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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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아트설교연구원 연구원들의 서평과 원장 김도인 목사의 설교 글쓰기 원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후 이들의 연구 결과물, 즉 설교문을 보고 싶다는 독자들의 요청에 따라, 설교문을 공개합니다. 먼저 원장 김도인 목사의 베드로전서 설교를 연속 게재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객관적인 평가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본문: 베드로전서 2장 1-3절

‘안테암불로’로 살아라

라이언 홀리데이(Ryan Holiday)의 책 《에고라는 적》에 ‘안테암불로’라는 용어가 나온다. 이 말은 ‘길라잡이 역할’이란 뜻이다.

라이언 홀리데이는 21살에 아메리칸 어패럴 마케팅 임원으로 발탁되었다.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성공하려면 위대한 리더들이 가진 ‘안테암불로’의 자세를 배우라고 말한다.

그가 만난 많은 젊은이들은 생각이 이렇다. “왜 내 진가를 인정해주지 않는 거지?” “왜 저 상사를 위해서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 하는 거지?”

즉 남탓을 한다. 사람들은 남 탓을 하면서도 리더가 되려고 한다. 리더가 되려면 먼저 리더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한다. 그도 인정받는 길을 다르게 제시한다.

“적극적으로 타인의 밑에서 일하라.”

현실은 사람들이 타인의 밑에 일하는 것에 대해 분노한다. 더 나아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절망한다.

라이언 홀리데이는 이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더 적극적으로 타인의 밑에서 일하세요.”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은 자기 사업하는 것이 로망이다. 한국 사회에서 돈을 벌려면 자기 사업이 최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이언 홀리데이는 타인의 밑에서 적극적으로 일하라고 한다. 그 이유는 타인 밑에서 적극적으로 일을 하는 것이 길라잡이 역할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자신의 성공 비결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위대한 예술가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안테암불로’ 때문이다. 당시 예술가들은 부자, 정치가, 사업가가 예술가를 후원토록 하는 ‘안테암불로’ 역할을 했다. 그들은 예술가들은 후원자를 위해 심부름을 하고, 길을 터주고,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했다.

때론 푼돈과 호의를 얻기 위해 이런 역할을 하던 중 노예처럼 사는 것에 분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이 안테암불로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후원자의 도움으로 지속적으로 예술 활동을 할 수 있었다.

타인의 밑에서 일하며, 노예처럼 살고 있다면 세상을 원망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위대한 리더들은 오랫동안 타인의 밑에서 원망 없이 일을 했다. 누군가의 길라잡이가 되어주는 역할을 통해 자신의 꿈을 이뤄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미켈란젤로, 다빈치, 벤저민 프랭클린 등이 이런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도 안테암불로를 통해 살아갔다면 성공을 꿈꾼다면 타인의 밑에서 일하는 것에 적극적이어야 한다.

라이언 홀리데이는 말한다. “타인을 섬기겠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다.”

타인을 섬기는 사람이 성공을 한다고 말한다. 그럼 왜 그런가? 타인을 도와주는 일이 결국 자신을 돕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도움으로써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돕는 것, 바로 이것을 ‘캔버스 전략’이다.

순종이 ‘안테암불로’의 삶을 살게 한다

‘안테암불로’의 삶을 살려면 후원자인 부자, 사업가 등에게 순종을 해야 한다. 순종하지 않으면 ‘안테암불로’의 삶을 살 수 없다. 순종은 쉽지 않다. 하지만 위대한 삶을 살려면 순종은 필수다. 영국의 유명한 정치가이자 존경받는 작가였던 마혼 경이 이런 말을 했다.

“위대한 사람은 언제나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다. 왜냐하면 자신의 능력은 나중에 언제든, 얼마든 증명할 수 있으니깐.”

위대한 사람이 되려면 자신 증명 이전에 먼저 순종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부리기 이전에 타인의 밑에서 일해야 한다. 타인의 밑에서 적극적으로 일하려면 순종해야 한다. 위대한 자가 되려면 위대한 순종이 먼저다.

위대한 사람이 위대하기 전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면 우리도 순종하는 삶을 살고자 해야 한다. 예수님은 위대한 순종의 삶을 사셨다. 누구도 지고 싶지 않은 죽음의 십자가를 지셨다. 그래서 성경은 죽기까지 순종했다고 한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순종한 것은 하나님 나라는 순종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이는 믿음은 순종이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반면 세상은 순종이 아니라 그 반대인 갑질이다. 최근에 슬픈 뉴스를 들었다. 위디스크 양진호 회장의 직원에게 야만적인 폭언과 폭력을 휘둘렀다. 마커그룹의 대표인 송명빈이 수년에 걸쳐 직원을 상습적으로 폭행했다. 심지어 휴대전화, 지갑, 신분증, 인감도장 등을 빼앗기까지 했다.

나쁜 종교! 더 나쁜 종교! 아주 나쁜 종교!

그럼 교회는 어떤가? 하나님께 순종하는가? 도리어 사람에게 순종을 한다. 돈에게 고개를 조아린다. 예장 통합 104회 총회에서 최근 명성 교회 세습 문제를 처리하지 못했다. 이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사람에게 순종한 것임을 보여준다.

교회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곳이다. 그리스도인인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세상을 섬기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떤 책을 읽을 때 이런 소주제가 있었다. ‘나쁜 종교, 더 나쁜 종교, 아주 나쁜 종교.’ 기독교를 두고 말하는 것 같아 씁쓸했다. 이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순종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에 갑질을 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 성도는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 현실은 다르지 않다. 거의 흡사하다. 왜 그런가? 진리를 추구해야 하는데 비 진리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하는데 영광을 길을 걷고자하기 때문이다. 순종해야 하는데 갑질을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달라야 한다. 달라도 확 달라야 한다. 아니 남달라야 한다. 남들이 보기에 차이가 확 나야 한다. 그것이 교회다. 교회는 바른 길에 들어서 있어야 한다. 성도는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원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세상 사람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주의 인자하심을 맛본 사람(3절)이기 때문이다.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2절).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린 사람이기 때문이다(1절).

성도는 ‘빛의 자녀’다

왜 성도의 삶은 세상과 달라야 하는가? 세상과 다른 길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세상과 다른 곳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럼 성도는 세상과 다른가? 세상과 별 반 차이가 없다.

에베소서 2장 2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사람은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성도는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른다. 그 결과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야 하는데 불순종의 아들들처럼 살아간다.

분명히 성경은 말씀한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셨다. 그리고 빛으로 사셨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요 9:5)”고 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셨다.

우리에게도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고 하셨다.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요 15:19).” 하나님께 속한 자는 빛의 자녀로 살아가야 한다.

말이 아니라 삶이 달라야 한다

빛의 자녀로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세상과 구별되게 살아야 한다. 즉 세상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 그 이유가 2절이다. 그것은 육적인 젖이 아니라 신령한 젖을 사모하며 살아가야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를 때 기준이 있다. 다르되 완전히 달라야 한다. 1절의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에서 감사의 말, 위로가 되는 말을 해야 한다. 왜 완전히 달라야 하는가? 비슷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결국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과 생각이 달라야 한다. 말이 달라야 한다. 삶이 달라야 한다.

영화 《바울》에 보면 초대교회 당시 그리스도인의 삶은 완전히 달랐다. 로마가 그리스도인을 핍박했다.

핍박에 앞장선 로마 사령관 외동딸이 죽을 위기에 몰렸다. 죽을 지경에 이르자 사령관이 의사인 누가를 부른다. 부른 이유는 삶이 달랐기 때문이다. 바울과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달랐기 때문이다.

네로 황제는 로마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린다. 위기에 처한 그리스도인들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 피신해서 생명을 유지한다. 사령관이 그리스도인을 몰살시킬 준비를 한다.

몹시 아픈 사령관의 외동딸을 누가가 치료를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외동딸이 병 낫기 위해 함께 간절함으로 기도한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었나? 삶이 달랐기 때문이다.

지금 나라가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졌다. 진보의 목사들은 보수의 목사들을 목사로 보지 않는다. 보수의 그리스도인은 진보의 그리스도인들을 성도로 보지 않는다.

이는 성도의 삶이 세상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심지어 페북 친구 관계도 끊는다. 세상과 달라야 하는데 세상 사람과 다르지 않다.

정치는 모함이 일상이다. 경제는 불평등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그럼 교회는 다른가? 교회도 똑같다. 삶이 다르지 않다. 단 말만 다르게 할 뿐이다. 성도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

바울은 다르게 살았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는 그릇된 다름으로 살았다. 하지만 예수를 만난 뒤 완전히 달라진 삶을 살았다.

조선 시대에도 다르게 산 사람이 많았다. 바로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리 이원익이다. 지금도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에 가면 ‘관감당’이 있다. 이 집은 나라에서 이원익을 위해 지어준 집이다.

이원익이 84세 때 인조가 승지를 보내 위문했다. 위문 와서 거처에 대해 묻자, 이원익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띠 집이 낡아 비바람도 못 가릴 지경입니다” 즉, 살 만한 못 된다는 것이다.

그는 재상 40년에 몇 칸 모욕뿐이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그의 청렴함을 보고 느끼라는 뜻으로 나라에서 직접 집을 지어 주었는데 그 집이 ‘관감당’이다.

그가 청렴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좌우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뜻과 행동은 나보다 나은 사람과 견주고 분수와 복은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한다.”

이원익 대감의 삶은 남들과 달랐다. 그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가 전해지고 있다. 1573년 이원익 집은 어의동과 대동 사이에 있었다. 채벌이 금지 된 소나무를 베던 소년이 산지기에게 붙들렸다. 근처 허름한 집 마당에 늙은이가 해진 옷을 입고 앉아 자리를 짜고 있었다.

“여보, 영감! 내일 끌고 갈테니 이 아이를 잘 붙들어주오. 놓쳤다간 경을 칠 줄 아오.” 산지기가 가자 아이가 울었다. “왜 안가고 거기 있니?” “제가 달아나면 할아버지가 혼나잖아요?” “나는 일없다. 어서 가거라.”

이튿날 산지기가 와서 아이를 내놓으라고 야료를 부리다가 의정부 하인에게 혼이 나서 돌아갔다. 당시 그는 영의정이었다.

이원익 대감은 삶이 남들과 달랐다. 남과 다르게 결혼한 남자가 있다. 스티븐 코비의 《오늘 내 인생 최고의 날》 에 나오는 이야기다.

남태평양의 키니와타 섬에 자니 링고 라는 성실한 사람이 결혼을 한 후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결혼 지참금으로 암소 여덟 마리를 지불했기 때문이다. 보통은 암소 네 마리, 혹 세 마리, 두 마리면 된다. 하지만 그는 몇 갑절을 지불하고 그리 매력적이도 않은 사리타라는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

사실 사리타의 부모도 딸을 걱정했다. 시집이라도 보낼 수 있을까? 노심초사할 정도였다. 그런데 링고가 암소 여덟 마리에 사위가 된 것이다.

얼마 후 퍼트리샤 맥거라는 작가가 링고의 집을 방문했다. 그는 링고의 아내 사리타를 보는 순간 놀랐다. 소문과는 달리 너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빛나는 눈과 자신에 찬 미소, 당당한 걸음. 그래서 링고에게 물었다. 어떻게 소문과 이렇게 다를 수 있냐고?

“결혼 후에 여자들은 서로 이야기하면서 남편이 자신을 높은 가격으로 사왔다고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암소 네 마리를 줬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여섯 마리를 줬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암소 한두 마리에 팔려온 여자는 어떤 기분이겠습니까? 사리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암소 여덟 마리의 가치를 쳐 주는 순간 아내는 정말 암소 엷 마리 가치의 존재로 거듭났다. 우리는 자니 링고와 같이 남들과 다르게 살아야 한다.

다윗도 남들과 다르게 살았다. 다윗이 살기 위해 사울에게로부터 도망을 다녔다. 그러자 3,000명을 데리고 다윗을 죽이려고 엔게디 광양까지 쫓아왔다. 그 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만 벴다(삼상 24:4). 그 이유는 사무엘상 24장 6절 말씀처럼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기 때문”이었다.

다르게 사니 하나님께서 합한 사람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나를 바꿔야 한다

우리는 어떤가? 세상과 다르게 살고 있는가? 세상과 똑같이 살고 있는가? 갑질을 일상으로 하고 있는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손해를 기쁨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다윗, 오리 이원익, 사울과 같이 남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다르게 사신 분의 최고봉이다. 십자가에 죄인 위해 죽으시는 것은 달라도 너무 다르게 사셨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세상과 삶이 달라야 한다.

남과 다른 삶을 살려면 할 것이 있다. “나를 바꿔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이 바꾸는 것이다. 특히 자기를 바꾸는 것이다. 그렇다고 남을 바꾸는 것이 쉽다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바꾸는 것은 힘들다.

자동차 회사인 포르쉐 다지인실에 다음과 같은 말이 붙어 있다. “바꿔라, 그러나 바꾸지 마라!”

바꾸라는 것인지 바꾸지 말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어쨌든 바꿔야 살기 때문에 이 말을 썼을 것이다. 자동차 회사들은 하다 못해 외관이라고 바꿔야 경쟁력을 갖춘다.

이 말은 바꿀 것을 반드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바꾸지 않을 것을 바꾸지 말라는 것이다. 바꾸지 않을 것을 바꾸면 대책이 없을 뿐이다.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인 크리스티앙 디오르(Christian Dior)가 죽은 뒤 뒤를 이은 존 갈리아노 수석 디자이너가 한 말이 있다. “바꿀 수 있는 용기, 지킬 수 있는 용기”.

즉 크리스티앙 디오르와 존 갈리아노는 같은 말을 한 것이다.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지킬 수 있는 용기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은 살면서 가장 하기 힘든 것이 있는데 ’미안하다‘는 말이다. 회개보다 훨씬 쉬운 것인데도 미안하다는 말 하지 않는다.

시나리오 작가인 송정림은 그녀의 《참 좋은 당신을 만났습니다5》에서도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말은 ‘미안하다’는 말”이라고 한다.

그녀는 말하길, 고맙다는 표현보다, 사랑한다는 고백보다 미안하다는 사과는 입 밖으로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란다.

말하기 힘든 만큼 ‘미안하다’는 그 말은 상황을 다 좋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사과를 한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진정한 용기란 전쟁에서 ‘돌격 앞으로!’라고 외치는 것보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답은 하나님께 파묻히는 것이다

성도가 세상과 다른 삶을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께 파묻혀야 한다.

한양대학교 유영만 교수는 그의 책 《생각사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파묻히지 않으면 파묻힌다.”

‘파묻히다’는 두 가지 뜻을 갖고 있다. 첫 번째 ‘파묻히다’는 주변의 다른 것들이 훨씬 더 많거나 커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다는 의미다. 두 번째 ‘파묻히다’는 어떤 사물이나 일거리가 주변에 잔뜩 쌓여 그것에만 몰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자기 자신과 싸우는, 파묻히는 잠적과 잠복은 잠자는 세상을 흔들어 깨울 수 있는 잉태의 시간이다. 파묻혀 책을 읽어야 세월의 흐름에 떠밀려 파묻히지 않을 수 있다. 파묻히지 않기 위해서는 책에 파묻혀 세상의 지혜를 터득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성도가 세상과 다르게 살려면 하나님께 ‘파묻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말씀에 파묻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3절에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이 말씀이 성도가 다르게 살아야 하는 이유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므로 다르게 살아야 한다. 다르게 살려면 먼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경험해야 한다. 다음으로 하나님께 파묻혀야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릴 수 있도록 순종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오늘도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세상과 다른 삶이 성도의 삶이다.’

오늘 한 가지 질문하고 예배당으로 나가야 한다. “나는 세상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가?”

한 가지 다짐하고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살아갈 것이다.”

이러한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