자 했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다(행 8:3). 그것도 부족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다(행 9:1). 예수님의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했었다(행 9:1-2).

예수님을 만난 인생의 후반기는 완전히 달랐다. 완전히 달라지게 된 동기가 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심 때문이었다.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3절). 동시에 한 음성을 들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4절)”.

그는 예수님을 만난 뒤 전반기 ‘육의 인생’에서 후반기 ‘영의 인생’으로 바뀌었다. 전반기 율법을 위한 삶에서 후반기 은혜를 위한 삶으로 바뀌었다. 전반기 죽이는 사람에게 후반기 살리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는 사람을 살리려다가 생고생을 했다. 죽을 위기를 수없이 넘겼다. 전반기 죽이는 사람이었다면 후반기 죽을 위기를 넘겨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부터 27절까지 잘 드러난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하다. 누구를 만나느냐 따라 삶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적어도 인생의 후반기에는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누구나 예수님과의 만남은 가장 극적인 만남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 생명의 역사를 잉태하는 사람으로 변한다.

우리가 만나지 않아야 할 만남이 있다. 윤은성의 말처럼, ‘나’와 ‘그것’의 만남이다. 사람은 ‘나’와 ‘너’로 만나냐 하는데 ‘나’와 ‘그것’으로 만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만날 것은 ‘나’와 ‘하나님’으로 만나는 것이다.

우리가 ‘나’와 ‘그것’으로 만나면서 모든 비극이 시작된다. 상대를 존재로 만나지 않고 도구와 수단으로 만나기 때문이다.

‘만남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는 마틴 부버는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라고 했다. 우리는 만남 안에서 서로를 확인한다. 나의 존재는 너를 통해 확인되고 너의 존재는 나를 통해 확인된다.

그리스도인은 ‘나’와 ‘그것’이 아니라 ‘나’ 와 ‘너’로 만나야 한다. 더 나아가 ‘나’와 ‘하나님’으로 만나야 한다. 그럴 때 인생의 후반기에 기대감을 갖고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다. 바울과 같은 세상을 살리는 삶을 살 수 있다.

하나님과 만남이 소중한 사람은 사람과의 만남도 소중히 여긴다. C. S. 루이스의 책 《인간 폐지》에서는 고대 이집트 프타헤텔의 가르침(Precepts of Ptahetep, H.R. Hall, 《고대근동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사람들을 위협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신이 너를 위협하실 것이다.” 이 말은 사람을 중시하라는 것이다. 사람을 존중하며 인격적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사람과의 만남이 소중하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만남은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을 만나면 인생의 전반기 ‘육’으로 살았다면 인생의 후반기는 ‘영’으로 살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버려지는 신앙생활에서 챙겨지는 신앙생활로 바뀐다. ‘한탄’의 신앙생활이 ‘감탄’의 신앙생활로 바뀐다.

하나님을 만날 때 어떻게 만날 것인가를 잘 설정해야 한다. 하나님을 만날 때 두 가지 모습이 나타난다. 첫째는 ‘따라 하기’다. 둘째는 ‘다르게 하기’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과 달라야 한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라 하기 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라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라하면 예수님을 본받게 되는 데 그럼 세상과 다르게 살 수 있다.

세상과 다르게 사는 비결은 두 가지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첫째, 자신의 답으로 살아가야 한다. 김종직은 그의 책 《셀프파워》에서 ‘셀프파워’는 ‘남과 다르게 자신의 답으로 살아가는 힘이다’라고 했다. 즉 셀프 파워로 살아가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답으로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제시한 답은 말씀 안에 있다. 즉 말씀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한다. 만약에 세상을 따라가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스프링복과 같이 몰살당할 확률이 높다. 산업화 시대는 따라 하기를 하면 2등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따라 하기를 하면 3등이 아니라 3류가 된다.

신앙생활은 따라 하기가 아니라 예수님 닮기로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위대함은 하나님을 닮은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 교회가 초라함은 세상을 따라갔기 때문이다. 세상과 다르게 해야 한다. 다르게 하는 것은 ‘따라 쟁이’가 아니라 ‘다르게 닮아가는 삶’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세상과 다르게 살게 된다. 일제치하에서 예수님을 만나 다르게 산 사람들이 있다. 윤동주, 송몽규, 문익환 목사다.

영화 〈동주〉에 보면 송몽규와 운동주 두 명만 나온다. 송몽규(박정민)와 윤동주(강하늘)는 사촌이자 둘도 없는 친구다. 내성적인 성격의 동주는 시를 쓰며 시대의 비극을 아파했고, 몽규는 직접 행동으로써 독립운동을 한다.

윤은성은 한 명을 더 언급한다. 바로 문익환 목사다, 윤은성은 세 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송몽규는 항일운동에 적극 뛰어들어 투사로 살았으며, 윤동주는 친구처럼 용기내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글로 풀어내며 저항의 몸짓을 했다. 문익환은 일찌감치 목회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같은 해 같은 집에서 태어나, 같은 해 같은 감옥에서 죽었다. 무덤조차 같은 묘지에 나란히 묻혀 있다. 그 후 문익환은 광복을 보았으며 성서학자로 목회자로 자신의 길에 들어서 한국의 민주화에 앞장섰다.”

위의 세 명과 같이 우리가 세상과 다르게 살려면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예수님을 만나야 세상의 악취를 예수의 향기를 풍길 수 있게 만들 수 있다.
성도는 세상의 방향제와 같은 사람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한 영적인 방향제로 살아야 한다. 만약 우리가 전반전에 악취로 살았다면, 후반전은 예수님이 뿌려주는 향기를 풍기는 방향제와 같이 살아야 한다.

신앙생활은 내가 멋있어 보이는 삶이 아니다. 하나님이 멋있어 보이는 삶이다. 그러려면 세상 따라 살기를 과감하게 접어야 한다. 도리어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아야 한다.

지금까지 세상의 ‘육’으로 살았다면 이제 하나님의 ‘영’으로 살아야 한다. ‘육’의 삶을 ‘영’의 삶으로 바꾸려면 한 가지를 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하나님의 사랑은 푹 빠져야 한다.

어느 시인이 이런 말을 했다.

“사랑에 빠진 이의 마음은 어떠한 호의로도 움직일 수 없고, 반대를 당하면 스스로를 순교자로 느끼게 된다네!”

남녀가 사랑에 빠져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반대하면 순교자처럼 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되 하나님을 사랑하면 된다. 그럼 하나님의 사랑받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세상적인 사랑으로는 절대 충족되지 않는다. 곧바로 또 다른 사랑을 찾는다. C. S. 루이스는 그의 다른 책 《네 가지 사랑》에서 “자연적 사랑은 결코 스스로 충족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푹 빠진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루이스는 《네 가지 사랑》에서 사랑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선물의 사랑(Gift Love)’과 ‘필요의 사랑(Need Love)’이다.

선물의 사랑은 한 가정의 가장이 정작 자신은 함께 누리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지만 가족의 미래 행복을 위해 일하고 계획하고 저축하는 사랑이다.

필요의 사랑은 외롭고 겁먹은 아이가 엄마 품속으로 파고드는 모습이다. 우리가 가질 사랑은 필요의 사랑이 아니라 선물의 사랑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푹 빠지면 선물의 사랑으로 살아가게 된다.

십자가가 왜 위대한가?

십자가의 사랑이란 ‘필요의 사랑’이 아니라 ‘선물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장 큰 선물이 죄를 대속하신 사랑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럼 육의 사람일지라도 영적인 사람이 된다. 전반전은 육적으로 살았을지라도 후반전은 영적으로 살게 된다.

신앙생활의 전반전은 ‘필요의 사랑’을 소유한 사람으로 살았다면 신앙생활의 후반전은 ‘선물의 사랑’을 소유한 사람으로 살게 된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도인 목사
아트설교연구원 대표
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