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여행가방, 길, 부르심, 사명, 목적,
ⓒPixabay
본문: 베드로전서 2장 11-12절

사람들은 후회한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것이 ‘후회’다. 죽기 전에도 가장 많이 후회다. 죽기 전에 후회 하는 것 중 두 가지는 아래와 같다.

첫째가 ‘나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했다’.
둘째가 ‘나는 그렇게 까지 일할 필요는 없었다’다.

미국 역대 대통령의 영적 스승이었던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는 ‘더 기도를 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저는 목회하면서 독서하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가 된다.

우리가 후회를 하는 이유가 있다. 안목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저는 안목이 가장 부족한 부분이 물건 구입이다. 물건 구입에는 안목이 꽝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안목이 있어야 한다. 친구를 사귀는 데도 안목이 중요하다. 첫 직장 입사에는 안목이 더욱 중요하다. 배후자 선택에는 안목에 의해 달려 있다.

결국 인생의 미래와 삶의 질을 결정짓는 것은 안목이다.

안목이 중요하다

그럼 ‘안목’이란 무엇인가? ‘보는 눈이다.’

우리가 살면서 가져야 할 눈은 사람을 보는 눈이다. 그 다음이 물건을 보는 눈이다. 며칠 전 잠실 교보문고 ‘핫트랙스’에서 양말 10켤레를 1만원에 구입했다. 싸다고 생각했기에 과감하게 구입했다.

집에 와서 다시 안목 없음을 확인했다. 순면이 아니라 나일론이 섞여 있었다. 즉각 환불 하러 갔다. 환불이 안 된단다. 포장지를 뜯었기 때문이다. 다른 것으로 교환도 안 된다고 했다. 결국 지금 한 구석에 쳐박혀 있다.

한 번 실패한 양말을 구입하기 위해 중고나라를 뒤졌다. 중고나라에서 닥스 상표의 눈에 뛰였다. 기분 좋게 양말을 구입했다. 물품이 도착한 뒤 풀어보니 썩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짝퉁이었다. 이 양말도 한 구석에 잘 모셔져 있다.

며칠 뒤 아들과 이마트에 갔다. 생수와 워셔액을 구입하러 가는 도중, 마트 입구에 양말이 놓여 있었다. 그 양말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 손으로 만지는 순간, 맘에 쏙 들었다. 하지만 쌓여 있는 두 종류의 양말들 때문에 구입을 포기했다.

안목이 꽝이라 실수 연속이다. 후회가 막심했다. 정작 맘에 드는 것은 구입도 못했다. 안목이 없으면 고생이다. 안목은 꽝이 아니라 탁월해야 한다.

안목 부재는 실패로 이어진다

한국 국가대표 축구가 '2019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8강전에서 카타르에 0-1로 패배했다. 저는 이 경기를 통해 감독의 안목 없음을 발견했다.

실력은 우리가 앞서 있었다. 감독이 상대를 보는 안목이 부족하니, 게임을 느슨하게 풀고 간다. 전진패스가 아니라 백패스만 했다. 그 결과 패배했다. 이와 같이 안목이 없으면 패배한다. 패배하면 후회한다. 안목은 경기나 삶의 후회를 가져온다.

칼을 쓰려면 칼을 오랫동안 갈아야 한다

안목 부재는 왜 발생하는가? 두 가지다. 하나는 칼을 쓰는 시간보다 칼을 가는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칼을 쓰는 시간보다 칼을 가는 시간이 길어야 한다. 대패질하는 시간보다 대팻날을 가는 시간이 길어야 한다. 그래야 나뭇결에 따라 아름다운 대패질을 할 수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도 이런 말을 했다. “나에게 나무를 할 수 있는 8시간이 주어지면, 6시간은 도끼를 간다.”

또 다른 하나는 시행착오를 많이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상상력 연구소’ 소장이 김용섭은 그의 책 《실력보다 안목이다》에서 누구나 갖추기 원하는 네 가지의 안목을 이야기 한다.

첫째. 킨사이트(keen-sight)로 꽁꽁 숨겨져 있는 것도 찾아내서 볼 수 있는 안목을 말한다.
둘째. 크로스 사이트(cross-sight)로 단서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들을 엮어 붙여 그 속에 숨은 놀라운 연결 고리를 찾아내는 안목을 말한다.
셋째. 포사이트(fore-sight)로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예측하고 구체화하는 안목을 말한다.
넷째. 인사이트(in-sight)로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안목을 말한다.

안목을 갖되 남다른 안목을 가져야 한다. 본질을 꿰뚫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거칠 것이 시행착오다.

저는 양말 구입의 두 번의 시행착오 끝에 세 번째에 제대로 된 양말을 보는 눈이 생겼다. 이와 같이 시행착오는 남다른 안목을 갖는데 반드시 거쳐야 한다.

안목은 신앙생활에 가장 필요하다

우리가 물건을 구입하는 데만 안목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실력을 쌓는 데도 안목이 중요하다. 미래를 이끌 수 있는 것을 실력을 쌓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실력을 쌓는다.

물건 구입과 실력을 쌓는 데만 안목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삶을 사는 데만 안목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진짜 안목이 필요한 곳이 있는데 바로 신앙생활이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안목이다. 즉 영적인 안목이다.

마태복음 19장에 부자 청년이 나온다. 그는 영적인 안목이 턱없이 부족했다. 세상적인 안목은 남달랐다. 청년 때 이미 부자가 되어 있었다. 반대로 영적인 안목이 꽝이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구원을 돈 때문에 놓쳤다. 우리가 가져야 할 진짜 안목은 세상적인 안목이 아니라 영적 안목이다.

부자 청년은 심각하게 고민했던 구원을 받으려 예수님께 나왔다. 하지만 영적 안목이 꽝이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했다. 대신 언젠가 사라질 재물을 선택했다.

부자 청년만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제자들로 안목이 없었다. 마가복음 10장에 야고보와 요한의 안목이 나온다. 그들은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는 것이었다(막10:37).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4-45).”

예수님에 대해 안목이 없으니 예수님의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께 보여주지 않을 추태를 보여주고 만 것이다.

지금은 공감이 중요한 시대다. 저는 공감도 꽝이다. 부자 청년도 공감이 꽝이었다. 예수님과의 공감이 꽝이었다. 그가 공감이 꽝이니 안목도 꽝이었다. 안목이 꽝이니 삶도 꽝이 되었다.

남다른 안목을 갖고 살아야 한다. 안목이 없으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지 모른 체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중요함을 모른 채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신앙과 삶의 균형을 이루지 못한 채 신앙생활 할 수 있다.

안목이란 ‘보는 눈’이다. 생각할 수 있는 힘이다.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다. 보는 눈이 있을 때 ‘나다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2019년 1월 말에 안동에 있는 시찰회에서 세미나를 인도했다. 그 날 교회에서 준비한 점심이 맛있었다. 그중에서도 김치가 최고였다.

김치를 먹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김치를 맛있게 담는데도 안목이 필요하구나’.

김치를 담을 때도 안목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에는 안목의 중요성을 말할 필요도 없다.

오늘 베드로는 성도들이 신앙생활 할 때의 가질 안목에 대해 이야기 한다. 여기서 안목은 ‘하나님의 눈이다.’,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의 눈을 갖는 것 쉽지 않다. 그러려면 하나님과 의사가 소통되어야 한다.

공감(empathy)이란 ‘퍼씨(pathy)’는 ‘길(path)’, ‘엠(em)’은 ‘안’이라는 뜻이 묶여 있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길을 걷는 것’을 말한다. 만일 다른 사람의 길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간 길을 걸어 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경험하는 것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공감과 사촌 관계에 있는 ‘의사소통(communication)’이라는 단어다. 이 단어의 뜻은 ‘공동으로 나누다’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다.
이 단어는 라틴어 ‘코무니카레(communicare)’에서 유래했다. 공동으로 나누려면 같은 땅위에 함께 모여 있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안목을 갖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 전해져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공유됨이 있어야 한다. 공유됨이 없으면 영적인 안목은 결국 꽝이 된다.

악은 안목 없음의 결과다

성도들은 가질 안목이 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현실은 어떤가? 거의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간다.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가면 안목의 정욕대로 살아간다. 그럼 종국에서는 악이 표출된다.

안목 없이 하는 신앙생활은 악이 종착역이 된다. 이는 안목이 꽝이라는 반증이다.

전에 많이 듣던 말이 있다. 가장 선하게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악하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물적 손해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세상적인 것에 자기 이익만 챙기려 한다.

저는 늘 반대였다. 나의 이익을 제대로 챙겨 본 적 없다. 손해에 손해를 밥을 먹듯이 했다. 지금 교회는 권리금도 주고 들어왔다. 제가 하던 교회는 그냥 주고 왔다.

손해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두 가지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지!’ 또 다른 하나는 ‘나는 바보가 아닌가?’였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야 한다

신앙인이 가질 안목이 있다. ‘이익이 나느냐? 손해가 되느냐?’가 아니다. 가진 안목에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 있는가? 들어 있지 않은가?’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려면 안목이 이기적이 아니라 이타적이어야 한다. 자기중심적이 아니라 타인 중심적이어야 한다.

현실은 어떤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기의 이익 추구다. 그 결과 정욕적이다(11절). 그 결과 악으로 마침표를 찍게 된다. 그 이유는 삶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도는 삶의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목적이 자기 안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한다. 육체 정욕이 아니라 영적이어야 한다.

나아가 악행 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선한 행실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인 분명해야 한다.

신앙생활은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왜 신앙생활은 목적이 분명해야 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11절에서 신앙생활의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한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11절)”.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한다. 15년 전만 해도 성도들에게 술과 담배를 금했다. 주일 날 물건 구입하는 것도 금했다. 기타, 드럼 등 악기 사용을 금했다. 육체의 정욕을 쫓지 않게 하고자 하는 일련의 조치였다.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왜 금지를 중요시했는가?

신앙생활의 목적이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방황’이다.

방황이란 말은 삶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삶이 상황마다 흔들리도록 한다.

저는 방황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방황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한다. 자신이 할 일을 해내지 못한다. 하던 것도 도중에 하차하는 것이 다반사다.

목적이 분명한 사람의 특징이 있다. 삶이 주체적이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삶이 주체적이지 못하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은 자기 주도적으로 공부를 한다. 그렇지 않은 학생은 이리 끌려 다니고 저리 끌려 다녔다.

제가 몸이 몹시 아플 때 어머니와 누나 등에 이끌려 기도원을 다녔다. 신앙이 성장하자 제가 주체적으로 기도원을 다녔다. 어떤 것이든 목적이 분명하면 끌려 다니지 않는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위한 삶의 목적이 분명했다. 목적이 분명하니 복음 증거하는데 어떤 것도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결국 잡혀 로마로 압송되는 배 안에서 복음을 증거 했다. 로마 감옥 안에서 복음을 증거했다.

요나는 그 반대였다. 그는 사명에 대한 목적이 분명하지 않았다.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라는 말씀에 다시스로 피해 도망갔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의 악독을 외치라고 하셨다. 그러자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다.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도 있었다(요나서 1장 2절).

전에 배웠던 목사님께서 3월부터 다시 배우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하지만 며칠 전 만나니 다른 사역과 공부를 해야 하므로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는 목적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도 삶의 목적이 분명했다.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말씀에 주저없이 바치려 모리아 산으로 이삭을 데리고 올라갔다.

우리의 구주 예수님께서도 목적이 분명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을 망설이지 않았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을 기뻐하셨다. 그가 죽어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짐을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이다.

목적이 분명해야 답을 갖고 살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분명한 목적의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위한 목적이 분명한가? 아니면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유익을 위한 목적이 분명한가?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삶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신앙생활에 하나님을 위한 목적이 분명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최근에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문제로 그리스도인이 진보와 보수로 나뉘고 있다. 진보와 보수 한 쪽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욕하고 헐뜯는다.

이는 신앙인의 삶의 목적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관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은 다를 수 있다. 다른 것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위기라고 한다. 그 위기는 다른 위기가 아니라 목적이 하나님이 아니기 떄문이다. 자신의 유익이거나 진영논리의 사상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안에서 변화를 추구한다. 이익이나 진영 논리가 뒤따르면 안 된다, 그럼 언제든지 변질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반드시 변질된다는 것이다.

변질의 특징이 있다.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 음식물이 변질되어 썩으면 버려야 한다. 사람이 변질되면 함께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변질된 가룟 유다과 함께 하지 않으셨다. 바울이 변질된 순두게와 함께 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변화가 발전이라면 변질은 퇴보라는 사실이다. 아니 변질은 버려짐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목적도 마찬가지다. 목적이 변질되면 소망이 없다. 사울이 변질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더 이상 사용하지 않으셨다. 가룟 유다가 변질되었을 때 더 이상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다.

변질이 안 되면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떠나 어부로 돌아갔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다시 찾아가셨다. 이는 베드로가 변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실망만 했기 때문이다. 실망은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 하지만 변질은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신앙생활의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목적이 분명하면 신앙생활 할 때 한 가지 원칙을 고수한다.

‘어제 산 것처럼 오늘도 살아간다.’

저의 삶의 원칙 중 하나가 어제 멋지게 살았던 삶을 오늘도 살자는 것이다. 어제 최선을 다했으면, 오늘도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다. 어제 절실함으로 살았다면, 오늘도 절실함으로 살아가자는 것이다.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되는가를 결정짓는 것은 목적이 분명한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목적이 분명하면 흔들리지 않는다. 반면 목적이 흔들리면 신앙생활도 흔들린다. 목적이 방황하면 삶도 방황한다.

목적이 흔들릴 때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게으름이다. 그리고 불평과 원망이다. 게으름, 불평, 원망의 삶에 선한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하지 않을 말 가운데 하나가 불평이다. 이 불평은 변화가 아니라 변질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알리바바 그룹 회장인 마윈이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에 불만이 많다는 것은 이를 해결할 기회가 있다는 뜻이다. 미래의 기업가는 불평하는 사람이 아닌 이 불만들을 풀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나올 것이다”

초대교회도 불평이 있었다. 불평이 있을 때 공동체가 깨질 수 있다. 사도행전 6장를 통해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사도들은 초대교회를 시작할 때였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진다는 불평을 지나 원망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사도행전 행 6장 1절이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사도들은 이때 목적을 분명히 했다. 사도들이 해야 될 사명을 분명히 하는 계기로 삼았다, 사도들은 이런 일이 있은 뒤 집사들을 택한다.

그것이 3절이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겼다”.

목적이 분명하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즉 자기들 문제와 헬라파 유대인 과부 문제 그리고 일꾼들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그러자 불평이 떠났다.

오늘 베드로도 목적을 분명히 한다. 그것이 21절이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이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선한 일을 보게 해야 된다. 이에 그치지 않는다. 결국 비방하던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바뀌어져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

하나님은 불평과 원망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할 수 없다. 교회도 미래가 암물해진다.

그리스도안의 삶의 목적이 분명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 중 하나가 세상 사람들의 본이 되는 것이다. 본이 되려면 세상 사람들과 삶이 다름을 증명해야 한다.

우리가 본이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바울도 빌립보 교인들에게 본이 되었다. 본이 되었던 바울이 자신만만하게 한 권면이 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빌 3:17).

본받게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이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한다(12절). 그들에게 악행 아니라 선행을 보여주어야 한다.

예수님을 본받은 상태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삶 쉽지 않다. 하지만 살아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을 비방하는 이유가 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답으로 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 정답으로 사는 것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상 사람들이 오답으로 살고 있다. 오답으로 사는 것은 믿음으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것응 오답으로 사는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정답으로 사는 것이다.

성도의 신앙생황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살라(12절)“고 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 쉽지 않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려면 공기청정기와 같아야 한다.

우리나라를 살아갈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공기청정기다. 옛날 우리나라는 ‘삼한사온’이 뚜렷했다. 지금은 ‘삼한사미’가 뚜렷하다. 사흘 추운 뒤 나흘 미세먼저가 찾아온다. 이런 나라에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 공기청정기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공기청정기처럼 살아야 한다. 세상의 악과 정욕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살아야 한다. 세상이 악으로 가득한 것은 공기청정기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고장이 났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악한 생각을 정화시키는 공기 청정기와 같은 삶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공기청정기처럼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인간의 그림은 작은 그림이다. 하나님의 그림만이 큰 그림이다. 나의 욕망을 위한 것은 작이 작은 그림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그림은 크고 큰 그림이다.

자기를 위한 그림은 정욕을 위해 살아간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한 그림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감동받게 하는 삶을 살아간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악행’이란 단어를 언급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아니 한방에 잠재울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저 사람 때문에 예수를 믿고 싶다고 만들어야 한다.

공기청정기 집에만 있어야 하는 것 아니다. 그리스도인 자신이 공기청정기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세상은 숨을 쉴 수 있는 곳이 된다.

세상을 숨 쉬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세상은 오염시키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공기청정기인 그리스도인을 원한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