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nderer Backpack Hike Away Path Mountain Hiking 내리막 오르막 등산 길 하이킹 순례 모험 여정
▲ⓒ픽사베이
본문: 베드로전서 3장 18-22절


목적 설정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미국 부자와 우리나라 부자의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의 부자는 세습이 대부분이다. 삼성, 현대, 엘지, Sk, 롯데 등 5대 재벌 모두 세습이다. 미국은 자수성가형 부자다. 미국 재벌 5위까지는 스스로 일군 기업들이다.

1위는 빌 게이츠다(19년째 1위 자리를 차지 중이며 재산은 660억달러(74조원)). 2위는 워렌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460억달러)이다. 3위는 래리 엘리슨 오라클 최고경영자(410억달러)이다. 공동 4위는 에너지기업 코흐인더스트리의 찰스 코흐 회장과 데이비드 코흐 부회장 형제다(각각 310억 달러)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차이가 있다. 마음가짐을 어떻게 갖고 있느냐다. 바리새인의 자기를 드러내고자 한다. 세리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은 자기의 의를 아래와 같이 드러낸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1-12절).”

세리는 자기를 드러내기보다 자기의 부족함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낸다. 그저 하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청할 뿐이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절).”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람이다.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마음은 육체에 감추어져 있다. 나무의 뿌리도 땅 속에 감추어져 있다. 마음이 인간을 이끌고 간다. 뿌리가 나무의 생존을 좌우한다.

우리나라 교육은 두 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는 공교육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사교육이다. 나라가 바로 되려면 공교육이 살아야 한다. 현실은 사교욱에 의해 밀렸다. 거의 유명무실해져 있다.

그래서 생긴 것이 대안교육이다. 공교육은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는 암송 위주 교육이다. 대안 교육은 학생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창의성 위주의 교육이다.

최근 광주에 있는 ‘기독 혁신대안학교’를 다녀왔다. 기독 혁신대안학교도 암송 위주 대신 창의적 독서 교육을 하고 있었다. 교사가 아니라 학생이 주도적으로 공부를 하는 시스템이었다.

기독 혁신대안학교는 1년에 100권을 독서하도록 한다. 그 학교는 독서 교육에 그치지 않았다. 요리를 통해 인성을 함양한다. 더 놀라운 것은 미술교육의 강조였다.

기독 혁신대안학교를 깊이 들어가 보기 전까지는 대안학교가 왜 중요한지 잘 몰랐다. 이번 방문을 기회로, 창의적 교육을 할 수 있는 곳은 대안학교임을 알았다. 기독 혁신대안학교를 통해, 대안학교가 비록 작지만 한국의 미래, 교육의 미래, 교회의 미래를 볼 수 있었다.

위 세 이야기인 미국 부자와 우리나라의 부자의 차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차이, 공교육과 대안학교 교육의 차이를 통해, 목적 설정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이 세 가지 이야기에서 두드러지게 발생하는 차이는 ‘목적을 어떻게 설정했느냐?’에 따라 결정됨을 알 수 있다.

인생은 목적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배웠다. 직장생활에서도 어느 정도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한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목적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자기의 유익인가? 즉 천국을 가기 위해서인가? 공동체의 유익을 도모하기 위해서인가?

신앙생활의 목적은 나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익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자기 유익임을 알 수 있다. 오늘 어떤 글을 보니 작은 교회 목회자들의 생활이 ‘빈곤층’이란다. 이런 문제는 교회가 책임을 져주어야 한다.

대형교회들은 세습이나 건물 짓기 등에 바쁘다. 전혀 생활이 되지 않는 교회에 무관심하다. 이는 교회가 자기 유익을 추구함을 말해준다. 바리새인이 자기 의를 드러낸다. 이와 별 다를 바가 못 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유익을 추구하는 곳이다. 하나님의 유익을 추구하면 자기 유익보다는 건전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몸부림친다. 현실은 세습 등을 통해 자신의 유익을 극대화하기에 여념이 없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생활의 목적이 일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균형 잡힌 삶과 신앙이 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 목적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취하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내어주는 것’이다. 최근에 논란이 된 명성교회의 세습은 내어줌이 아니라 취함을 볼 수 있다. 만약 명성교회가 세습을 취소한다면 이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정신, 즉 내어줌이 그 목적이 된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을 보라. 예수님은 취하지 않으셨다. 자신을 죽기까지 내어주셨다. 자신의 영광을 취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다. 오늘 18절에서 그것을 분명하게 말씀한다. 그것도 불의한 자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

예수님께서 내어주시는 삶을 살았다면 우리도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최근 중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이 추방당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중국이 자기들 사상만 취함을 세계에 천명한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선교사가 주로 추방되었다고 한다. 선교사 5,000명 중 2,000명이 추방당했다고 하니 실로 엄청나다.

중국만 그런 것이 아니다. 교회도 내어주기보다는 취함을 위해 살아간다. 이런 사람은 성경에도 무수히 많이 나온다. 불평 덩어리였던 광야의 이스라엘이 대표적이다.

변화되기 전의 모세도 예외가 아니었다. 모세는 애굽 왕궁에 있을 때 자기 이익 취함을 위해 살아갔다. 그 결과 미디안 땅으로 도망가 살아야 했다.

반면, 다윗은 취함이 아니라 내어줌으로 살아갔다. 다윗은 자기 이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취했다. 다윗이 사울을 동굴에서 죽일 수 있는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분명해야 한다. 자기 유익을 취하기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려면 가장 먼저 할 일이 있다. 자기 것을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와같이 자기를 내어주는 목적으로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은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살아간다

현실은 어떤가? 그리스도인이 현실은 더 많은 욕망을 취하기 위해 살아간다. 이런 인간의 모습을 냉철하게 분석한 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이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

“인간은 길을 찾을 수 있는 지도는 가지고 있지만, 정작 자기 집 주소를 모른다.”

인간이 주소를 갖고도 집을 왜 못 찾는가? 욕망을 채우려다 보니 제 정신이 아닌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도 별반 다르지 않다. 교회가 급속하게 쇠퇴하고 있다. 가장 큰 쇠퇴가 젊은층의 쇠퇴다. 30대 이하 젊은 세대들이 교회를 급속하게 떠나가고 있다.

교회 내에 유초등부와 중고등부 자체가 아예 없는 교회들이 속출하고 있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고등부가 없는 교회 48%, 중등부가 없는 교회 47%, 초등부가 없는 교회 47%, 유년부가 없는 교회 47%, 유치부가 없는 교회 57%, 유아부가 없는 교회 97.4%, 영아부가 없는 교회가 78.5% 정도라고 한다.

왜 이런 상상할 수 없는 성적표를 받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채우지 않고,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 했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이나 교인들이 하나님을 위한 헌신도가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다.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시간 사용이 확 줄었다. 예수님은 달랐다. 사도 바울도 달랐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한 헌신이 특별한 열심이었다. 예수님은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다(19절). 바울은 죽을 위기를 아주 많이 넘겨야 했다. 이런 헌신이 기독교의 뿌리가 되어주었다. 미국 청교도의 헌신이 기독교가 미국에서 주류 계급을 이루도록 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하나님은 ‘했더라면’이 아니라 ‘함께라면’의 그리스도인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한 사람은 찾으신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욕망을 채우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 것을 내어주는 사람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고자 하는 사람이다.

세상에 가장 맛없는 라면이 있다고 한다. ‘했더라면’이다. 반대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이 있다고 한다. ‘함께라면’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인 ‘함께라면’이어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함께라면’이어야 한다. 반대로 ‘했더라면’이면 안 된다. ‘했더라면’은 삶의 정체성을 영원히 미궁에 빠뜨린다.

하나님만 ‘함께라면’을 찾지 않는다. 세상도 ‘함께라면’을 찾는다. 《명심보감》에 ‘급난지붕(急難之朋)’ 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급(急)하고 어려울(難) 때 힘이 되어주는 친구(朋)’라는 뜻이다.

‘주식형제천개유(酒食兄弟千個有)’ 술먹고 밥 먹을 때 형, 동생 하는 친구는 천 명이나 있지만, ‘급난지붕일개무(急難之朋一個無)’, 급하고 어려울 때 막상 나를 도와주는 친구는 한 명도 없다고 말한다.

서로 자기 이익만 채우려고 하니 막상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저도 최근 사람들이 자기 이익만 취함을 경험했다.

급난지붕일개무(急難之朋一個無)로 만들고 있지 않는가?

최근에 모 신학대학에서 ‘인문학과 설교’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인도했다. 학교 측의 배려로 출간된 책을 팔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꿔다 놓은 보릿자루’와 다름없는 이들에게 책을 팔고자 했더니 거의 팔지 못했다. ‘급난지붕일개무(急難之朋一個無)’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었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이런 일은 10년 전에도 겪었다. 당시 먹고 사는 문제가 급박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있다. 그 때도 주위 사람들이 ‘급난지붕일개무(急難之朋一個無)’였다. 이런 것을 겪은 뒤 절박함으로 독서해 지금의 제가 되었다.

저는 주위 사람들에게 길을 열어주고자 한다. 무턱대고는 아니지만, 가능하면 도움을 주고자 한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삶의 목적이 내어줌이 아니라 취함이었음을 또 다시 절감했다.

친구가 중국에서 나온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재교육을 하고 있다. 재교육 중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한국에 나온 선교사들의 상태가 마치 ‘모라토리엄’ 상태다.” ‘모라토리엄’이란 말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지자체)가 외부에서 빌린 돈에 대해 일방적으로 만기에 상환을 미루는 행위를 통칭한다.

친구의 말에 따르면 중국 선교를 하면서, 돌발 변수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아마 소수가 그럴 것이다.

문제는 그렇다면 한국에 나와서도 다음 사역을 위한 준비보다는 시간을 죽이며 살고 있지 않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상태가 ‘모라토리엄’ 같다면, 절박함으로 하루하루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 쓰임을 받을 수 있도록 몸부림쳐야 한다. 몸부림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를 내어주는 삶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삶의 목적이 분명하셨다

위와 같은 현상이 왜 일어나는가? 삶의 목적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같이, 삶의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한 삶의 목적이 분명하셨다.

18-19절을 쉬운 성경으로 읽어보면 아래와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한 번의 죽으심으로 여러분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죄가 없는 분이시지만 죄인을 대신하여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 모두를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육체는 죽었지만 성령 안에서 다시 살아나셔서, 갇혀 있는 영혼을 찾아가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목적이 분명한다.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뿐만 아니라 죽은 뒤에도 성령 안에서 다시 살아나셔서, 갇혀 있는 영혼을 찾아가 말씀을 전하시기 위함이다. 이는 하나님을 위함이셨다.

예수님은 이런 숭고한 삶의 목적으로 인해 십자가에 죽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셨다. 만약 우리가 숭고한 목적 수행에 주저한다면 이는 목적이 하나님을 위한 것에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 성취여야 한다. 하나님의 뜻 성취가 분명할 때 그리스도인답게 살수 있다.

하나님을 위한 목적이 그리스도인답게 살게 한다

그럼 왜 하나님을 위한 목적을 가질 때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인답게 살게 하는가?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 기뻐하신다.

김진혁 횃불트리니티 교수는 그의 책 《질문하는 신학》에서 하나님의 뜻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의 뜻은 추상적인 하나님의 계획이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바라시고 사랑하시는 무엇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설정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 수 있다. 대부분 인간은 욕망을 향한다. 그 욕망의 끝은 죄이다. 아담과 하와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뱀의 유혹을 받아들었다.

최근에 강남권 집값이 폭등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을 취함 때문이다. 강남권 어느 아파트는 10억 가까이 올랐다고 한다. 추악한 인간의 욕망의 대열에 기독교인은 예외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피로 사회’가 아니라 ‘평안 사회’를 만드셨다

한국 사회를 ‘피로 사회’라고 진단한 학자가 있다. 바로 독일 베를린예술대학교의 한병철 교수다. 그는 그의 책 《피로사회》에서 성과주의에 빠진 현대사회를 피로 사회라고 규정했다. 성과중심적인 현대 사회의 만성 질병이 ‘피로’라고 말한다.

그럼 그리스도인들은 ‘피로 사회’를 만드는 데 예외인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도 한국 사회를 ‘피로 사회’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만드신 나라인 하나님 나라는 ‘피로 사회’가 아니다. 도리어 ‘평안 사회’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피로가 아니라 평안을 주신다. 평안을 주시니 피로사회가 될 수 없다. 오직 평안 사회만 된다.

우리가 삶의 목적을 설정할 때 설정 기준이 있어야 한다. 바로 하나님의 목적을 기준으로 설정해야 한다. 인간의 욕망을 목적으로 설정하면 평안이 아니라 피로와 차별, 그리고 불만이 가득한 사회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겠다고 하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요16:33)”, 복음성가 중에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로 시작하는 찬양이 있다.

평안을 주시는 이유가 있다. 평안의 주님 안으로 들어오라는 사인이다. 피로와 차별 그리고 불만이 가득한 사회가 아니라 생명이 풍성한 하나님나라로 들어오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이 오신 목적이 생명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이젠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답게 살게 한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야 한다

평안을 누리거나, 하나님의 생명을 얻으려면 한 가지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의 목적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세상이 하나님을 평가하는 기준이 있다. 바로 사랑이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사랑에 의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평가받는다.

인간도 사랑에 의해 평가받는다고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도 말했다.

“인간은 그가 알고 있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 오로지 사랑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 선한 사람은 그를 선하게 만들고, 악한 사람은 그를 악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야 한다. 더 나아가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들어가려면 먼저 알 것이 있다. 하나님이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한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에릭 밀러-화이트(Eric Milner-White, 1884-1964)는 1954년에 출간한 책 《나의 하나님 나의 영광》이라는 기도모음집에서 〈하나님에 대해 배워가기〉에 다음과 같이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게 하소서/ 절대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며/ 내게 무엇이 최선인지 나보다 더 잘 아시는 분께/ 훌륭한 아버지가 자녀가 선하게 자라도록/ 필요한 것들, 유익한 것들/ 지혜롭고, 유용하고, 행복한 모든 것들을/ 헤아릴 수 없는 방식으로 한 번에 베푸시는 분께.”

하나님은 변치 않는 분이시다. 내게 무엇이 최선인지 나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 유익한 것들, 지혜롭고, 유용하고, 행복한 모든 것들을 한 번에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는 이런 좋으신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고 신앙생활 해야 한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 때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을 알면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을 살고 신앙생활하면 주어지는 선물이 있다. 바로 열매다. 열매의 특징이 있다. 열매를 그 다음해 또 맺는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에 의해 맺여 진 열매는 삶의 선순환을 가져다준다.

우리가 죄악을 가까이하면 삶이 악순환이 만들어진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삶이 선순환을 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한 삶의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목적이 분명하면 삶에 악순환이 아니라 선순환을 만들어진다. 선순환이란 다름 아닌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삶을 말한다.

뉴욕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 하는 지용훈 목사가 쓴 책이 《말씀사수》다. 그 책에서 ‘열매’를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열매는 일시적인 배부름과 지속적인 배부름을 동시에 가져다준다. 배고픈 자에게는 당장의 먹거리가 되어주기도 하고, 열매를 먹고 남겨진 씨를 심으면 또 다른 나무들이 생겨 수많은 열매를 맺게 한다.”

한 마디로 열매는 선순환을 가져다준다. 사람을 먹이고 자연의 공기를 맑게 하고 또 다른 사람을 먹이고 자원으로 활용된다. 언제나 하나님에 의해 맺어진 열매가 선순환을 가져다준다. 그럼 우리 삶도 선순환을 이룬다.

말씀은 선순환을 만든다

선순환을 이루는 가장 큰 힘은 말씀에서 나온다. 하지만 교회는 말씀보다는 외면 확장에 더 열을 올린다. 대구 성은교회 오세원 목사와 함께 포항의 〈성목회연구원〉에 강의하러 갔다가 대구로 가는 도중에 큰 교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 중 한 교회를 들렀다. 엄청 큰 건물이었다. 그 때 그런 생각을 한 적 있다. 교인 수에 비해 큰 교회는 하나님께 낭비가 아닌가?

종종 지방에 강의를 갈 때마다 덩치가 큰 교회들을 많이 만난다. 그럴 때 마다 건물 활용에 선순환을 이루는지 악순환을 이루는지 궁금해진다. 만약 활용이 되지 않는다면 이는 병목현상이 발생해 교통 체증과 같이 악순환을 이룬다.

그리스도인은 외적인 확장이 아니라 내면을 성장을 추구해야 한다. 내적인 것 중 최고는 말씀 묵상이다. 그리스도인은 말씀 묵상에 달인이 되어야 한다. 말씀은 언제나 선순환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선순환을 만드는데 대표가 되신다. 예수님이 만드신 것 중 최고는 생명이시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음으로 죽어야 마땅한 인간들이 생명을 얻게 되었다.

생명이 특징이 있다. 생명은 선순환을 이룬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가까이 해야 한다. 야고보서 기자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라(약 4:8)”라고 말했다. 시편 기자는 한 발 더 나아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시 73:28)”라고 말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한다. 그럴 때 저절로 선순환을 이루기 때문이다.

선순환의 삶을 살려면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그럼 선순환의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20절에서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복종하기 않았기에, 구원을 받은 자가 극소수였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복종해 십자가에 죽은 것 같이 22절에서 천사들과 권세 자들과 능력들이 예수님께 복종한 것과 같이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께 복종하며 사는 이유가 있다. ‘한탄’의 상황을 ‘감탄’으로 바꾸어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을 근심하기 때문이다. 즉 근심보따리를 들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웃음보따리로 살기 위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럼 하나님께서 ‘한탄’의 상황을 순식간에 ‘감탄’의 상황으로 바꾸어주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은 십자가여야 한다

삶은 ‘어떻게 살 것인가?’다. 나아가 ‘누구와 살 것인가?’다. 예수와 함께 살면 ‘한탄’이 아니라 ‘감탄’하며 살게 된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100% ‘감탄’의 삶으로 넘쳐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중심에 십자가를 두어야 한다. 십자가를 둘 때 삶이 ‘한탄’이 아니라 ‘감탄’으로 만들어진다.

인간의 가장 큰 근심은 영혼의 문제다. ‘사후의 나는?’ 이다. 이를 십자가에서 일시에 날려버려야 한다.

《피가로의 결혼》에 주인공 피가로가 한 말이 있다. “백작님 당신은 귀족이십니다. 게다가 직위도 높으시며 재산도 많으십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얻기 위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저 태어나신 일 밖에 더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삶도 백작과 별반 다르지 않다. 별로 한 것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제2의 탄생을 했다. 십자가에 복종함으로 제2의 탄생을 선물로 받았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십자가를 중심에 두는 삶을 살아야 한다. 삶의 목적이 십자가여야 한다. 그럼 우리의 삶은 육을 위해 살지 않는다. 영을 위해 살게 된다(18절).

하나님의 영을 위해 살게 될 때, 저절로 하나님께 순종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순종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면 순종함으로 살아야 한다. 순종할 때 삶의 목적은 나의 뜻 취함이 아니라, 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림이란 목적이 분명한 삶을 살게 된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도인 목사
아트설교연구원 대표
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