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어떤 교회들은 말끝마다 ‘성령 하나님’, ‘성령님’ 운운하며 지나치게 성령에만 ‘올인’한다. 소위 성령파(聖靈派, 오순절파)교회들이다.

정반대로 어떤 교회들은 성령이라는 단어를 터부(taboo)시하여, 아예 교회 안에서 ‘성령’이라는 단어 사용 자체를 엄금시키기까지 한다. ‘성령파’의 열광주의, 은사주의, 신비주의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에서이다.

그렇게까진 아니더라도, 성령을 적극적으로 말하지 않는 교회들도 있다. 그 중 일부는 성부 하나님만을 도드라지게 강조하며 성자 그리스도나 성령에 대한 언급은 희귀하다. 주로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를 표방하는 전통적 교회들 가운데서 발견된다.

‘하나님 중심’을 들고 나오니, 누구도 그들에 대해 감히 이렇다 저렇다 하질 못한다. 그러나 이들의 ‘하나님 중심’을 들여다 보면, ‘삼위(位)일체 하나님 중심’이라기보다는 유대교의 단일신론(monarchianism, 單一神論)적 ‘하나님 중심’과 유사해 보인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에만 올인하는 ‘예수파들(Jesusists)’도 있다. 이들은 예수만 강조하면 다 진국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들은 말마다 예수이고, 성부나 성령을 언급하는 데는 소극적이다. 주로 복음주의나 자유주의(둘은 좌·우의 대립적인 위치를 점한다)를 표방하는 교회들 가운데서 발견된다. 이들 역시 온전한 ‘삼위일체 신앙’에는 미치지 못한다.

주지하듯, ‘삼위일체 신앙’이란 ‘사도신경’의 고백 그대로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位格)을 믿으며, 상시 ‘삼위(位) 하나님’을 의식하고 고백하는 신앙을 의미한다. 결코 삼위(三位) 중 한 위격(位格)만을 언급, 고백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단지 하나의 신학 이론이나 변증주제가 아닌, 하나님의 존재방식이다.

‘성부’ 하나님이 현현(顯現)하면, ‘성자’도 ‘성령’도 일체(一體)로 현현하신다. 성자, 성령 역시 그렇게 현현하신다. 하나님은 단지 한 위격(位格)으로만 현현하는 법이 없다. 불경(不敬)스러운 비유가 될지 모르나, 그것은 사람 몸의 한 부분만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이해나 증거방식이 ‘삼위일체적’일 것을 요구한다. 우리의 신앙고백이나 하나님 언어가 한 위격(位格)에만 경도(傾度)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왜곡이고 불경이다.

이런 왜곡은 세 위격(位格)간의 관계설정 미숙, 특히 성육신 하신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결여 그리고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世代主義) 같은 삼위일체에 대한 그릇된 이해 때문으로 여겨진다.

◈하나님 신앙을 실존적으로 만드는 성령

지고(至高)하신 하나님은 오직 성령으로만 성도에게 찾아오신다. 신인(神人)이신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하나님이 비천한 인간에게 임마누엘(Immanuel, 마 1:23) 하실 수 없다.

‘성육신(Incarnation, 成肉身)’이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현현(顯現)한 것이라면, ‘성령 강림’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영으로 현현하신 것이다. 성도에게 현현한 성령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을 ‘실존적(existential)’이 되게 한다.

물론 여기서 ‘실존적’이라 함은 철학적 사변(思辨)개념으로서의 ‘실존주의(existentialism, 實存主義)’와 구분된다. 한 마디로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님 체험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하나님체험이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하나님인식에서 건져준다.

그러나 이렇게 성령을 체험과 연결지으면, ‘그럼 성령파들과 뭐가 다른데?’라며, 곧장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겅 보고도 놀란다’는 식으로, ‘성령파’에 학을 뗀 이들이 나타내는 일종의 알레르기 반응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체험적 인식’ 운운하는 것은 하나님 신앙이 순전히 인식론적으로만 머물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이는 철학자들의 거대 담론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우리의 일상적 경험들을 통해서도 충분히 설명된다. 말하자면 체험이 배제된 ‘인식만의 인식(사변적 인식)’은 없다며, ‘순수 이성’을 비판했던 칸트(Kant, Immanuel, 1724-1804)적 이해 같은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물(水)’이라는 개념을 가졌다고 할 때, 그것은 순수한 사변적(theoretical, 思辨的) 인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체험적 인식이기도 하다. ‘체험’이 따르지 않는 순수 사변적인 ‘물(水) 인식’이란 없다.

그릇에 담긴 물이나 호수에 대한 객관적인 인지만으로 ‘물’을 충분히 인식했다고 볼 수 없다(호수의 잔잔한 물결을 보고 마음의 고요함을 느꼈다면 이것 역시 단지 관찰적 인식만이 아닌 이미 체험적 인식이다).

그것에 손을 담그기도 하고, 갈증날 때 그것을 마셔도 보고 그 안에서 수영도 하며, ‘물’에 대한 총합적이고 체험적인 인식을 가질 때, 비로소 ‘물’에 대한 관념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사물에 대한 인식에 직접 빗댈 순 없다. 초월적 존재인 하나님은 유한자(有限者) 인간의 인식 체계로는 파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1:21). 그래서 하나님이 초월자인 당신을 체험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셨고,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것이 가능해졌다.

◈성령에 대해 지나치게 말하지 않음

앞서도 언급 했듯이, 삼위 중 지나치게 성령에 경도(傾度)되고 방언, 신유, 표적 같은 체험에 치중하는 ‘성령파’에 거부감을 가진 이들은, 가능한 ‘성령’을 ‘체험’과 결부시키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성령의 사역도 ‘체험’과 무관한 ‘거듭남’,‘믿음’같은 은밀 사역에 국한지운다.

사실 둘은 성령의 본질적인 사역이며(John Calvin), 이것이 성취됐다면 성령 사역의 목적에 도달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숙지한 ‘반(反)성령파들’은 “비본질적(?) ‘성령 체험’같은 것을 도입해 혼란을 부추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신앙의 체험적 측면을 좌시하게 했다.

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이 외에도, 20세기 중반 신학의 미성숙과 혼란스런 시대 상황과의 맞물림 속에서 열광주의, 신비주의의 창궐을 경험했던 한국교회의 아픈 기억들이 그것의 좌시(坐視)에 한 몫 하게 했다. 또 “일제 강점기 때, '성령파’들은 일본의 신사(神祀)에 무릎을 꿇었으나, ‘말씀파’들은 끝까지 그것에 항거했다”는 미상(未詳)의 소문 같은 것도 그것에 일조하게 했다.

성령에 대한 이런 한국교회 일부의 부정적 인식들이 ‘반(反)성령’ 기류를 생성하고 신앙 체험에 소극적이 되게 하여, 사람들의 신앙을 건조한 주지주의로 흐르게 했다.

나아가 성령이 갖다 주는 온갖 풍성한 축복들과 신앙과 삶 속에 경륜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못하게 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롬 5:5)과 임마누엘(마 1:23)의 생생한 축복, 복음의 감격 같은 다양한 체험들을 충분히 만끽하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성령의 축복들은 ‘성령파’의 주장처럼 그들에게 성령이 없어서가 아니라 성령에 대한 무지(無知)와 무시(無視) 때문이며, 이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한(행 19:2)’ 에베소교회를 연상시킨다.

특별히 복음 전도에 있어 성령의 역할은 치명적인 중요성을 갖는데, 성령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이 복음의 유일한 교사인 성령(요일 2:27)을 전심으로 의지하지 못하게 하므로 복음 사역에 난항을 겪게 한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심으로(고전 2:4, 벧전 1:12)’,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는 것(고전 2:13)’이 무슨 말인지를 알지 못한다.

성령에 무관심한 복음사역자들이 복음의 확신(살전 1:5)이 결여되고 무력감에 빠질 것은 뻔한 이치이다. 다시 말하지만, 다른 것들은 차치하고 ‘성령파’에 대한 거부감이 ‘반(反)성령파’를 양산하고, 사람들을 성령에 소극적으로 만들어 복음 사역이 활성화 되지 못한다면, 하나님 편에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만시지탄이지만, 지금이라도 시급히 성령에 대한 균형 잡힌 인식이 회복됐으면 좋겠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