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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느헤미야 3장 20-27절


복기는 최선이다

프로 바둑 기사들은 승부를 마무리짓고 난 다음에 복기를 합니다. 복기란 승부가 끝난 다음에 양 대국자가 서로의 잘잘못을 되짚어 보기 위해 방금 바둑을 둔 순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두는 것입니다.

한 번 바둑을 둘 때 보통 250개에서 300개의 돌을 둔다고 합니다. 이 많은 돌을 프로 바둑기사들은 한 점의 오차 없이 정확하게 복기를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프로 바둑 기사들은 바둑알을 한 점 한 점 놓을 때마다 의미 없이 돌을 놓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돌을 놓는다는 것입니다. 바둑알을 왜 그 곳에 두는지 의미를 생각하면서 두면, 복기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바둑 한 알, 한 알을 생각하며 의미 있게 둔다는 것을 달리 표현하자면, 바둑알을 한 점 한 점 놓을 때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등반에 성공할 확률이 높다

2018년 10월에 김창호 대장이 이끄는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등반 도중 사망했다는 비보가 전해졌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이었습니다.

에베레스트산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산악인들이 많이 등반하는 산입니다. 이 산은 환경이 아주 척박한 곳이라, 등반사고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산입니다.

에베레스트산을 등반하려고 하는 대원들은 등산에 앞서 심리검사를 받는다고 합니다. 심리검사 과정 가운데 이런 질문을 던진다고 합니다. “당신은 정상까지 오를 것 같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은 성공 확률이 비교적 높지만, “글쎄요, 그렇게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도중에 하차한다고 합니다.

최선을 다했다면 결과에 만족해야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최고가 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다 최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최고의 자리는 하나뿐이기 때문입니다.

최고는 최선을 다한 결과여야 합니다. 최선을 다했다면 결과에 관계없이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외국 선수들을 보면, 금메달이 아니라 은메달, 동메달을 따도 너무나 기뻐합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 선수들은 은메달이나 동메달을 따고도 속상해서 눈물을 흘리거나 고개를 푹 숙이는 것을 봅니다. 이 모습을 본 외국인들은 도저히 우리나라 선수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을 합니다.

물론 우리나라 선수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금메달을 탄 선수만 기억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아쉬움이 남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결과가 주어졌든지 최선을 다했다면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외국 선수들은 자신들이 최선을 다한 결과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최선이 반드시 최고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최선이 없는 최고는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아서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쉽게 무너집니다. 남을 이기기 위한 최고가 아니라 자기가 목표하는 최고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한 존 스티븐 아쿠와리

1968년 10월 20일, 멕시코시티의 올림픽 경기장에는 수많은 군중이 자리를 뜨지 않고 마라톤 최종 주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고 마침내 한 선수가 비틀거리며 결승선을 향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뒤에는 구급차가 그를 따라왔습니다.

그 선수는 탄자니아 국가대표 존 스티븐 아쿠와리였습니다. 경기 도중 넘어져 심한 부상을 입었지만, 피로 얼룩진 붕대를 다리에 감고 절뚝거리며 마침내 결승선에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올림픽 경기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모든 관중들이 일어나 우승자가 들어왔을 때보다 훨씬 더 뜨거운 박수로 그를 환호하였습니다.

어떤 기자가 아쿠와리에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다친 몸으로 어떻게 포기하지 않고 그 먼 거리를 달려왔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조국 탄자니아는 나를 마라톤 선수로 출전시킬 때 출발만 하라고 보낸 것이 아니라 끝까지 뛰라고 보낸 것입니다.”

그는 가난한 조국 탄자니아를 생각하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달렸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그 당시 마라톤 우승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혼신의 힘을 다한 마지막 주자인 아쿠와리를 진정한 마라토너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한 탄자니아 정부는 그의 이름을 딴 아쿠와리 체육재단을 만들어 국가의 유망 체육선수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최고와 아닌 최선을 다한 사람을 칭찬하시고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주십니다.

예루살렘 성벽 건축을 독려하는 느헤미야

페르시아 아닥사스다왕의 술 맡은 관원장이었던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이 부서지고 무너졌고 성문은 불에 타버렸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조국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아닥사스다왕의 허락을 받아 3차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페르시아 땅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느헤미야는 종교적인 지도자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온 것이 아니라, 총독의 자격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온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먼 거리를 달려왔지만 예루살렘에 도착한지 3일 만에 쉼도 제대로 못 가진 채 제일 먼저 예루살렘 성벽을 둘러보았습니다. 느헤미야는 훼파된 예루살렘 성벽과 성문을 둘러보고,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자고 독려합니다. 그러자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느헤미야의 말에 도전을 받아 힘을 모아 예루살렘성벽을 건축하자고 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다

느헤미야는 이렇게 예루살렘 성벽 공사를 시작하게 되는데, 느헤미야 3장에서 7장까지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느헤미야 3장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한 가문과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면 양문건축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건축한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성벽 건축이 동시에 이루진 것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성벽의 구간 구간을 개인이나 가문이 맡아서 책임지고 성벽을 건설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벽재건에 동참했던 사람들의 직업들도 살펴보면 대제사장을 비롯해 금속 가공업자. 무역업, 노예, 제사장, 어부, 세리 등 무려 열다섯 종류나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여자들까지 참여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다음은 예루살렘 지방 절반을 다스리는 할로헤스의 아들 살룸과 그의 딸들이 중수하였고(느 3:12)”.

여자들이 성벽을 건축하는 일에 참여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이렇듯 예루살렘 성벽은 한 부류의 직업을 가진 사람이, 한 계층의 사람이, 전문가가 재건한 것이 아닙니다. 각기 다양한 직업, 다양한 계층,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이 함께 힘을 합하여 지은 것입니다.

예루살렘 동쪽 성벽을 힘써 중수한 바룩

그리고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하는 명단은 예루살렘성벽 중에서 마지막 남은 동쪽 성벽을 재건한 사람들입니다. 이 동쪽 성벽은 느헤미야가 순찰을 하였을 때 짐승이 지나가지 못할 정도 심하게 파괴된 곳이었습니다. 이 상태였기 때문에 동쪽 성벽을 재건하는 사람들은 다른 지역의 성벽을 재건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동쪽 성벽을 재건한 사람들 가운데 눈에 들어오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바룩입니다. 왜 바룩이라는 사람을 주목해야 해야 하느냐 하면 예루살렘성벽을 재건하는 데 있어서 ‘힘써 중수했다’라는 표현을 바룩에게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삽배의 아들 바룩이 한 부분을 힘써 중수하여 성 굽이에서부터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집 문에 이르렀고(느 3:20)”.

예루살렘 성벽을 각 구간마다 다양한 사람들이 중수했는데 유일하게 바룩에게만 그냥 중수했다고 하지 않았고 “힘써 중수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힘써 중수하였다는 것은 열심을 가지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말씀입니다.

이 바룩은 느헤미야 10장에 보면 제사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이라면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함께 양문을 건축했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바룩은 양문을 건축한 이후에 또 다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개인적으로 예루살렘 동쪽 성벽의 한 부분도 건축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성경은 바룩에게 ‘성벽을 힘써 중수하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룩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예루살렘 성벽 재건공사에 참여하였습니다.

바룩이 재건한 성벽이 다른 사람들이 쌓은 성벽보다 혹시 훌륭하지 않을 수 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바룩의 최선을 보시는 것입니다.

최고보다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

그런데 왜 우리가 최고 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은 결과보다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결과만을 가지고 사람들을 평가할 때가 많습니다. 결과만 좋으면 과정이 어떻게 됐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팽배해져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든 속임수를 쓰든 원하는 것을 이루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결과가 아무리 좋다고 할지라도 그 과정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결과는 그렇게 좋지 않더라도 그 과정에 최선을 다했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바룩은 얼마든지 제사장집안으로 양문만을 건축하고 그만둘 수 있었지만 그는 마지막 남은 동쪽성벽을 건축하는데 남은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은 한달란트 맡은 자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두 달란트 맡은 자와 다섯 달란트 맡은 자는 각각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남겨서 주인이 돌아왔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 맡은 자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받고 있는 것까지도 빼앗겨 버렸습니다.

왜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주인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받았습니까? 주인이 맡긴 한 달란트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땅에 감추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곧 그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왜 주인이 그 종에게 한 달란트만 맡겼을까요? 주인이 그 종이 한 달란트정도 감당할 수 있는 종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한 달란트를 맡기면서 그 종에게 기대했던 것은 그 한 달란트로 최선을 다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종은 그 한 달란트를 땅에다가 감추어 두었고 주인에게 책망을 받게 됩니다. 만일 한 달란트 맡은 자가 최선을 다해 한 달란트를 남겼다면 동일하게 주인에게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맡겨주신 달란트대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지만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가 분명히 다릅니다. 달란트가 다르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과 달란트를 비교할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맡겨주신 달란트대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정과 직장과 사회와 교회가운데 맡겨주신 직책이 있습니다. 그 일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부모는 부모로서 자녀는 자녀로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상사는 상사로서 부하 직원은 부하 직원으로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맡겨주신 직분대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대로 최선을 다할 때 칭찬받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 맡겨주신 것에 대해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신앙생활도 최선을 다해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달리기에서는 모두 금메달을 받을 수 있다

운동경기를 보면 다른 모든 경쟁자를 이겨야지만 금메달을 딸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 운동경기에서는 꼴찌를 해도 금메달을 목에 걸 수 가 있습니다.

비록 꼴찌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 사람의 최선이었다면 하나님은 금메달을 목에 걸어주십니다. 육상 경기에서 100m 달리기를 하면 금메달이 하나 밖에 걸려 있지 않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100m 달리기에는 각 레이스마다 금메달이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레이스에서 최선을 다해 달린 사람은 다 금메달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의 레이스에서 최선을 다해 달리면 우리 모두는 금메달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조금은 막연한 느낌이 듭니다. 나의 최선은 어디까지인지 스스로도 모를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분명한 목표를 정하지 않고서는 내가 최선을 다했는지 안 했는지를 평가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애를 써야 합니다.

한 청년이 왕을 찾아가 인생의 성공 비결을 가르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왕은 말없이 큰 컵에다 물을 가득 채우고 청년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리고 병사를 부르더니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이 청년이 저 물 잔을 들고 시내를 한 바퀴 도는 동안 너는 칼을 들고 이 청년의 뒤를 계속해서 따라가거라. 만약 물을 엎지르거든 당장 목을 내리쳐라!”

청년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 물 잔을 들고 조심조심 시내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다행히 물을 엎지르지 않고 왕에게 까지 왔습니다. 왕은 돌아온 청년에게 시내를 도는 동안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아무것도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다고 했습니다.

왕은 큰 소리로 청년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넌 거리에 있는 걸인도, 장사꾼도,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못보고 술집에서 노래하는 것도 못 들었단 말이냐?”

청년이 왕에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물 잔에 신경을 쓰느라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그렇다, 그것이 앞으로 너의 성공 비결이 될 것이다. 인생의 목표를 확고하게 세우고 일에 집중한다면 어떤 유혹과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최선이 희망의 미래를 열어간다

막연한 목표는 최선을 다하지 못하게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목표는 그 목표에 집중하게 하고 최선을 다하게 합니다. 목표는 미래에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미래에 이루어질 목표를 위해서 지금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미국의 사상가이자 시인인 에머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착각의 하나는 현재는 결정을 내리기엔 가장 애매한 시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하루는 일 년 중의 가장 중요한 날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하루 한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 최선을 다할 수가 없습니다. 목표를 이룰 수 가 없습니다. 안일함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안일함은 사람을 나태하게 만들고,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과거 여러분이 안일하게 살았다면 그로 인해 현재 여러분의 삶은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이 안일하게 살고 있다면 여러분의 미래는 희망보다 근심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현재의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면 희망의 미래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흘러간 오늘은 다시는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오늘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최선을 다한 랜스 암스트롱 이야기

세계 최고의 사이클 선수로 각광 받았던 랜스 암스트롱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세계 최고로 말하는 이유는 단순히 우승을 많이 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는 1996년 사이클 선수로는 치명적인 고환암에 걸렸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의 선수 생명이 끝났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그는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투르 드 프랑스 대회에서 1999년부터 2004년까지 6회 연속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사람들이 암과의 싸움에서 이긴 비결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암이 내 육신을 바꾸어 놓은 것은 아니다. 다만 내 정신을 바꿔놓았을 뿐이다. 암이란 진단을 받기 전의 나는 대단한 게으름뱅이였다. 100%의 노력을 다하지 않고도 상당한 액수의 월급을 받았다. 그것만으로도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나 자신에게 말했다. 내게 다시 한 번만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번에는 정말 올바르게 살겠다. 그리고 나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이상의 어떤 것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

랜스 암스트롱은 나태한 과거를 살았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암이란 판정을 받은 후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오늘 최선을 다했습니다. 바울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바울은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정말 최선을 다해서 사는 사람은 과거를 후회할 시간도 미래를 근심할 시간도 없습니다.

둘째,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물론 하고 싶은 일도 때로 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만 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몰입의 즐거움>의 저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에 따르면 인간의 일상은 생산, 유지, 여가라는 3가지 형태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생산은 근무나 공부 등 새로운 에너지를 만드는 것을 뜻합니다. 유지는 식사나 목욕, 운전, 가사 노동등 기본적인 삶을 영위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여가는 각종 취미활동이나 휴식등 재충전을 위한 활동을 말합니다.

칙센트미하이의 말에 의하면 문제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산과 유지활동에 쓰고 남은 시간을 여가시간으로 사용해야 하는데 여가 시간에 많은 시간을 쏟는다는 것입니다.

분명 생산과 유지를 위해서 재충전의 시간인 ‘여유’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유’의 시간을 그저 시간을 때우거나 허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인터넷 웹서핑이나 컴퓨터게임을 지나치게 많이 합니다. 전화로 오랫동안 잡담을 하고 하루 텔레비전만 몇 시간씩 보는 경우도 많습니다.

분명히 재충전을 위해 여가라는 시간이 필요하지만, 여가라는 이름으로 많은 시간을 그냥 허비한다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곧 해야 할 일을 뒤로 하고 하고 싶은 일만하고서는 최선의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이 선택을 해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 “일어날까, 더 잘까?”로 시작해서 “운동을 할까, 오늘은 건너뛸까?”선택을 합니다. 일찍 일어나야 하는 것은 해야 할 일이고, 더 자고 싶은 것은 하고 싶은 일입니다.

이 둘 중에 여러분은 어떤 것을 선택하십니까?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일찍 일어나는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곧 해야 할 일을 선택해야 합니다.

아침에 조금 더 잔다고 해서 피곤이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늦게 일어남으로 인해서 서둘러야 하고 정신이 없이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면, 힘들지만 “해야 할 일”을 선택하는 것이 마음도 편하고 결과적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것과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그 시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최선을 다하는 삶이 아닙니다.

전설적인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은 경기 도중 부상을 잘 입지 않는 비결이 전력투구를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몸을 사리면 오히려 부상의 위험이 훨씬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전력투구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에 전력투구를 하는 것이 최선을 다하는 삶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최선을 다하다 보면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최고가 아니라 최선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최고가 아니라 최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인생의 레이스가운데 최선을 다하여 달려가면 됩니다. 나에게 맡겨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는 목표를 정해야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는 “인문학 독서를 신앙생활이나 예수님과 연결할 수 있다”며 “글쓰기를 처음 배웠을 때는 폭이 좁다며 혼도 많이 났다”고 말했다. ⓒ이대웅 기자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희망도 습관이다’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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