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샘교회 류한승 AMCM
▲움직이는 교회 AMCM 활동중인 생명샘교회 교우들. ⓒ교회 제공
1. 가을은 열매의 계절이지만 비움의 계절입니다.

벼는 알곡이 채워질수록, 고개를 숙입니다. 뻣뻣한 벼일수록 고개는 올라갑니다.

감나무에도 열매가 열립니다. 열매가 달린 가지는 모두 자신의 위치를 더 내립니다. 열매가 열렸던 가지들은 가지치기에 기꺼이 자기 몸을 내어줌으로 이듬해를 준비하고, 다른 가지들에게 열매맺힐 기회를 줍니다.

벼는 그래서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나무의 가치는 앙상함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아름답습니다. 존재의 가치가 유지될 수 있음은, 나무가 나무되기 위해 자기를 비우기 때문입니다.

2.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들어갑니다. 그렇게 투자한 만큼, 세상은 대가를 지불합니다. 세상이 지불한 가치가 곧 나의 가치가 되는 듯 합니다.

지불한 가치는 소유함이 되어, 형성된 기형적 존재들이 세계관을 형성하고 룰을 만듭니다. 존재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가치는 소유로 뒤덮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한 가지를 모릅니다. 한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하나만을 파는 것입니다. 대학교 내의 전공만 해도 140여개인 세상에서, 하나를 더 깊게 안다는 것은 그만큼 비워내지 않으면 나머지를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비우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3. 돌아보면 인간만이 ‘떨굼’의 가치를 모릅니다.

왜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여야 하고 알곡을 털어내야 하는지, 왜 나무들은 열매를 바닥에 사정없이 떨궈내야 하는지, 깊이 숙고하지 않으면, 자신을 비워내기란 불가능합니다. 자기 비움 없이, 내년에 열릴 신선한 열매라는 다른 채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를 비우지 않으면 그 열매는 반드시 썩고, 나무마저 병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존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4. 우리는 타인을 소유하고자 합니다. 존재로부터 시작한 관계가 어느덧 소유함이 목적이 됩니다. 쓸모 있는 사람, 쓸모 없는 사람으로 구별되어 내가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저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행복의 가치, 존재가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녀를 보면서 부모인 나만 소유하기를 바라는 어른의 모습은 자녀에게만 허락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인생을 부인하는 것은 물론, 내 자녀니까 내 소유처럼 여겨 꿈을 설계하고 인생 설계를 해주는 부모가 되어 자신의 존재도 상실하게 만듭니다.

나무가 모두에게 기쁨일 수 있는 것은 나무가 나무됨으로 기쁩니다. 존재는 존재로 기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내 존재의 위치가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존재는 위치와 영향이 있습니다. ‘내가 어디 서 있어야 하는가?’는 하나님이 태초의 인간에게 묻는 질문이었던 이유입니다.

5. 사람이 어디에 있을때 가장 행복할까요? 시편 149편은 2절에서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이로 말미암아(in) 즐거워한다고 말합니다.

존재를 만들어주신 하나님의 존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존재와 존재의 사랑하는 방법이고, 그것이 참된 기쁨입니다.

이것을 하나님 안에서라고, 영어 성경이 표현합니다. ‘위치의 설정’입니다.

6. 위치가 바로 서 있는 자는 감사의 태도가 바뀝니다. 소유에 대한 감사가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의 소유됨이 기쁨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내어주는 것입니다. 기꺼이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됨이 기쁨이라고 표현될 수 있습니다. 본래 그것이 우리 위치니까요. 하나님 안에 거하는 내가 될 때, 기쁨이 회복됩니다.

7. 상담은 들어주는 것, 경청의 자세가 없으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습니다.

경청한다는 것은 자기를 멈추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말, 해야할 말, 모든 것을 멈추고 완전히 자기를 비워 그 사람의 인생을 내 것인양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비우지 못하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분명히 듣기는 듣는데, 귀로 듣는 순간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자기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것을 버리는 것이 인간을 이해하는 시작입니다.

8. 빛과 어둠이 한날에 있는 것처럼, 어둠은 교묘하게 우리 곁에 상존합니다. 위치가 우리의 행복의 기준이라면, 사탄의 공격은 간단합니다.

소유의 위치를 바꾸는 것입니다.
존재의 위치를 바꾸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소유 됨이 아니라, 소유함을 행복이라고 가르칩니다.

회사에서 나의 가치를 잘 인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저 일하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던 첫 마음이 사라져, 어느덧 불만이 생깁니다.

일해주는 사람이 있어주는 것만으로 고마웠는데, 어느덧 ‘일처리를 잘하지 못해서’ 불만이 생깁니다.

태어나줘서 고마웠던 자녀가, 성적이 엉망이 되면서 불안해집니다.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가장 행복했던 부모님이, 용돈을 주지 않아서 불편해집니다. 밖에서 놀게 해주지 않으니 불만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존재를 소유로 덮어버립니다.

9. 하나님의 기쁨은 어디있는가에 대해, 시편 기자는 시편 149편 4절에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하나님의 기쁨이 어디 있는가에 대해, 영어 성경은 ‘in’이라는 전치사를 사용했습니다. 놀랍게도 잃어버린 존재의 가치를,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우리의 소유되심으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10.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위치에 있고 싶으십니까?

타인을 소유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십니까. 왜 자꾸 안이 아니라, 밖에서 행복을 찾으십니까. 세상이 만든 여러분의 가치를 왜 믿고 따르십니까.

행복은 우리의 존재를 누군가를 위한 소유됨으로 기꺼이 버릴 수 있을 때 찾아옵니다. 그것을 위해 나를 떨구고, 자발적으로 소유를 내려놓음으로 존재는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11.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소유를 탐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기꺼이 소유를 내어줍니다.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내어 주었더니(눅 15:12)”.

아들은 집 밖으로 갑니다. 밖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서 소유를 탕진합니다.

아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배가 고팠을 때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품을 생각합니다. 문제는 아들은 여전히 소유에 목말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돌이켜 말하기를 ‘아버지 집에는 밥이 있잖아!’” 그래서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격하시킵니다. 종이 되기로 말입니다. 소유 때문에 자신의 존재가 망가진 것입니다.

12. 아버지는 아직 거리가 먼데 아들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오는 모습을 보자, 아들이 아닌 아버지가 달려갑니다. 아버지가 아들 안으로 간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 안으로 갔기 때문에, 아들이 아버지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아들은 밖으로 가는데, 아버지는 안으로 갑니다. 아들이 자신의 망가진 위치를 자랑하듯, 아버지 아들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놀랍게도 그 무너진 존재의 회복을, 아버지는 당신의 소유를 완전히 내어줌으로 해결합니다. “제일 좋은 옷 내어와라. 손에 반지를 끼워줘라.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송아지를 잡아라. 우리 동네 잔치 열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존재의 위치를 바로잡습니다. “내 아들이다(눅 15:24)”.

13. 둘째 아들뿐 아닙니다.

아버지 안에 있다고 생각했던 첫째 아들은 그에 대해 분통이 났습니다. 첫째 아들은 외형적으로 아버지 안에 있었지만, 그는 사실 소유에 대한 욕심때문에 있던 것입니다(눅 15:29-30).

그런 첫째 아들에게 아버지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야.” 모든 것을 여전히 아낌없이 버립니다.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아니 본래 위치의 회복을 위해서, 본래 존재를 위해서 아버지는 오늘도 아낌없이 자기 소유를 버리셨습니다.

14. 그것이 복음입니다.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마 13:46)”,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시지요? 그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해 자기 모든 소유를 버리신 분입니다. 그 예수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복음은 소유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소유를 내려놓는 사람만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소유를 아낌없이 주시는 분임을 만나게 되고, 행복을 찾게 됩니다. 참된 행복은 바른 위치에 있음을 꺠닫게 됩니다.

15. 지난 토요일, 저희 교회에서는 AMCM으로 경북 상주를 향해 많은 교우들이 떠났습니다. 선발대와 후발대까지 교회 차와 개인 차량으로 그곳 한 교회에 가서 지역 전도와 함께 예배함의 기쁨이 있었습니다.

오후 3시경 서울로 돌아왔지만, 가을 단풍여행 막바지 시간이라 그런지 대부분 9시에 도착했습니다. 돌아온 성도들의 면면을 대할 때마다,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교우들의 심령 가운데, 기쁨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교우들을 잠시 떠나보내고 난 생명샘교회는, 한 주뿐이지만 휑한 모습이었습니다. 아이들의 시끄러운 목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청년들도 5-6명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불만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길, 각자 다른 차들을 타고 올라오는데 비가 많이 왔습니다. 비가 오니 안전운전하고 격려하는 AMCM 단체채팅창에 권사님이 이렇게 글을 남기셨습니다.

“네 잘 가고 있습니다. 비가 많이 옵니다. 안전운전 아시죠. 모두 고생많았습니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너무 기쁜 것, 나 혼자만 아니겠지요. 모두 사랑합니다. 오직 예수.”

16. 움직이는 교회운동을 통해 다른 교회를 돕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를 위해 여러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이유는, 제가 우리 교우들을 정말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제게 맡겨진 교우들이 저의 소유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아가 교회가 교회됨은, 철저히 자기를 비워야 함을 깨닫지 못하면 썩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추수감사주일을 생명샘교회가 아닌, 타 교회와 함께 기쁨을 공유하기 위해 종교개혁주일에 추수감사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주님을 섬기는 교회와 연합하고 예배드림은 나와 너, 우리 위치를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위치를 회복하는 것은 사실 생명샘 교회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17.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 내려놓지 못한 것이 있으십니까? 그래서 불안하고 불행한 것임을 잊지 마세요.

자신의 소유를 땅에 흘려보내지 않는 사람은, 언제나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귀한 존재를 소유로 덮어버리지 마십시오.

소유하고 싶은 그 마음을 인정하세요. 아직도 내 가지에 열매를 매달리게 하고 떨어지지 못하게 안간힘을 쓰느라 불행해지고 썩어가고 있는, 그래서 고개마저 뻣뻣해진 나무가 되지 말고, 아낌없이 버릴 때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십시오.

누군가를 소유함이 아니라 누군가의 소유됨이 기쁨 되기를, 그래서 아낌없이 오늘 내 하나 남은 욕심을 버림으로 채워짐의 기쁨이 있기를, 그래서 존재가 회복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