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보리울의 달
▲만화 <한서 남궁억> 中.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키아츠 제공
한 번은 백정 일을 하는 조천만이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교회에 인도되어 나왔다.

남궁억은 그를 위해 기도했다.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조천만 씨는 오늘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정성껏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배당 안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신분의 차별이 분명하던 시절이었기에 신분이 천한 사람에게는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남궁억은 백정 조천만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썼던 것이다.

“장로님, 저런 비천한 사람에게 존댓말을 쓰시면 우리 양반들의 체면이 어찌 됩니까.”

잘 차려입은 어떤 영감의 말에 남궁억이 대꾸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합니다. 더 이상 빈부귀천을 따져서는 안 됩니다. 누가 좋아서 그런 일을 합니까. 모든 직업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백정이 없으면 누가 그 힘든 일을 합니까. 아무 일도 안 하고 놀며 먹는 사람보다는 무슨 일이라도 열심히 하는 사람이 더 귀합니다.”

“그러려거든 장로님 혼자서 다 하십시오. 우린 저런 사람과 함께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에게 따스한 사랑을 평등하게 베푸십니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우리 민족을 함께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해줍니까? 일본놈들이 해준답니까?”

남궁억의 사려 깊은 말에 그 양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불만을 가졌던 사람들도 차츰 진리를 깨닫고는 오히려 더 존경했다.

남궁억은 눈앞의 작은 이해관계보다는 항상 우리 민족 전체의 행복을 먼저 생각했다.

어느 날, 남궁억은 연희전문학교의 졸업식에서 축사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때는 2월 초순이라 추운데 그는 보리울에서 서울의 연희전문학교까지 1백 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사흘 내내 걸어서 갔다.

“선생님, 차를 타고 가시죠.”

제자의 권유에 남궁억은 대꾸했다.

“우리 손으로 차를 만들면 그때나 가서 타세. 일본이 만든 차를 타느니 걷는 게 더 마음 편하네.”

남궁억은 국산품을 애용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스스로 앞장서 실천했다. 조선을 점령한 일본은 자기네들이 만든 각종 생활용품을 한반도로 들여보냈다. 신발에서 라디오와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편리하고 실용적인 물품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당시 많은 지도자들과 돈 많은 사람들이 일본을 욕하면서도 개화 바람을 강조하며 그런 외제 물건들을 선호했다.

남궁억 역시 개화를 강조하고 또 일본의 신제품이 편리하다는 것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우리 제품을 애용하지 않으면 우리 산업이 발전할 수 없으며, 언제까지나 일본에 예속된다.’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좀 허술하고 불편한 점을 감수하고라도 국산품을 아껴 썼던 것이다.

또한 수많은 백성들이 가난에 빠져 겨우 연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사치를 멀리하고 검소하게 생활했다. 수많은 지도자들이 양복에 고급 외투를 걸치고 번쩍거리는 가죽 구두를 신고 다녔지만, 남궁억은 한결같이 무명 옷에 흰 고무신이나 짚신을 신고 다녔다.

얼마나 검박했던지 십전짜리 밀짚모자가 떨어지면 깁고 또 기워서 10년을 넘게 쓰고 다닐 정도였다. 그건 결코 가난하다거나 성격이 좀스러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검소하게 살면서도 자기 자신의 재산을 선뜻 털어내어 학교를 짓고 가난한 학생들과 마을 사람들을 무료로 가르친 사람이었다.

보리울의 달 한서 남궁억
▲소설 <보리울의 달> 저자 김영권, 제작 키아츠 <보리울의 달>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소설화된 파란만장한 인생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도록 안내한다. 만화 <한서 남궁억>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한서 남궁억>은 남궁억 선생의 위대하고도 큰 뜻을 남녀노소 모든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화로 표현한 책이다. 남궁억 선생이 여러 등장인물과 역사를 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실감나고 흥미롭게 담겨 있다.
남궁억은 고무신을 신은 채 그 먼 길을 걸어 놀미재를 넘고 설악을 거쳐 청평까지 꼬박 밤낮을 걸었다. 청평에서 하루를 묵고 경성에 도착하니 해는 이미 서산에 기울고 있었다.

다음날 그는 연희전문학교로 갔다. 차례가 되자 귀빈석의 그 많은 참석자 가운데 유일하게 하얀 한복을 입은 남궁억이 일어섰다. 그는 학생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내가 우리 집에서 여러분을 보려고 놀미재라는 높은 고개를 넘을 때, 무릎이 묻히는 눈길을 걸어오면서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만 따라오다가 개울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길이 아닌 곳으로 발자국이 났으므로 나는 그 자국을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내가 잘 아는 산길이기 때문에 원래의 길을 찾아서 생 눈을 뚫고 발자국을 내어 내 뒤에 오는 사람은 바른 자국을 따라오도록 한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서 여러분만큼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한 면에 하나 있을까말까 한 정도입니다. 이제 교문을 나서는 여러분들이 옮겨야 할 발길의 방향은 어디입니까? 목자도 없이 방황하는 어린 양들을 구하러 우리 고향인 농촌으로 가지 않으시렵니까? 강자를 도와 부질없는 권세에 만족해 할 것이 아니라, 약자를 살려 같이 강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여러분에게 간절히 부탁합니다. 내가 산속의 눈길을 걸을 때 생 눈을 뚫고 원래 길을 찾아 걸은 것처럼, 여러분이 바로 걸어야 뒤에 따르는 사람도 바른 길을 걸을 것이니 아무쪼록 본래의 갈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연설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와 오래도록 이어졌다.

민족을 위해 일할 젊은 인재들을 격려하기 위해 그는 늙은 몸을 이끌고 먼 길을 걷는 고생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민족의 인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어느 날, 유리봉에서 기도를 마친 그는 노랫말을 하나 지었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동산에 할 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금일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 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곡식 익어 거둘 때니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날에 일 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삼천리 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 강산에 일하러 가세”

이 노래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가 우리 민족을 위해 일을 할 여러 분야의 인재들을 일떠서게 했다. 또한 ‘일하러 가세’라는 제목으로 찬송가에 편입되어 교회에서 가장 애창되는 노래가 되었다.

얼마 후 일본에 의해 금지곡이 되었지만, 이미 찬송가에 수록되었기 때문에 신자들이 부르는 것까지 쉽사리 막을 수는 없었다.

김영권 남궁억
▲본지에 <꽃불 영혼>에 이어 <보리울의 달>을 연재하고 있는 김영권 작가.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지 원고 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成功狂人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보리울의 달>,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