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예수 믿으면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예수 신앙’ 혹은 ‘믿음의 의(義)’는 미중생(未重生)한 자연인(the natural)에겐 낯선 의(義)이다(고전 2:9). 아니 낯섦 정도가 아닌 적대적이기까지 하다(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 육신에 속하여 육신의 생각을 하는 미중생자(未重生者)는 영의 생각인 ‘예수 신앙’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다(후로는 ‘예수 신앙’과 ‘믿음의 의’를 동일시하여 ‘상호 교호적’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성경은 이 ‘예수 신앙’을 성령이 아니고서는 수납할 수 없는(고전 12:3) ‘성령의 신앙’이라고 했다. 성령을 보내주신 가장 중요한 목적도 이 낯선 ‘믿음의 의’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요 15:26; 16:9-10).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은 ‘믿음의 의’ 같은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전 2:12)고 했다.

‘예수 신앙’을 ‘계시신앙’이라 하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수납 가능하고, 하나님의 선물(엡 2:8)이라 명명한 것이나 가인, 발람을 비롯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모든 이들을 ‘성령이 없는 자(유 1:4-19)’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반면 ‘행함의 의(義)’에 익숙한 ‘자연 종교(natural religion)’는 성령의 신앙인 ‘믿음의 의(義)’와 대척점에 선다. 이는 인간 본성의 법 곧, ‘양심(良心)’이 본능적으로 ‘행함의 의’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의 본성으로 가납되는 ‘행함의 의’는 그것의 수용을 위해 초자연적인 성령의 부어짐 같은 것이 필요치 않다.

본성의 인도를 받는 율법주의자들이나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신앙에서 ‘성령’이 언급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며, 성령으로만 받아들여지는 ‘믿음의 의’같은 것은 그들에게 낯설기 마련이다.

◈믿음의 법

오랜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생겨난 ‘관습(慣習, custom)’과는 달리 ‘법(法, law)’은 필요에 의해 제정된 것으로 의도성과 강제성을 띤다. ‘특별사면법(特別赦免法)’ 같은 것을 예로 들어보자. 죄인은 죄값을 달게 받아야 한다는 것이 일반의 가치관인데, 중범죄자가 하루아침에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는 ‘특별 사면’같은 것은 사람들에게 쉽게 용인되기 어렵다.

이런 국민들의 법 정서를 아는 국가는 행정 수반의 강력한 권위가 뒷받침돼야만 그것을 집행할 수 있음을 알고 ‘대통령령(令)’으로 그것을 제정했다.

‘믿음의 의(義)’가 의도성과 강제성을 띤 ‘법(롬 3:26)’으로 제정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행위의 의(義)’를 숭상하는 세상 가치관으로 볼 때 ‘믿음의 의’는 생뚱맞기 짝이 없기에 강제성을 띤 ‘법’적 성격을 띠어야 했다.

아무 의가 없는 죄인이 다만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일반의 종교가치관이나 윤리와 배치되기에, 최고 주권자 하나님의 법적 권위를 입힌 것이다.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the law of faith)’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7-28).”

전적 무능한 인간을 구원하는 데는 ‘믿음의 의’외는 다른 방법이 없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자비시여로, 또한 사람들의 입을 막고자 그것을 ‘법’으로 제정한 것이다.

‘특별사면(特別赦免)’이 ‘대통령령(令)’의 권위로 보호받게 했듯이, ‘믿음의 의(義)’도 하나님의 법적 권위를 입게 하여 반대자들의 공격에서 보호받게 했다.

나아가 이 ‘믿음의 의'의 ‘법’은 세상의 법과는 달리 도무지 자연인(the natural)과 친근해 질 수 없는 독특한 것임을 명징(明徵)하고자 한다.

통상적으로 세상의 법은 그것이 처음 제정됐을 땐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지만, 점차 상용화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파격적인 ‘특별사면법’ 같은 것도 점차 국민들의 이해를 획득하면 ‘이런 불법이 어딨어?’라고 핏대를 세웠던 사람들까지도 그것을 수납하게 한다.

‘사람은 왼쪽’이라는 도로교통법에 오래 익숙해 있던 한국 사람들에게, 요 몇 년 전부터 ‘사람의 오른쪽’으로 법규가 바뀌어졌을 때도, 사람들은 그것을 어색하기 짝이 없어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그것에 점차 익숙해졌다.

그런데 ‘믿음의 의’라는 ‘법’은 기독교인들에게 그렇게 오래 귀에 익숙하지만 여전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아브라함을 통해 계시된 ‘믿음의 의’는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보다 430년 앞서 주어졌기에(갈 3:17), 전자가 후자보다 더 익숙할 법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여전히 사람들은 후자인 율법에 더욱 익숙하다.

이는 이미 지적했듯이, ‘믿음의 의’는 근본 인간 본성에 맞지 않을 뿐더러 그것과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거듭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복음을 듣고 성령의 가르침을 받을 때는 그것을 확신하지만, 육신의 생각이 지배할 때는 낯설어진다. 이런 변덕은 그들로 하여금, ‘난 진정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라는 의구심까지 품게 한다(이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 신앙이 얼마나 불가능한가를 짐작케 한다).

이는 루터(Martin Luther)가 “‘믿음의 의’는 죄인에게 언제나 ‘낯선 의’이기에 그것을 매일 들어야 한다”고 했던 말에서도 확인된다.

그의 말을 풀이해 보면, ‘복음은 어제 듣고 오늘 들어도 여전히 새롭다’혹은, ‘어제 복음을 들었어도 오늘 듣지 않으면 낯설어진다’는 뜻이기도 하고, ‘복음의 은혜는 날마다 듣고 날마다 갱신돼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는 매일 매일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고 구현돼야 할 진리이다. 이러한 ‘믿음의 의’의 속성을 아는 설교자는 강단에 설 때 마다 복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믿음의 의’는 기독교 입문시에나 필요한 도의 초보이기에 보다 높은 가르침의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복음의 낯설음(unfamiliarity with the gospel)’을 모르는 자들이다. 오직 성령의 가르침으로만 해득되는 복음은 세상에서 가장 수준 높은 진리이다. 누가 이 복음을 얕보는가?

◈심판을 위해

‘믿음의 의’가 불택자들에게 낯설고 원수처럼 여겨지게 된 데는 하나님의 ‘유기(遺棄, Reprobation)’ 경륜이 숨어있다. 곧 ‘성령의 거듭남’이 없는 한, 그의 자력으로는 ‘믿음의 의’를 가질 수 없게 하므로, 그들을 유기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깃들어 있다 는 말이다. 예수님이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해 한 말씀도 같은 맥락이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 13:14-16).”

기독교의 심판관(審判觀)은 하나님이 새로운 어떤 것을 부과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에 대한 낯섦과 적대감으로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함으로서, 이미 받은 율법의 정죄 아래 그를 방치시키는 ‘유기(遺棄, Reprobation, 롬 1:28)’ 개념이다. 이는 예수님이 ‘믿지 않는 자는 벌써 심판을 받았다(요 3:18)’는 말씀에서도 확인된다.

반면에 구원은 그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내어주고(요일 4:10),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고(요 3:5), 복음으로 구원에의 부르심을 부르신(살후 2:14) 삼위 하나님의 수고의 결과물이다. 곧 하나님의 자기희생으로 말미암은 ‘적극적인 사랑’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적극적 구원 개념은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예정’, ‘중생’을 중시하게 할 뿐더러, 전체 구원 경륜에서 ‘하나님 주권’을 인정해 드리게 한다.

나아가 이런 하나님 주권적 구원관은 인간의 입지(立地, position)를 극대화시키는 알미니안들(arminians) 과는 달리 인간의 입지를 제로(Zero)로 만들고, 인간의 ‘믿음’마저도 수동적인 선물(엡 2:8)이 되게 한다.

‘믿음의 의(義)’에 대한 무관심은 흔히 생각하듯 독서, 스포츠, 예술, 종교 등 문화적 무관심 같은 것이 아닌, 하나님의 유기(遺棄, Reprobation) 심판으로 인한 인간 최대의 저주에 빠뜨려진 것이다.

반면 누가 ‘믿음의 의’ 혹은 ‘예수 신앙’이 그의 지상 최대의 관심사가 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그는 지금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밀을 아는 자가 복되도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