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선물
ⓒPixabay
본문: 베드로전서 1장 20-25절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되다.”

이 말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지침서라 할 수 있다. 이 지침서는 성경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신앙인에게는 더 소중히 여길 지침서다.

“주는 자가 복되다.” 이 말씀을 실천한 분이 예수님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위해 주지 않아도 될 독생자까지 주셨다. 즉 죄인인 우리들에게 주실 수 있는 것 모두 주셨다.

하나님이 주시니 버려진 인간들에게 소망이 생겼다. 이 소망은 구원의 소망이다. 예수님을 통해서 주는 자가 복된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은 어떤가? 받고자 하는 사람으로 넘쳐난다. 주위에 주는 자를 찾기 힘들다. 예수님처럼 주는 자는 볼 수가 없다. 많이 가진 자는 주는 자여야 한다. 하지만 가진 자는 적게 가진 자의 것을 어떻게 빼앗을까 고민만 한다.

교회는 많이 가진 곳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주는 자여야 한다.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주면 하나님께서 흔들어 넘치게 준다고 하셨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

하지만 교회는 주지 않는다. 들어오는 출구는 열려 있는 데 주는 출구는 닫혀 있다. 이는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버렸다는 반증이다.

하나님은 냉수 한 그릇만 줘도 상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작은 자 중에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면 결단코 상을 잃지 않는다(마 10:42).”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라고 하신다. 우리는 받는 것을 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것에 모범을 보이셨다. 모범 중 하나가 주시되 조건 없이 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는 자가 돼야 한다. 지금까지 받는 자였다면 이제부터라도 주는 자가 돼야 한다.

주는 자가 되려면 잘 받는 자가 돼야 한다

주는 자가 되려면 앞서 할 일이 있다. 잘 받는 자가 돼야 한다. 사랑을 받아 본 사람이 사랑을 줄 수 있다. 결국 받는 것은 더 잘 주기 위함이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의 도움을 받는다. 도움을 받아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도움을 받는 대상은 먼저는 하나님이다. 다음으로 사람이다. 도움 받을 때 마음에 새길 것이 있다. ‘받은 것 두 배로 도와주겠다.’

인간이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송아지나 말들은 태어나자마자 걷는다. 인간은 걷기는커녕 기어 다니지도 못한다. 전적으로 부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성인이 되어서는 사회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한다. 시민이 되면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 외에는 도움 받을 곳이 없다

문제는 도움을 받을 곳에 많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힘없는 사람은 도움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최근 아사(餓死)로 죽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도움이 절실했는데 못 받았다. 관공서에 도움을 받으려면 절차가 복잡하다. 조건도 따라붙는다.

서민들은 은행 도움 못 받는다, 담보가 없다. 신용이 좋지 못하다. 결국 세상은 도움을 주지 않는다.

영화 《언니》에서도 언니 이시영이 동생을 찾기 위해 경찰서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경찰서는 도움을 주지 않았다.

필자도 한때 심히 어려웠다, 주위에 절박함으로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도움은커녕 마음에 비수만 꽂았다. 은행에도 도움을 청했다. 신용등급이 ‘10원’도 못 빌려주는 단계라는 말만 들었다.

세상은 말로는 도움을 주겠다고 한다. 어려우면 주민센터의 문을 두드리라고 한다. 그럼 자격을 묻는다. 자격을 갖추었으면 주민센터까지 가지도 않았다.

교회도 도움에 자격을 요구한다. 교인이냐고 묻는다. 자격을 갖추었으면 교회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럴 때, 갈 곳이 딱 한 분뿐이었다. 하나님이었다.

결국 하나님께 갔다. 하나님께 가니 자격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조건도 따지지 않았다. 도리어 말하지도 않았는데 넘치게 부어주셨다. 그 후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다. 막막한 삶에 한 쪽 창문부터 열렸다.

상황이 절박하면 하나님께 가라는 사인이다

그 때 깨달았다. “세상에는 도움을 청하는 곳이 못 되는구나!”. “인간은 주기만 해야 되는구나!” 세상은 얄궂기만 했다. 사람은 야속하기만 했다.

답은 하나님께만 있었다. 탈출구는 하나님께서 주셨다. 그 이후부터 세상에게는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아쉬운 말은 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를 한다.

우리의 상황이 절박해진 것은 하나님께 가라는 사인이다. 기도할 수 있는 한 기도하라는 명령이다. 사람에게 가면 마이너스가 된다. 하나님께 가면 플러스만 된다. 사람에게 플러스를 기대하는 그 자체가 인생의 마이너스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것을 알기에 시편 기자가 이런 말을 했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시 115:10).”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께 가서 도움을 청해야 한다. 아는 사람 찾아가봐야 헛수고다. 믿는 하나님께 가면 소위 대박이다.

필자는 하나님께 간 뒤 신앙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이 없으면 갈 때가 없다. 그저 신세 한탄하다가 외로운 섬과 같은 존재로만 남는다. 하지만 신앙생활 하면 하나님께 갈 수 있다. 그럼 상황이 역전된다.

여기 있는 분들 중에 아직 하나님께 자신 있게 갈 수 없다면 신앙을 갖아야 한다. 그럴 때 역전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신앙생활이란 ‘도움의 출처 알기’다

이럴 때 필자는 신앙생활에 대해 제 나름의 정의를 내렸다. 신앙생활이란? ‘도움의 출처 알기’였다. 또한 신앙생활이란 ‘도움의 출처 캐기’였다.

도움의 출처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다. 문제는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들이 도움의 출처를 잘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에게 도움을 청한다. 친구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는 인간의 본성을 몰라서 그렇다.

인간은 도움을 주는 자가 아니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다. 도움을 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다. 그 이유는 인간의 본성 자체가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존재이기 떄문이다.

도움의 출처는 오직 하나님뿐이다

사람은 도움이 안 된다. 그럼 국가는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가? ‘글쎄다!’ 최근 〈PD 수첩〉에서 필리핀 경찰이 남편을 납치해 살해한 사건을 방영했다. 미망인이 영사관에 도움을 청하니 도와주지 않았단다. 미국, 중국, 일본은 자국민이 끔찍한 일을 당하면 국가가 필리핀을 압박해서라도 해결해 준다. 하지만 한국은 당사자가 해결해야 한다.

종종 듣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 해외여행 갔다가 사고가 나면 영사관은 변호사 정도만 연결해준단다. 외국에 비행기가 도착하자마자 외교관 번호가 찍힌다. 도와주지 않는데 왜 매 번 번호를 남기는지 모르겠다. 도와줄 때만 남겨야 한다.

우리나라 재벌들은 국가와 국민들의 애국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그럼 재벌들은 국민들에게 혜택을 주는? 시민들 더 등쳐먹지 못해서 안달이다. 대기업은 시민들 피를 빨아서 문어발식 확장만 일삼고 있다. 그러다가 재정적인 압박이 생기면 국민들 세금으로 도와달라고 한다.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도움의 출처는 오직 하나님뿐이란 사실이다. 육적인 문제든 영적인 문제든 가릴 것 없다. 특히 영적인 도움은 하나님만이 유일하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기 때문이다(21절).”

그럼 왜 하나님만이 도움이 되는가? 하나님만이 시작과 끝 즉 알파와 오메가가 되기 때문이다. 시작과 끝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작했으면 끝까지 갈 수 없다. ‘작심삼일’이란 말이 있다. 1년을 작정했는데 삼일 만에 끝났다는 것이다. 김옥균도 갑신정변으로 나라를 개혁하고자 했다. 하지만 삼일 만에 끝났다. 인간은 끝을 맺기가 힘들다. 끝을 맺을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다. 그러므로 시작과 끝인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메타인지’를 갖고 있어야 한다

구원의 여정 중에 “견인”이란 것이 있다. 구원도 하나님의 견인이 없으면 끝까지 갈 수 없다. 삶도 마찬가지다. ‘은혜’라는 것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때 결론을 맺을 수 있다. 시작된 것을 끝까지 가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는 인간이 시작되면서부터 그랬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독자적으로 하니 시작은 했는데 끝이 안 좋았다. 그 결과 짓지 않아야 할 원죄를 지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할 인간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는가?

자기가 누군가를 정확히 몰랐기 때문이다. ‘메타인지’ 라는 말이 있다. 자기가 누구인지 아는 것을 말한다.

인간이 자기가 누구인지 알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다. 인간의 유한을 알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다. 나약함을 알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한다.

이런 자기를 정확히 모르니 선악과 따먹을 때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 자신을 정확하게 알았다면 따먹기 전에 하나님께 물어볼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하는 이유: 연약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왜 인간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하는가? 인간은 “풀의 꽃과 같은 존재(24절)”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인간이 별 것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은 풀과 같이 나약하다. 그러니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반대로, 하나님은 어떤가?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다. 시작했으면 끝을 맺으신다. 반면 인간은 시작만 한다. 개혁도 시작만 한다. 정치도 시작만 잘 한다. 처음에는 정치를 잘 한다. 중간만 넘어가면 국민들이 불신이 시작된다. 끝은 불행하다.

이유는 인간은 풀의 꽃과 같기 때문이다. 시간만 조금 지나면 시든다. 끝까지 가는 것에는 소망이 전무하다. 더 나아가 썩어짐이 번개와 같이 빠르다.

하나님은 어떠신가? 시작도 좋으시다. 끝은 더 좋으시다. 그 이유는 25절에 말씀처럼 “하나님은 세세토록 있기 때문이다(25절).”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있다. 봄이 왔다 싶으면 여름이 온다. 가을을 만끽하려는 찰나 겨울이 문턱에 다다른다. 노란 개나리꽃이 만개했다가 몇 주도 안 되어 초록색으로 변한다. 세상 것은 시작은 화려하다. 하지만 한 철도 못가서 사라진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하는 이유: 환경의 방해꾼 때문이다

인간이 끝까지 못하는 것은 연약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방해꾼이 있다. 환경이다. 시작한 것이 끝까지 가지 못하는 인간의 의지보다 사회적 영향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신앙보다 사회적 영향력이 더 강하다.

리처드 니스펫(Richard E. Nisbett)과 리 로스(Lee Ross)는 그들이 공저한 《사람일까 상황일까》에서 잘 보여준다.

그들이 한 실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 실험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질문한다. “누가 선한 이웃이냐?”

달리와 뱃슨이란 사람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우화를 기반으로 한 실험을 했다. ‘종교적인 사람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요소가 있는가?’라는 실험이다. 실험의 결과는 신앙적인 것은 무관하다는 것이었다.

달리와 뱃슨은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했다. 새 건물로 가는 길에 출입구에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만난다. 바쁘지 않은 실험 참가자 중 63%는 가던 길을 멈추고 ‘피해자’에게 도움을 주었다. 바쁘게 길을 가던 실험 참가자는 단 10%만 도움을 주었다.

반면 종교 지향적 성격에 관한 측정은 실험 참가자들이 길을 멈추고 도움을 줄지 말지 결정하는데 실질적으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실험의 결과는 신앙심이 아니라, 바쁜 가 바쁘지 않은가라는 환경 여부였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하는 이유: 목표를 이룰 수 있는 확률은 고작 8%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이유를 통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새해가 되면 목표를 세운다. 2014년에 시행한 어느 조사에 따르면 그 해 시작한 목표를 이룰 가능성은 고작 8%라고 한다. 92%는 항상 달성하지 못한 채 목표만 세울 뿐이었다.

고작 8%만 목표를 달성한다면 인간은 자기 힘으로 끝까지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카구치 교헤어라는 일본 작가는 “중요한 것은 재능이 아니라 지속이다”라고 말했다.

그럼 끝까지 가지 못하는 것은 의지력의 문제인가? 습관의 문제인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썩어질 것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말씀이 아니라 세상의 지식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끝까지 가지 못하는 것은 눈앞의 보상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시작한 것은 끝까지 가야 한다. 그 이유는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기 때문이다(벧전 1:25)” 인간은 풀과 같이 쉽게 마르지만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 그러므로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말씀을 붙은 사람들은 끝까지 한다. 말씀을 붙들지 않은 사람들은 끝까지 가지 못한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끝까지 붙들었다. 그 결과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삼손은 말씀을 끝까지 붙들지 않았다. 그 결과 하나님으로 왔던 힘을 잃었다. 예수님은 말씀을 끝까지 붙들었다. 그 결과 십자가로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했다.

뭐든 일단 시작했으면 끝까지 가야 한다. 조건이 있다.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가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은 끝까지 가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도중에 놓지 않는다. 끝까지 함께 간다.

끝까지 가려면 견뎌야 한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이 남아 있다. 우리도 끝까지 가야 한다. 끝까지 가려면 견뎌야 한다.

마가복음 13장 13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끝까지 견뎌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신다. 견딜 때 조건이 있다. ‘끝까지’ 견디는 것이다. 만약 도중에 포기하면 그때까지 견딘 것도 견딘 것이 아니다.

요셉도 끝까지 견뎠다. 믿음으로 살았다. 보디발 집에서도, 감옥에서도, 총리가 되어서도 끝까지 믿음으로 살았다. 요셉이 믿음으로 끝까지 견디었더니 민족을 구원했다. 애굽도 7년 흉년에서 건져냈다.

끝까지 가려면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또한 끝까지 견디려면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그 이유는 말씀은 플러스를 만들기 때문이다. 시간도 마이너스를 만든다. 시간이 흐르면 마이너스가 된다. 결국 사람은 마이너스의 화신이다. 손대는 것마다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말씀을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만 우리의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신다

조던 피터슨의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서 법칙 세 번째에서 ‘당신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만 만나라’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야 할 이유다. 사람은 최악을 기대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정상이다. 우리에게 최고를 기대하는 분은 하나님뿐이다.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신다.

조던 피터슨은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려면 강인한 의지와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겸손해야 하고,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끝까지 가려면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예수님과 끝까지 가야 한다.

집문 밖으로만 나가면 길을 만난다. 그 길은 예수님의 길이 아니다. 세상길이다. 세상길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 ‘갈림길’, ‘막다른길’, ‘마지막 길’이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우리가 만날 길은 ‘마지막 길’이다. ‘갈림길’은 방황하게 한다. ‘막다른 길’은 절망하게 한다. 하지만 ‘마지막 길’은 희망을 갖게 한다.

그 마지막 길은 죽음의 길이 아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다.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 살 길이다. 생명의 길이다.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길에 들어선 길이다.

예수님과 함께 가는 길이 믿음의 길이다. 이 믿음의 길은 ‘포기하지 않는 길’이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때가 이르면 끝을 본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바울은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거둔다고 한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아멘!

포기하면 거두지 못하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거둔다. 믿음의 길은 포기하지 않는 길이다. 그럴 때 견디며 포기하지 않고 갈 수 있다. 종국에는 결실을 이루게 된다.

필자와 여러분은 시작했으면 끝을 볼 수 있는 믿음의 길을 갈 수 있기를 축복한다.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