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 신학
성찬 신학: 새 언약의 표지와 식사

가이 프렌티스 워터스 | 강대훈 역 | 부흥과개혁사 | 157쪽 | 9,000원

필자는 매 주일 성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기념하는 교회에서 태어나 자랐고, 지금은 그 교회 목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전 11:26)”.

사도 바울이 주께 받아 고린도 교회에 명령한 성찬은 주가 오실 때까지 전해야 할 메시지가 담겨 있는(주의 죽으심) 주님의 명령입니다(눅 22:19).

문제는 성찬이 담고 있는 의미, 성찬을 통해 선포하는 메시지의 중대한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기억하지 않으면, 융통성이라는 이름으로 성찬을 점점 홀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하나님 나라 백성 이스라엘은 옛 언약의 표지와 식사인 제사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의미를 담고 있는지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긴 했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형식적이고 모욕적인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말 1:7)”.

오늘날 하나님 나라 백성인 교회는 다를까요? 교회는 새 언약의 표지와 식사인 성찬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신령과 진정으로 성찬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리스도를 기념하고 있을까요?

혹시 융통성이라는 이름으로 무시하고 홀대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매주 기념하면서도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방법으로 행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오랜 세월 정기적으로 성찬을 행했던 교회에서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잊지 않기 위해 씨름했던 사람으로서, 가이 프렌티스 워터스의 이 책 <성찬 신학>은 참으로 고마운 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별히 성찬이 담고 있는 영광스러운 의미를 ‘성경 신학적’ 관점으로 조명해 주는 것이 독창적이면서도 성경적입니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싱클레어 퍼거슨이 말한 것처럼, 저자는 3분의 2에 해당하는 책의 내용을 구약의 본문으로 채웁니다.

그만큼 성찬의 의미를 빠르게 설명하기 위해 신약의 주요 본문을 서둘러 설명하기보다, 옛 언약과 유사한 점을 독자가 발견하고 옛 언약의 백성에게 그 언약의 표지와 식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보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 언약의 백성에게 동일한 무게로(아니 훨씬 더 중대한 무게로) 그 중요성을 깨닫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성찬은 단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예식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간에 맺어진 언약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선포하는 놀라운 표지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먼저 ‘언약’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합니다(1장). 그러고 나서 언약을 기억하게 하는 ‘언약의 표지’를 설명합니다(2장). 3장에서는 언약의 표지와 항상 함께 따라왔던 ‘언약의 식사’를, 4장에서는 마침내 ‘주의 만찬’에 관하여, 마지막 5장에서는 교회를 위한 결론을 제시합니다.

저자가 언약을 먼저 설명한 것은 참으로 합당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 선택으로 시작하신,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고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어낼 수도 없는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언약은 사소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 되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것이므로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다”고 말한 저자의 말이 사실입니다(23쪽).

마지막으로 언약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이지만, 그에 상응하는 의무를 언약의 당사자인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한다는 것입니다(25쪽).

옛 언약의 시대부터 새 언약의 시대까지, 결국 언약의 표지(무지개, 할례, 유월절, 세례, 주의 만찬)가 강조하는 실체는 바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간에 맺어진 언약입니다.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1495-1498, 벽화)’. ⓒ한길사 제공
저자의 말대로 “언약의 표지는 하나님이 우리의 전인, 즉 영혼과 몸에 가까이 오기를 원하시는 것을 입증”합니다. “언약의 표지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앙의 시련이 있고 불신의 시험이 있음을 입증”하고, “이런 시험에 직면한 우리의 신앙을 돕고 지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증”합니다.

“언약의 표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시각적으로, 감각적으로, 구체적으로 입증”합니다. 그러므로 저자의 말처럼 “우리를 돕고 이롭게 하려고 이런 표지들을 정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67쪽).

주의 만찬에서 저자는 유명한 논쟁이었던 화체설과 상징설을 모두 거부하면서, 앞서 언약의 표지를 설명하며 강조해왔던 내용을 이어받아 언약의 표지인 성찬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강조합니다.

“주의 만찬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풍성히 누릴 수 있는 순간이다. 그리스도는 성령의 사역에 의해 자신의 백성을 만나시며, 동시에 우리는 믿음의 실행으로 그리스도를 만난다. 주의 만찬에서 그리스도는 자신을 믿는 신자들의 믿음을 통해 신자들에게 영적으로 임재하신다(136쪽)”.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주의 만찬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책망하면서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고전 11:27).

실제로 그로 인해 약한 자와 병든 자, 잠자는 자(죽은 자)가 그들 중에 적지 않았습니다(고전 11:30). 이는 저자가 설명한 주의 만찬의 의미와 상응하는 내용입니다.

그리스도가 성령의 사역으로 자기 백성을 만나는 언약의 표지가 성찬이고, 새 언약의 백성인 교회가 믿음으로 성찬을 실행하여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라면, 그것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더럽게 하고 여호와의 식탁을 경멸히 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성찬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가운데 맺어진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을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만나는 그날까지 이 땅에서 기억하고 기념하고 경험하고 만날 수 있는 언약의 표지입니다.

성찬은 엄청난 영적 축복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져오면서도, 동시에 함부로 대할 때 큰 책망과 훈계를 받을 수 있는, 나아가 심판을(영원한 심판이 아닌) 받을 수 있는 진중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성찬이 이토록 사랑스럽고 은혜로우며 동시에 경외롭고 두려운 이유는, 언약의 대상이 사랑과 공의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새 언약의 백성으로 우리와 언약을 맺기 위해 희생하신 것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점검하고 몸을 분별하는 사람들, 주의 만찬을 통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사람들, 동료 신자들과의 진정한 교제와 일치성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위해 복을 준비하신다.

그러나 언약 공동체 내에서 그렇게 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회개로 이끌기 위한 의도인 주의 언약적 훈계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언약의 규례를 훼손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약의 저주가 주어질 것이다(140쪽)”.

종교개혁자들이 가톨릭의 형식화된 성찬식의 의미를 성경으로 되찾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오늘날 교회는 융통성이란 명목으로 간과된 성찬의 의미를 다시 찾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교회의 머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분명히 명령하신 타협불가능한 성례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 <성찬 신학>이 새 언약의 백성인 교회가 그 고귀한 언약의 표지를 회복하여 언약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는 데 하나의 커다란 도움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조정의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유평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