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아트설교연구원 연구원들의 서평과 원장 김도인 목사의 설교 글쓰기 원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후 이들의 연구 결과물, 즉 설교문을 보고 싶다는 독자들의 요청에 따라, 설교문을 공개합니다. 원장 김도인 목사의 베드로전서 설교를 연속 게재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객관적인 평가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본문: 베드로전서 2장 4-10절

삶은 행복 만들기다

인간의 삶은 행복 찾기의 여정이다. 우리가 행복을 찾으려면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는 자신이 찾는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 곁에 머무는 것이다.

먼저는 자신이 찾는다. 자신이 행복을 찾을 때 옆에 사람이 중요하다. 누구와 함께 사느냐가 행복을 결정짓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는 친구를 잘 둬야 한다. 청년 때에는 반려자를 잘 만나야 한다. 장년이 되어서는 친구를 잘 둬야 한다. 사람을 찾을 때 조건이 있다. 좋은 사람을 만아야 한다. 좋은 사람이란 감사할 줄 알고 베풀 줄 아는 사람이다. 이기적이지 않고 이타적인 사람이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 곁에 머무는 방법이다. 이 방법만이 확실하다. 이는 행복이 근원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들었다. 가장 행복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곁에 머무는 것이 행복한 이유가 있다. 사람은 힘도 주지만 동시에 견디기 힘든 짐도 된다. 하나님은 오로지 힘만 되시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왔다. 하나님을 만나면 행복하기 때문이다. 또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이 되신다. “하나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시편 기자는 고백했다.

그럼 왜 하나님을 만나는데 행복하지 않은가? 하나님 만나는 것을 힘이 아닌 짐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 만나는 것보다 짐이 되기 때문이다. 주일날의 가족의 애경사보다 예배가 짐이 되기 때문이다.

북한의 그리스도인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예배를 드리고 싶어도 드리지 못한다. 예배 드리는 자유가 없다. 숨어서 예배를 드린다. 죽기를 각오하고 예배를 드린다. 예배가 힘이 됨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많이 아팠다. 예배를 드릴 수 없을 몸일 때가 많았다.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날에는 힘이 솟구쳤다. 아버지께서도 많이 아프셨다. 아버지께서 생사를 넘나들 때 예배가 탈출구였다. 예배를 드리면 온 가족이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때 예배는, 감사는 당연하고 눈물은 필수였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날이 많았던 이때가 가장 행복했다.

기도는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는 시간이다. 하지만 지금은 기도가 짐이 되었다. 본래 기도는 삶에 최고의 에너지 공급원이다. 피자를 화덕에 들어갔다 나오면 맛있는 피자가 되어 나온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기도하면 기쁨이 충만한 사람이 되어나온다.

신학생 때부터 기도원에 자주 갔다. 아들이 어릴 적에는 아들과 수유리에 있는 영락기도원에서 기도를 했다. 사역을 할 때는 일주일에 한 번씩 기도원에서 기도를 했다. 이는 삶과 신앙에 힘이 공급되었기 때문이다.

예배를 드릴 때, 기도할 때, 하나님께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고 할 때 언제나 힘이 되어주신다. 오늘 베드로는 자신의 사역에 하나님께서 힘이 되심을 체험했다. 그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나아가길 권면한다. 그가 하는 권면은 세 가지다.

먼저,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께 나아가야 한다.
다음으로, 나아가는데 그치지 말고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왜 이렇게 말하는가? 하나님이 행복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본분에서 그리스도인이 느끼는 행복이 있다. 베드로는 ‘거룩한 제사장이 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9절).”

그리스도인에게 행복은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으로 사는 것이다. 세상의 부유함으로 사는 것 아니다. 행복하게 살려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미지근함이 아니라 뜨거움으로 나아가야 한다.

세상적이 아니라 영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듣기 위해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야 한다.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도가 거룩한 제사장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이야기 한다. ‘모퉁이 돌’이라고 한다. 그 모퉁이 돌이 믿지 않는 자에게는 그저 버려진 돌일 뿐이다. 즉 아주 사소한 돌이다. 하지만 믿는 자에는 보배로운 모퉁이 돌이다. 주춧돌이 된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짐 덩어리로 여겼다. 그 결과 버렸다. 즉 예수님을 버린 돌로 만들어버렸다(7절). 마지막에는 예수님이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라고 말한다(8절).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오롯이 짐이 될 뿐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중 하나만 있다

하나는 소중한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사소한 것이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소중한 것이다.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은 사소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다. 즉 사소한 분으로 여긴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가장 소중한 분이라고 말한다. 주춧돌이기 때문이다. 기초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걸림돌이라고 말한다. 요즘 예수님은 진보와 보수하는 이념보다 못하다. 예수님을 진보와 보수의 이념 주장에 지렛대로 삼을 뿐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생명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진보의 관심은 개혁이다. 보수의 관심은 조국 퇴진이다. 그 결과 예수님은 진보와 보수에 비해 하찮은 분, 사소한 분이 되었다.

진보와 보수보다 사소해진 예수님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분이다. 세상에 생명보다 위대한 것이 없다. 이념은 생명에 새 발의 피다.

세상에서 사소하게 여기는 이 예수님이 인생을 인생답게 만든다. 대통령이 인생을 위대하게 만드는가? 아니다. 법무부장관이 이 나라를 위대하게 만들어주는가? 그것도 아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나라와 우리들을 위대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대하게 여긴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예수님을 사소하게 여긴다. 이 사소하게 여기는 예수님이 사람들을 어떻게 만들어주는가?

첫째,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한다(9절).

둘째, 전에는 백성이 아니었다.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다(10절).

셋째,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가 되게 한다(10절).

숫자 ‘0’은 사소하다. 그러나 ‘0’이 어떤 숫자의 뒤에 붙으면 위대해지기 시작한다.

예수님이 그러하다. 사람들이 평상시에는 예수님이 그다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위기가 닥치면 예수님처럼 중요한 분이 없다. 위기가 닥치면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절박하게 찾는다. 그때는 세상 누구도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하실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소하게 여기는 것이 인생을 인생답데 만든다. 세상 사람들이 사소하게 여기는 예수님이 우리 인생을 거룩한 제사장으로 만들어주셨다. 사망의 길에서 생명의 길로 옮겨주셨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도 사소한 것을 사소하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

사람들이 사소하게 여기는 것이 많다. 시간 관리, 식사 하는 것, 규칙적으로 운동하는 것, 남을 배려하는 것, 언제나 감사하는 것 등이다. 이 사소한 것이 중요하다. 이 사소한 것이 인생을 인생답게 만든다.

신광철은 그의 책 《인문형 인간》에서 사소한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어도 좋다. 세상은 사소한 것들의 집합이다.”

세상은 사소한 것들의 집합소라고 한다. 모두 사소하다. 이 사소한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다. 사소한 것에 어떻게 목숨을 거느냐가 중요하다.

왜 사소한 것이 인생을 인생답게 만드는가?

언제나 중요한 것은 사소한 것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소풍 때마다 보물찾기를 했다. 보물은 나무 위, 바위 뒤, 수플 속에 숨겨져 있었다. 보물은 위대한 것이 아니라 사소한 곳에 숨어 있었다.

위대함은 사람들이 무시하는 것 안에 숨겨져 있다. 위대한 생명은 사람들이 돌처럼 취급한 예수님 안에 숨겨져 있었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큰 것을 좋아한다. 권력을 좋아한다. 이념을 좋아한다. 이념 안에 생명 없다. 거창한 것 안에 보석을 숨기지 않는다.

사람들은 큰 것은 살핀다. 반면, 작은 것은 무시한다. 저의 첫 차는 티코였다. 한 번은 일이 있어 가족과 함께 시청 앞에 있는 호텔에 갔었다.

호텔 앞에 도착하니 제 차는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그저 손짓으로 지하로 내려가라고 했다. 하지만 당시 큰 차였던 그랜저에는 문도 열어주고 인사도 90도로 했다.

사람은 작은 것을 무시한다. 그럼 예수님은 어떠신가? 예수님은 작고 사소한 것을 소중히 여기신다. 예수님은 지극 히 작은 자에게 한 것에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작은 어린아이가 당신에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마 19:14).”

그 이유는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지 말라고 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세상 사람들도 사소해 보이는 사람을 철저하게 무시한다. 땅에서 구걸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무시한다.

저는 일주일에 한 번 버스를 타고 대구를 간다. 타는 시각은 오전 6시 40분이다. 타는 장소는 동서울터미널이다. 터미널에 도착할 때쯤 되면 주로 복음성가가 들린다. 두 다리가 잘린 한 남자가 스피커 뒤에 앉아서 구걸을 한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푼돈을 구하기 위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외면한다. 만약 높은 사람이었다면,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남보다 더 잘 보이기 위해 있는 것 없는 것 털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남자에게 1,000원짜리 한 장 놓고 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 남자를 그냥 지나쳐도 문제가 되지 않는 사소한 사람임을 알기 때문이다. 가난하면 뭇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한다.

이렇게 뭇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사람을 예수님은 사랑하신다. 우리는 죄인 중 괴수다. 사소해 보여도 아주 사소해 보인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사랑하신다.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다. 그렇다면 우리도 사소해 보이는 것에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우리는 없어 보이는 사람만 무시하지 않는다. 무한정 있는 시간도 무시한다. 사람들이 시간을 무시하는 이유가 있다. 시간은 ‘무한 리필’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다. 시간은 무한리필 된다. 무한리필 되지만 지나가면 휘발성처럼 날아간다.

‘시간 벌레’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시간 벌레는 시간을 좀먹는 존재를 일컫는다. 시간 벌레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다. 시간을 의미 없이 허비해 버리는 사람이다.

우리는 시간 벌레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럼 ‘시간충’이 된다. ‘시간 벌레’가 되면 인생을 버리는 것과 같다. 인생이란 아름답고 만족스런 나를 가꾸는 것이다.

그 다음, 자기 관리다. 사람들은 자기를 가꾸지 않는다. 치열하게 자기관리를 해야 한다. 그저 외모를 꾸미는 데만 치열하다. 우리가 가꿀 것은 인격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지적 관리를 해야 한다. 지금은 지식 사회이기 때문이다. 지식사회에 그리스도인은 지식 관리는 거의 하지 않는다. 영적인 관리에만 신경을 쓴다. 지적 관리가 중요하다. 지적관리는 영적관리는 함께 가기 때문이다. 지적 성장없이 영적 성장 이루어지지 않는다.

최근 《인생의 열매들》이란 인문학 수필을 읽었다. 김형석 김태길, 안병욱의 글들을 ‘마음의 열매들’, ‘삶의 열매들’, ‘지혜의 열매들’이란 주제로 엮은 책이다. 읽으면서 지적 관리가 영적인 울림까지 줌을 경험했다.

사소하게 여길 수 있는 시간 관리, 자기 관리가 인생을 인생답게 만든다. 마치 작은 배의 키가 몇 십만 톤 되는 배의 방향을 결정하듯이 말이다.

우리는 사소한 것을 한 번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부모는 어린아이의 사소한 것을 신경쓴다. 사소해 보이는 먹는 것, 배설하는 것, 잠자는 것이 어린아이의 성장을 결정한다. 어린아이는 사소한 것을 통해 성장한다. 어린아이에게 넘어짐은 사소하다. 이 사소한 넘어짐을 2만 번 넘어져 본 후에야 혼자서 걷는다.

사람들이 왜 인생의 실패자가 되는가?

미국의 한 학자가 거짓말을 조사했다. 사회활동을 하는 사람은 8초에 한 번꼴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8초에 한 번 꼴로 거짓말을 하는 것을 사소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거짓말 한 번 했을 때 크게 여겼다면 더 이상 거짓말 하는 삶을 살지 않았을 것이다.

‘한 단어’는 크지 않다. 수많은 단어 중 한 단어, 수많은 문장 중 한 단어는 사소하다. 이 한 단어 때문에 명문장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 단어 빠지면 대화가 되지 않는다. 사소해 보이는 한 단어가 위대한 단어다.

이 작은 한 단어가 엄청나다는 것을 아는가?

한 단어만 바꿔도 놀랄만한 영향력이 나타난다. 로버트 치알디니는 그의 책 《초전설득》에서 선거에서 단어의 힘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놀랍게도 단 하나의 단어를 바꿔서 발생한 해결책 선호도의 차이는 22%라고 한다. 이는 참가자의 성별은 9%, 정치 성향 8%보다 훨씬 높다. 즉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 보험회사에서 보험을 팔 때 단어만 바꿔도 보험 계약 건수가 확 올라간다.

“당신이 ‘퇴장’할 때 당신의 생명보험금이 ‘입장’합니다”라고 했더니, 많은 사람들이 보험을 계약했다고 한다.

한 단어의 힘이 엄청나다. 사소한 것, 작은 것 힘이 대단하다. 작은 소년 다윗이 서인 거인 골리앗을 이겼다. 그것은 몇 마디 되지 않은 말 때문이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믿음의 몇 단어가 한 나라를 위기에서 구했다. 한 작은 소년이 민족을 찬란한 영광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와 같이 사소해 보이는 한 단어가 위대하다.

단어만 그렇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것은 높은 건물이 아니다. 가장 작은 미술품이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미술품은 2015년 5월 15일 1억7936.5만 달러에 낙찰된 파블로 피카소의 ‘알제의 연인들’이다. 우리나라 미술품의 최고가는 2018년 김환기 화백의 ‘붉은 점화’로 85억이다.

미술품은 크기가 아주 작다. 건물이 비하면 조족지혈 정도다. 그 이유는 사진작가인 윤광준이 그의 책 《심미안 수업》에서 잘 말해준다.

뉴욕의 어느 미술가로부터 전 세계의 부가 몰려 있는 월스트리트의 부자들이 마지막에 하는 일이 그림 수집이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미술품을 구입하는 것은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 중’ 그림만큼 강렬한 쾌감을 주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명심하며 살아야 말이 있다.

“사소한 것이 인생을 인생답게 만든다.”

예수님도 사람에게 버린 바 되셨다(2절). 그 말은 사소한 존재였다는 것을 뜻한다. 고귀했으면 절대 버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사소하게 여긴 예수님이 우리를 버려진 인간에서 쓸모없는 인간으로 만들어주셨다. 우리를 보배로 만들어주셨다.

버려진 자녀에게 택하신 자녀로 만들어주셨다. 종 자녀에게 왕의 자녀로 만들어주셨다.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식으로 만들어주셨다.

최근 핫한 사람 중 한 명이 아주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인 이국종이다. 그도 사소해 보일 수 있는 한 마디에 인생이 바뀌었다.

바로 “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하는 말이었다.

그는 중학교 때 축농증을 심하게 앓자 병원을 찾아갔다. 병원에서 국가유공자 의료복지카드를 내밀었다. 그럼 간호사의 반응이 싸늘했다. 다른 병원에서도 문전박대를 당했다.

그는 여러 군데 병원을 찾아 헤매던 중 그는 자신의 삶을 바꾸어주는 의사를 만난다. 그 의사는 중학생이 내민 의료복지카드를 보고 놀라운 말을 했다.

“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그 의사는 정성껏 치료한 뒤 진료비도 받지 않았다. 그리곤 한 마디 덧붙였다.

“열심히 공부해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사소해 보이는 한 마디가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인생을 인생답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사소해 보이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 사소할 뿐이다.

안에는 불덩이가 들어있을 수 있음이다. 그 안에는 금광석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소한 것을 업신여기면 안 된다. 도리어 소중히 여겨야 한다. 사소해 보이는 것이 인생을 인생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삶에서 가장 사소해 보이는 것은 현재다. 이 사소해 보이는 현재가 인생을 인생답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어거스틴이 ‘현재’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다.

“현재의 이 순간을 떠나서는 우리라는 것도 없고 세계도 인생도 없다. 이 현재의 순간을 놓쳐버릴 때 그것은 바로 인생을 놓쳐버린 것이 된다. 그리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영원한 것을 놓쳐버린 것이다”

가장 사소한 이 순간을 최고의 순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럴 때 최고의 인생을 살 수 있다. 최선을 다하는 인생 하나님께서 원하신다. 최선을 다하는 인생을 하나님은 최고의 인생으로 만들어주신다.

저는 여러분이 세상이 사소하게 여겼던 예수님을 통해 위대한 사람이 거룩한 백성이 되었음을 명심하길 원한다. 또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다.

사소함을 사소함으로 여기지 않고 예수님과 같이 귀중하게 여겨 세상을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 드러나도록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길 축복한다.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