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보리울의 달
▲만화 <한서 남궁억> 中.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키아츠 제공
1905년에 남궁억은 고종의 부름을 받고 다시 경상도 성주의 목사(牧使)로서 관직에 올랐다. 성주에는 이용구라는 사람이 일진회 성주지부장을 맡아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는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남궁억을 궁지에 빠뜨려 일을 방해했지만 평소에 청렴결백을 목숨처럼 지키는 남궁 목사는 굽힘없이 직무를 보아 나갔다.
그러던 중에 경상도 관찰사가 비밀리에 서찰을 보내 왔다.

“성주 목사는 보시오. 황금 2천 냥, 인삼 1천 근, 명주 5백 필을 마련해 올리시오.”

남궁억은 곧장 서찰을 구겨 움켜쥐며 혼잣말을 했다.

“백성들은 가뜩이나 굶주린 판에 이놈은 제 배만 채우기에 바쁜 아귀 같구나. 그들에게 이만한 재물도 없거니와 만일 쌀 한 줌이라도 공출하면 무엇으로 가족을 먹여 살린단 말인가? 절대로 안 될 말이다!”

남궁억 성주 목사는 상관인 경상도 관찰사가 있는 대구로 달려갔다. 관찰사 이근택을 만난 남궁억은 그 자리에서 말했다.

“부당한 상납 명령에 불응하오. 그만한 재물을 공출하면 백성들은 거지가 될 것이오.”

“무슨 말이 그리 많소. 다른 데서는 다 하는 일을 왜 당신만 못한단 소리요. 그런 능력이 없으면 당장 물러나시오.”

돼지같이 뒤룩뒤룩 살찐 이근택은 콧방귀를 뀌었다.

“이놈! 벼슬을 네가 준 것이더냐?”

남궁억 목사는 관찰사를 향해 소리치며 옆에 있던 벼루를 집어 던졌다. 이근택의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그는 남궁억의 기세에 눌려 방으로 피해 버렸다. 남궁억은 그 길로 목사직을 사임하려 했다.

그러나 고종의 간곡한 요구로 계속 목사직을 맡아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다가 얼마 후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나라를 빼앗자 통분을 참지 못하고 사임했다.

그것이 고종 황제와 맺어졌던 인연의 마지막이었다.

그런 고종 황제가 세상을 떠났으니 남궁억은 슬픔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도무지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일국의 황제가 그동안 일본의 감시 아래 궁 안에만 갇혀 지내며 바깥 세상을 전혀 구경할 수 없었다는 사실 자체가 황당한 노릇이었다.

남궁억은 덕수궁이 있을 저쪽 먼 하늘을 쳐다보며 시름겹게 한숨지었다.
하지만 아무리 슬프다 한들 심심산골 보리울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보리울의 달 한서 남궁억
▲소설 <보리울의 달> 저자 김영권, 제작 키아츠 <보리울의 달>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소설화된 파란만장한 인생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도록 안내한다. 만화 <한서 남궁억>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한서 남궁억>은 남궁억 선생의 위대하고도 큰 뜻을 남녀노소 모든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화로 표현한 책이다. 남궁억 선생이 여러 등장인물과 역사를 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실감나고 흥미롭게 담겨 있다.
경성의 분위기엔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았다.

고종의 의심스런 죽음은 억눌린 채 속으로만 부글부글 끓고 있던 한민족의 감정에 불씨를 던져 넣은 격이었다.

덕수궁에서 기거하던 고종 황제는 당시 68세로 비교적 건강한 편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런 중병으로 붕어했다는 발표가 있자 백성들은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때 마침 일본 스파이가 독살했다는 말이 퍼져 온 백성들은 나라 잃은 설움과 함께 일본에 대한 적개심으로 크게 요동쳤다.

고종의 장례식 때 서울 거리는 흰옷 입은 사람들이 몰려 나와 거대한 대성통곡의 물결을 이루었다.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상여가 출발하자 울음의 물결도 함께 움직였다. 일본 경찰들이 길 양옆에 쭉 늘어서서 감시하며 따라 걸었다.

백성들의 반일 감정이 용암처럼 끓고 있다는 사실을 안 우리 조선민족 대표 33인은 거국적인 만세운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3월 1일 오후 2시, 민족 대표들은 서울 인사동의 태화관(泰和館)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펼쳤다. 만해 한용운이 일어나 우렁찬 목소리로 낭독했다.

“우리들은 이제 우리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만방에 알려 인류 평등의 큰 뜻을 밝히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알려 민족 자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노라….”

즉시 일본경찰대 80여 명이 달려와 태화관을 포위했다.

한용운은 계속 우렁찬 목소리로 낭독을 했다. 공약 3장의 낭독이 끝난 다음 모두 함께 일어나 크게 외쳤다.

“대한독립 만세!”

일본 경찰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민족 대표들을 체포했다. 민족 대표들은 의연하게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갔다.

한편 그 무렵 탑골공원에는 서울의 남녀 학생 5천여 명이 몰려와서 독립선언식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연행되어 간 민족 대표들이 올 리가 없었다.

탑골공원은 바로 남궁억이 토목국장 시절에 조정 대신들의 많은 반대를 물리치고 만든 곳이었다.

오후 2시가 되자 한 청년이 단상으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낭독이 끝나자 학생들은 모자를 하늘로 날리며 외쳤다.

“대한독립 만세!”

그러고는 모두 함께 종로 쪽으로 뛰쳐나가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그 속에는 예전에 남궁억 선생으로부터 독립정신을 배운 배화학당의 학생들도 여럿 섞여 있었다.

수많은 군중이 호응해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펼쳤다. 시위 대열이 대한문 앞에 이르렀을 때는 온 서울 시내가 흥분된 군중들의 만세소리로 들끓었다. 시위행렬은 대한문 앞에 이르러 고종 황제의 빈전(殯殿; 관을 넣어둔 전각)을 향해 예를 올렸다.

그리고 대열을 나누어 한쪽은 정동의 미국 영사관 쪽으로 향하고, 다른 한 대열은 남대문을 지나 왜성대(倭城臺)의 총독부로 향하였다.

만세시위 행진은 여러 동네로 퍼져 되풀이되었으며 해질 무렵부터는 교외로 번져 나갔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공약 3장에 밝힌 대로 질서를 유지했기 때문에 단 한 건의 폭력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달라졌다.

한민족의 평화적인 시위에 대해 일본 당국이 군인과 경찰을 투입하여 강제로 해산시키려 들었기 때문에 시위는 점차 과격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울에서 3월 1일에 점화된 독립만세운동의 불길은 날이 갈수록 전국으로 번져 나갔다.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는 유관순 학생이 수천 명의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맨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격렬하게 시위를 펼쳤다. 일본 경찰의 총칼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피살당하고, 그녀는 시위 주동자로 잡혀 끌려갔다.

감옥에서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으나 그녀는 끝내 굴하지 않았다. 형무소에서 복역 중에도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불렀고 그때마다 형무관에게 끌려가 모진 악형을 받았다.

만세 시위는 바다를 건너 제주도에까지 번져 우리나라의 역사상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발전해 나갔다.

김영권 남궁억
▲본지에 <꽃불 영혼>에 이어 <보리울의 달>을 연재하고 있는 김영권 작가.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걷는 동상>,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