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유 옥합을 깨뜨린 여인
본문: 누가복음 7장 44-48절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때 한 여인이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주님의 발에 붓고 눈물로 그 발을 씻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알고 보면, 그 당시엔 큰 일날 만한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시몬이 주님을 괜히 초청했구나 하고 실망할 장면이면서, 이 일이 널리 알려지면 바리새인의 신분에 적잖은 명예훼손이 될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장면을 통해 귀중한 교훈을 주시고 계시는 점이 대조적입니다. 본문을 배경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은혜에 보답하는 태도를 보고 있느냐?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눅 7:44)”.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은 주님을 선지자로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식사 초대를 했습니다. 이때 주님은 그런 시몬의 의도를 아셨음에도, 초대에 응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한 여인이 주님께 접근하여 갑자기 향유를 붓고, 주님의 발을 자신의 머리털로 씻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상황에서 주님은 시몬에게 “이 여자를 보느냐?”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이는 시몬이 보고 있지 않아서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물으시는 질문이 아닙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는 옷이나 패션 감각을 보라는 뜻이 아닙니다. 얼굴 화장의 포인트를 살피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렇잖아도 지금 시몬은 이 여자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중입니다. 죄 많은 여인이 감히 주님의 발에 손을 대고 있는데다, 그것도 함부로 풀어 헤친 머리로 눈물을 쏟아 주님의 발을 닦고 있는 중입니다. 나아가 그 발에 대고 셀 수도 없이 입을 맞추는 광경입니다.

시몬의 이런 마음을 훤히 들여다 보는 주님께서는 ‘은혜의 보답’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빚 탕감의 은혜를 죄 사함에, 그리고 은혜에 대한 보답의 형태를 사랑의 차원에 귀결시킨 것입니다.

많이 탕감받은 자가 더 많이 감격해 하듯, 크게 사함 받은 자가 더 많이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2. 비판하기보다 용서하는 마음으로 보고 있느냐?

“너는 내개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45-46절)”.

본문에 등장하는 이 여인은 윤락의 일을 하던 연고로 ‘죄 많은 여인’이라고 동네에 알려진 상태입니다. 그러면 지극히 죄가 많은 여인이 감히 주님께 접근해도 되는가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극도의 경건주의를 표방하는 바리새인들은 주님과 대척점에 섰던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타인을 정죄하고 비판하는데 능숙한 바리새인이 여인의 행동을 보면서 굉장히 당황스러운 일로 정죄하는 그 마음을 익히 읽으셨습니다.

이 여인의 행동을 전혀 좋지 않게 평가하는 그 마음에 일침을 가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지금 주님에게 봉사하는 행동을 비판하기보다 용서하는 마음으로 보느냐?를 질문하는 의도입니다. 정죄하기보다는 용서하는 마음으로 이 여자를 보라는 뜻입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율법에 찌든 종교주의자는 남의 허물을 찾아 무자비하게 정죄합니다. 그들의 가슴에다 형벌의 팻말을 달아주는 일을 사명처럼 여겼습니다.

17세기 미국 나다나엘 호돈(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이 쓴 《주홍글씨》는 명문 옥스퍼드 출신 젊은 목사 ‘딤즈데일’이 여성도와 불륜의 사랑을 맺는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은 실로 청교도 사회의 냉혹한 정죄와 비정한 세계를 에워싸고 벌어지는 회한과 비애를 그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비록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긴 하지만, 단순히 비판만 하지 말고 한 번 용서의 눈으로 보라는 의미의 심중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이는 신앙과 개인의 자유 사이에 빚어지는 갈등에 메스를 가한 미국 심리 소설의 대표적 고전으로 뽑히는 이유입니다. 지금 주님은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에게 비판만 하지 말고 용서하는 마음으로 보라는 의도이기도 합니다.

3. 용서받고 새로워진 여인을 보고 있느냐?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 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47-48절)”.

이 여자는 비록 죄가 많았지만 용서받은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용서받은 체험을 크게 하여 ‘새로운 존재’가 된 여인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주님이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이기도 합니다. 이 여인은 용서의 체험을 못했다면, 필경 걸어온 기구한 운명을 저주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용서받고 이런 원망의 마음이 모두 녹아내렸습니다. 이제 이 여인은 자신의 운명을 더 이상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이 용서받은 체험이 자신의 삶을 새롭게 느끼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비밀입니다. 믿음이란 용서받은 체험이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 용서받은 믿음의 고백은 반드시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김충렬
▲김충렬 박사. ⓒ크리스천투데이 DB
4. 정리

부활하신 주님께서 디베랴 아침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시지요? 사명을 맡기기 전에 용서받은 은혜를 기억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가는 인생의 길에 저와 여러분도 용서받은 은혜를 깊이 새기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로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죄지은 사람을 정죄하기보다는 용서하는 마음으로 대하게 하소서! 더 나아가 용서받고 새로워진 사람으로 보게 하소서! 남의 허물을 드러내는 자보다 그 허물을 덮어주는 자에게 복을 내리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김충렬 박사(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 전 한일장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