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부패가 만연한 작금의 교계를 보며, 사람들은 교회사의 고비마다 등장했던 신앙 영웅의 출현을 고대하는 듯하다. 기다림에 지친 어떤 이는 ‘그 많던 영웅들은 대체 다 어디로 갔는가?’라며 불평을 쏟아놓는다. 영웅의 등장이 작금의 교회 오염들을 단번에 정화시켜 줄 청량제 역할을 해 주리라는 염원 때문이다.

그러나 ‘난세영웅(亂世英雄)’이라는 말 그대로, 평안의 시대에는 영웅의 출현이 없다. 일반 역사도 그렇지만, 교회사의 영웅들 역시 모두 ‘난세의 결과물’이다. 평안의 때는 사람들에게서 영적 긴장과 예민성이 사라져, ‘너나할 것 없이’ 모두 나태와 안일에 매몰돼 범상화(凡常化) 돼버리기 때문이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이 신사참배로 투옥됐다가 출감한 후 자신의 영적 민감성이 약화됨을 자각하곤, “날 다시 여수 교도소로 보내주소서”라고 기도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평안의 시대에는 예외 없이 깨어있기가 어려우며 나아가, 영적 탁월성이 드러나기도 어렵다는 것을 반증해 준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특정 시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주전 8세기 선민 이스라엘을 향해 “그들은 포도나무 소출이 풍성할수록 제단을 많게 하고 우상을 아름답게 꾸몄다(호 10:1)”는 호세아 선지자의 탄식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번성과 평안을 구가할수록 죄인들이 하는 짓거리란 대개 그런 것들이었다.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잠 30:9)”라는 지혜자의 고민에서도 같은 심정이 발견된다.

사도 바울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 5:3)”고 경고한 한 것은 평안이 주는 안일함에 빠져 준비 없이 맞게 될 종말의 영적 상황을 내다 본 때문이다.

예수님의 열 처녀 비유에서도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다섯 처녀나 기름을 준비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나 예외 없이 모두 “다 졸며 잔(마 25:5)”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모두, 환경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연약성들을 적시(摘示)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때때로 어려움을 주시는 것은 이런 나태함을 깨우기 위한 것이다.

◈걸물? 일단 의심하고 볼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평안한 범상(凡常)의 때에 걸물(傑物)이 ‘짠’ 하고 등장하는 일은 거의 없다.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그건 그야말로 범상한 일이 아니니 주의해 봐야 한다. 그들 중에는 필시 음흉한 야욕을 품고 나오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개 시대의 첨예한 요구인 ‘경건과 도덕’을 무기로 들고 나오기에 대중들의 환호를 받는다. 그렇게 해야만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어 그의 의도대로 사람들을 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고후 11:14)” 이유도 이 때문이며, 이단의 수괴들 역시 이런 사단을 모방하여 경건하고 도덕적인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필자는 수년 전, 사람들로부터 예수 비스무리하다고(?) 환호를 받던 한 사람을 알고 있다. 성도들의 헌금 전액은 고아원이나 자선단체에 다 기부하며 자신의 무욕(無慾)함을 드러냈다. 항상 허름한 점퍼 차림으로 다니며 입은 옷 그대로 설교하고, 설교를 마치면 그대로 곧장 지게를 지고 산으로 가 나무를 하는, 소설에나 나올법한 ‘낭만 성자(romantic saint)’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모든 몸짓은 겸손과 온유에 절어 있었고, 악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순진무구한 얼굴은 천사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호감을 일으켰는가는 그가 한창 뜨며 이단 시비가 일었을 때의 일화에서도 잘 나타난다. 유명 사립 Y대학 한 학생이 그의 이단성을 취재하려고 그를 방문했다가, 그의 인품을 접하곤 열렬한 지지자로 돌아섰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십 년이 흐른 후 숨겨진 그의 진면목이 비로소 드러났다. 그는 자신을 추종하는 많은 젊은 여성들을 농락하고 추종자들이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등, 그는 이미 하나님이 되어 있었다.

계시록에는 말세에 사람들을 미혹할 마귀의 수 ‘666’이 등장한다. ‘사람의 수 6’이 셋 모였으니, ‘사람의 완전수’이다. 마귀는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뜻이다.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을 만류하도록 역사한 사단(satan) 역시 스승을 걱정하는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띠었다(마 16:22-23).

어떤 신학자가 ‘666’을 설명하면서, 마귀는 가장 마귀스럽지 않은,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한 말은 일리가 있다. 경건과 도덕성을 구비하고 준수한 외모, 화려한 언변, 정치력, 예술적 감각까지 갖춘 만능엔터테이너의 모습은 대중들로 하여금 그가 마귀의 사주를 받은 자임을 꿈에도 상상치 못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

사탄
▲사탄이 우리에게 이러한 모습으로 다가올 확률은 거의 없다. ⓒ픽사베이
◈은혜로 ‘각자도생’하라

한 마디로 사람에게 기대지 말고 독립적인 신앙을 가지라는 말이다. 계시가 완성된 오늘날은 더 이상 사도 바울 같이 이가 나타나서 ‘나를 본받으라(고전 4:16, 11:1, 빌 3:17)’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은 ‘짠’하고 나타난 어떤 특정한 걸물(傑物)에 의해 우리를 인도받게 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완전한 계시인 ‘성경과 성령’으로 우리의 신앙 나침반을 삼게 했다. 사람들이 이단자들에게 미혹되는 것은 이 점을 간과한 때문이다. ‘각자도생(各自圖生)’이란 이런 은혜의 방편들을 통해 스스로 신앙을 세우라는 뜻이다.

물론 이는 오늘날 소위 ‘가나안(안나가) 성도들’의 주장처럼, 공교회의 일원됨과 역사적인 신앙고백을 무시한 채 유아독존(唯我獨尊)적인 무교회자가 되라는 말이 아니다.

곧 시류나 사람의 가르침 따라 부하뇌동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일대 일’ 단독자로 선다는 뜻이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마 17:8)”는 베드로의 변화산 고백을 일상의 신앙원리로 삼는다는 뜻이다.

그들은 대중이나 다수에 의해 그의 신앙 관점이 좌지우지 되지 않으며, 시대에 등 떠 밀려가지 않고 시대를 거스릴 줄 안다. 만인(萬人)이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할 줄 안다.

그렇다고 독단에 빠져 분리를 일삼지도 않고 양 극단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줄 안다. 인간 스승을 두되,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마 23:8)”라는 예수님의 말씀 따라, 그에게 참 스승은 오직 성령 한 분 뿐이시다.

그러나 이런 ‘각자도생’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 아니다. 말씀과 성령위에 세워진 성숙한 신앙만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

오직 진리를 쫓겠다는 성급한 마음에, 준비 없이 ‘각자도생’하려다 ‘도둑 피하다가 강도 만난다’는 속담대로, 더 큰 곤경에 빠뜨려질 수 있다. ‘각자도생’을 위한 용의주도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지금은 애굽 천지에 흑암이 임했던 재앙의 그 날처럼(출 10:22), 칠흑 같은 어둠이 교회를 덮고 있다. 어렴풋이나마 이러한 시대 상황을 알고 빛을 찾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낌새를 알아차린 불순한 자들이 여기저기서 ‘우리에게 빛이 있다’고 혹세무민한다. 일인 방송이 가능한 시대를 맞아, 그들은 유투브(YouTube)를 통해 사망의 독물을 쏟아내며 유리하는 영혼들을 사냥한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나,‘각자도생’은 이러한 위기의 성도들과 교회를 보호하고, 또 교회로부터 자신이 보호받기 위함이다. ‘각자도생(各自圖生)’으로 독립적인 신앙이 안 되면, 분별력이 없어 비진리의 자리에 계속 머물든지, 아니면 거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아예 교회와 분리되든지 양 극단의 선택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각자도생’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전 4:12)”는 말씀도 함께 연상된다. ‘각자도생’하기 위해 실력을 갖추려면 그것을 이루는데 서로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곧 흩어진 진리의 성도들이 서로 연합해 서로의 ‘각자도생’을 돕고, 또 ‘각자도생’한 이들의 결집된 힘으로 교회를 보호하고 어둠의 세력을 대적하기 위해서이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