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사람들은 ‘선악과(善惡果) 언약(창 2:17)’을 떠올리면, ‘아담이 선악과를 안 따먹었으면 영생(永生)을 얻게 됐을까?’ 라는 단순한 질문으로부터, 작금에 뜨거운 논쟁이 되고 있는 “영생이 그리스도의‘능동(能動) 순종’의 결과물인가 ‘수동(受動) 순종’의 결과물인가” 라는 무거운 신학적 주제까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리스도의 ‘능동 순종’을 영생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선악과 언약’에서 그 근거를 유추한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한 ‘선악과 언약’에는 ‘먹지 않으면 안 죽는다’는 추가적 명시가 따르지 않았어도, 그것까지 함의된 것으로 추정하여 아담이 선악과 언약을 지켰으면 영생을 얻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추정에 근거해, 아담이 실패한 율법 준수를 그리스도가 대신한 그의 ‘능동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영생을 끼쳤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율법을 준수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내용은 없다.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선악과 언약’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율법을 준수하는 한, 죽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담이 ‘선악과 언약’을 받은 후 얼마 동안 그 언약을 준수했는지 모른다. 단 한 달만 준수하고 막을 내렸는지, 10년 동안 준수했는지. 만약 전자였다면 ‘한 달 동안’ 생명을 향유 했을 것이고, 후자라면 ‘10년 동안’ 생명을 향유 했을 것이다.

설사 그가 1백년 동안 율법을 준수했더라도, 생명의 향유는 그때까지만 이다. 백년 이라는 율법 준수의 시간들이 그의 타락을 막아주거나 영생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영생은 은사

영생은 율법 준수의 결과가 아니다. 영생은 인간의 율법적 의(義)로 획득해낼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다. 무죄한 아담이 율법 준수로 보장받은 생명은 영생이 아닌, 죽음 가능한 유한된 생명이었다. 그것이 영생까지 담보해 주지 않았다.

그 생명은 율법 준수가 견지되는 한에서만 보장되는 조건적이고 한시적인 것이다. 이는 그의 율법적 의(義)는 무죄한 ‘인간의 의(義)’일 뿐, 영생을 보장해 줄 만한 ‘영원한 의’가 못되기 때문이다.

그가 율법을 준수했다고 아들이 되거나 영생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아브라함의 ‘의(義)’가 시내산 율법이 주어지기 430년 전, 율법과 상관없이 ‘믿음’에 의해 주어졌듯이(갈 3:17), 의(義)의 열매인 ‘영생(딛 3:7)’역시 율법 준수와 무관하게 예수 믿는 자(요 3:16; 6:40; 6:47, 요일 5:13)에게 주어지는 은사이다(롬 6:23).

곧 영원 전부터, 복음 전도를 통해 택자에게 주기로 약속된 것이다.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딛 1:2-3).”

‘영원부터 영원까지(from everlasting to everlasting)’라는 ‘영생’ 개념 역시 유한된 역사 속에서 불쑥 치고 들어온 ‘율법 준수’ 같은 것으로는 쟁취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영생’은 말 그대로 ‘영원’에 기반된 것이다. 만일 영생이 중간에 불쑥 들어온 어떤 것에 의해 쟁취될 수 있다면, 또 불쑥 들어온 어떤 것에 의해 훅 하고 날아갈 수도 있다.

◈아들로부터 오는 영생

‘영생’은 성부(창 21:33, 딤전 6:16)와 성자(요일 5:20) 삼위일체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이다(신약 성경은 ‘생명’과 ‘영생’을 종종 동일시한다(요일 5:11). 이 취지대로 여기서도 둘을 상호 교호적으로 사용한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영생)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요 5:26)’는 말씀 같은 것은 일견, 성자에게는 없던 생명이 성부로부터 유입됐다는 말처럼 들린다.

여기서 ‘아들에게 있게 한 생명’은 아들(聖子)이 자신의 구속(救贖)을 통해 생명을 시여(施輿)받았다는 뜻이다. 곧 아들이 택자의 대속물이 되어 ‘죄삯 사망(롬 6:23)’을 지불함으로써 아버지로부터 ‘생명’을 시여받았다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 5:11)”는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생은 아들이 그의 대속으로 획득한 생명이다’라는 의미로 받을 수 있다.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중보 기도에 나오는 ‘아들(聖子)의 셀프 거룩(I sanctify myself)’도 동일한 맥락이다.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

한량없이 거룩하신 성자께서 택자에게 거룩을 시여(施輿)하려고 대속자(代贖者)의 위치에서 자기 피로 자신을 다시 한 번 거룩하게 하셨다는 말이다.

“아들에게 생명이 있다(요일 5:11)”,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는 말씀은 한 마디로, ‘아들의 대속으로 마련한 생명만이 죄인에게 생명이 된다’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종합하면, “영생은 의(義)의 결과물이나(딛 3:7), 그 의는 인간의 율법적 의(義) 보다 나은 ‘하나님의 의’여야 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의’는 아들을 믿는 자에게만 시여된다(롬 3:21-22, 빌 3:9). 그리고 아들을 믿으려면 그는 반드시 죄인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모두를 한 마디로 축약하면, ‘영생은 죄인 되어 예수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사이다’로 귀결된다.

여기서 ‘영생’, ‘인간의 타락’, ‘그리스도의 구속’이 불가불리로 결속돼 있음을 본다. 성경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정했다(엡 1:4-5)”고 한 것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한 인간의 타락’이 예정됐다”는 뜻이다.

죄인이 아들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 얻도록 예정되고(행 13:8), 영생이 은사(恩賜)로 지칭된 것은 지극히 타당하다.

◈죄인만이 얻을 수 있는 영생

무죄한 의인이 얻을 수 없는 영생을 죄인이 얻게 하셨다. 아니 ‘의인이면 못 받고 죄인만이 받는 영생’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은혜의 법에 익숙한 우리 같은 이들에게는 한없이 감읍하게 하는 도리이다. 그러나 자연법과 행위의 법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이 같은 아이러니가 없다.

그들은 대개 엄청난 것일수록 그것을 취하는 데 엄청난 대가가 요구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임종을 앞둔 어떤 재벌이 그랬다 하지 않는가? ‘자기 생명을 6개월만 연장시켜주면 자기 재산 일부를 주겠다’고.

그런데 ‘영생’을 아무 대가 없이 믿음으로 받는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반전이 있다. 죄인이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는 영생은 ‘의’와 ‘영생’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의 가치를 극대화시킨다.

이는 죄인이 예수를 믿으면 영생의 유일한 자격인 ‘하나님의 의(義)’를 취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빌 3:9). 우리가 믿음을 의지하고 높이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3:7)”.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