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조국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는 조국 법무부 장관. ⓒ청와대
성경 속의 공의: 공의의 성경적 어원

구약성경에 사용된 ‘공의(公義, justice)’라는 말은 히브리어 ‘미쉬팟(מִשְׁפָט, mishpat)’과 ‘체다카(צְדָקָה, tsedaqah)’를 번역한 것이다.

이중 미쉬팟은 주로 제도적, 법률적 의미에서의 공평, 옳음을 의미하며, 재판과 관련해 많이 사용된다. 반면 체다카는 보다 넓은 삶의 차원, 신앙 차원에서의 의로움을 뜻한다.

이 말이 신약성경에서는 하나의 단어로 통합된다. 그리스어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 dikaiosyne)’가 바로 그것이다.

비록 구약에서 둘로 나뉘어 사용되던 말이 하나로 합쳐졌지만, 양측의 의미는 이 한 단어 안에 모두 보존되어 있다. 디카이오쉬네의 의미는 ‘법적, 제도적 공평’과 ‘삶과 신앙 차원에서의 의로움’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이중 미쉬팟, 체다카는 한국어 구약성경에서 대개 공의로 번역되지만, 때로는 ‘정의’라는 말을 혼용해 번역되기도 한다. 반면 디카이오쉬네는 한국어 신약성경에서 오직 공의로 번역된다. 이처럼 구약성경에서는 정의와 공의가 혼용되고, 신약성경에서는 공의만 사용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다. 구약시대에는 아직 세속적 정의 개념과 하나님의 공의 개념 간 영역 구분이 불분명해, 용어의 사용도 정돈되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듯하다. 반면 신약성경에서는 완성된 복음이 전해졌고, 그래서 여러 양태의 세속적 정의와 하나님의 공의를 보다 명확히 구별할 기준이 마련되어 있기에 더 이상 정의와 공의라는 말을 혼용해 사용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볼 따름이다.

방금 ‘명확한 구별’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세속적인 정의와 하나님의 공의를 서로 다른 두 실체와 같이 갈라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 사이에는 분명 내용상 겹치는 영역이 존재한다.

다만 본질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세속적 정의와 달리 절대불가침의 초월적 권위를 가지며, 영원히 불변하는 판단 기준이 된다는 점이 중요한 구별점으로 작용한다.

문재인 조국
▲성경에 소개된 하나님의 공의는 본질적 차원에서 세속적 정의 개념과 구별되지만, 내용적으로는 상당부분 공유되는 측면들이 많다.
기독교의 공의: 정치 지도자 및 고위공직자에 대한 계명

그렇다면, 이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공의가 현재 한국 사회를 격동시키는 조국 법무부 장관(지난주 월요일 장관에 임명되었다)의 임명 문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살펴보자.

지지난주 이루어진 인사청문회는 온갖 혐의와 의문점에 대부분 ‘모르쇠’로 일관하는 조국 장관의 불성실한 태도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실제 위법행위를 밝혀내는 데는 그리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제 조국 장관과 그 가족의 비위(非違) 사실 여부를 밝혀내는 일은 검찰에게 맡겨졌다. 현재 검찰은 조국 법무부 장관이 민정수석으로 있을 당시 유재수 부산시 경제부시장(친문 핵심인사들과 상당한 친분을 가진 인물이다)에 대한 감찰 무마를 지시한 혐의(직권 남용 혐의)에 대해 수사하는 한편, 조국 장관 가족들과 관련된 기존 혐의들(자녀들의 경력 위조, 사모펀드를 통한 부정 축재)에 대해서도 부지런하게 조사하고 있는 중이다.

수사 및 재판 결과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우선 조국 장관의 딸 조모 씨의 해외 등재지 논문 제1저자 등록이 취소된 사실로 볼 때, 본인(석사학위 대량 표절) 및 가족의 경력과 관련된 여러 탈법행위에 관한 의심이 상당한 개연성을 가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자신의 지위를 십분 이용해 탈법적 행위를 자행하는 품성을 가진 인물이, 직권 남용이나 부정 축재 기회라 해서 마다하였을까 하는 의심 역시 점차 커져가는 실정이다.

정부조직법 32조 1항은 법무부 장관의 직임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법무부 장관은 검찰·행형·인권옹호·출입국관리 그 밖에 법무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다.”

검찰은 위법행위의 수사를, 행형은 형벌의 집행을, 인권옹호는 법의 오남용 금지를, 출입국관리는 이방인들에 관한 업무를 관리한다.

문재인 윤석열 조국
▲ 조국 법무부 장관과 그의 위법행위 수사를 지휘하는 윤석열 검찰총장.
성경에 이와 비슷한 일을 행한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판관, 즉 사사(士師)들이다. 물론 오늘날은 삼권분립 원칙에 따라 판결 권한은 법무부 장관에게 수여되지 않지만, 이 점을 제외하면 법무부 장관에게 위임되는 권한 대부분은 사사들에게 맡겨졌던 것과 일치하는 편이다.

사사가 될 인물들에 대해 율법은 다음과 같이 명한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찌며(레 19:15).”

이 계명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듯이, 성경에서 사사들에게 당부한 공의는 바로 사람의 사정과 세속적 지위(빈부귀천을 막론)를 불문하는 엄정함과 공평함이며, 이 공의를 스스로와 가족에게도 솔선수범해 적용하는 자가 의로운 지도자, 온전한 공직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사리사욕을 포기해야만 한다.

이런 사고는 신구약을 불문하고 성경 전체에서 확인된다. 일례로 구약성경에서 사무엘의 두 아들들은 뇌물을 받고 수사와 판결을 강자에게 유리하게 하다가 그들의 지위를 잃었다(삼상 8:1-5).

반대로 신약성경의 세리장 삭개오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나머지는 토색한 것을 4배로 갚는 데 쓰겠다고 함으로써 의인으로 칭함을 받았다(눅 19:8-10).

성경에서 집권자 혹은 공직자에게 요구하는 이러한 공의를 과연 조국 법무부 장관에게서 찾아볼 수 있을까? 협소하게 정의된 법적 관점에서 아직 그는 무죄인 상태지만, 그의 삶의 태도와 가족들의 수상한 행태들을 종합해 본다면 조국 장관이 하나님의 공의의 입장에서 의로운 직분자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경력, 직위, 권력, 재력을 앞두고 조국 일가가 보인 끝없는 탐심과 그 탐심으로부터 말미암은 다양한 탈법 행위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도, 그들이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이제 전편의 논평 내용까지 종합해 본다면, 결국 조국 법무부 장관의 정의로움 여부에 대한 평가는 세속적으로든 기독교적으로든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렇다면 이처럼 불의한 인물들이 정권의 강력한 비호를 받으며 승승장구하는 오늘날의 한국 현실에서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현실과 공의: 불의한 정치현실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자세

여기에 관해서는 정치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권고를 들어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판단된다. 1914년 예일 대학교에서 신학사를 받은 니버는 1915년(24세)부터 13년간 디트로이트 시에서 목회에 전념했다.

당시 디트로이트는 자동차 공업 발전으로 인한 인구 급증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도시빈민 문제, 노동인권 문제, 범죄 문제 등이 산적해 있는 도시였다. 한 마디로 미국 산업화의 사회적 부작용과 폐단을 집약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의 목회 경험을 통해 니버는 사회의 현실을 직접 상대하고 아우르는 기독교적 윤리 정립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회 전체에 구조적인 부조리와 악이 만연한 상태에서는 기독교인 개개인이 아무리 미시적 차원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 고립된 채 윤리 덕목을 지킨다고 해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한 것이다. 그는 이런 딜레마의 상황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고 표현했다.

조국
▲정치신학자 라인홀드 니버.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와 악을 진단하고 그에 현실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기독교 윤리를 정립하는 데 힘쓴 목회자이다.
이에 니버는 지상의 정치현실이 인간의 죄성과 자기-이해(self-interest)로 얼룩져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수긍하는 데서부터, 기독교적 정치윤리와 사회윤리를 세워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니버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사랑하셨듯이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의무를 갖지만, 그 사랑의 실천이 순전히 자기희생적이고 자기이해에 초탈한 무조건적 포용의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기독교인들은 사회 정의라는 개념, 그리고 법과 제도라는 도구가 불완전하게나마 기독교적 이웃 사랑의 정신을 지켜내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부분적으로 실현시키는 길임을 인지해야 한다.

그리하여 예리한 사회비판의 정신을 유지하는 가운데, 주어진 법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사회 현실에 직접 뛰어들어 악의 현실에 저항하는 것으로 기독교적 윤리 실천을 이뤄내야 한다는 것이 니버가 주장한 기독교 현실주의 윤리의 골자이다.

여기서 니버가 말한 법질서의 테두리란, 바로 니버가 살아온 삶의 공간이었던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 말한다. 사실 이 점 때문에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니버의 말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 역시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 안에서 사회의 구조적 부조리를 비판하고 징치해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정치참여에 대해서는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 교회가 정치적 이익을 탐하는 집단으로 돌변하는 즉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집단적인 비판의식을 공유하고, 이를 정치적-사회적 실천으로 구체화하려는 시도는 지금보다 더 적극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이런 활동들이 법질서의 테두리 안에서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공동체적 정서를 고려할 때도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인들이 다가오는 선거에서 적극적으로 표심을 결집하는 것, 이것이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 여긴다. 최선 혹은 차선의 길이 보이지 아니할지라도, 악의와 욕망이 만연한 정치 현실을 인정하고 차악이라도 선택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현실참여의 의지, 조용하지만 굳건한 의지가 필요한 것이다.

현 정권의 여러 정책적 방향 및 그 실천 방식을 보면 독단적이고 위선적인 태도가 자주 목격된다. 특히 이념적인 부분에서 자유민주주의 정신이나 기독교 신앙, 그리고 인류보편적 인권 사상에 대치되는 처사들이 자주 확인되는지라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자유주의자인 동시에 사회주의자”라는 조국 장관의 궤변은 현 정권의 표리부동함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회주의는 기본적으로 기존 질서와 정권의 전복, 즉 실질적인 혁명을 추구하며, 이는 기존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윤리와 질서에 커다란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조국 장관 임명에 대한 국민 대다수의 반응은 큰 실망감이다. 이는 현 정권에 기대감을 가졌던 여러 중도 성향의 국민들, 그리고 진보 성향의 국민들에게도 마찬가지 사안일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따르는 대한민국 기독교인이 현 시점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 즉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일에 ‘적법하게’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역사가 한국에 이루어질 것을 위해 기도하며 검찰의 수사와 사법부의 판결을 기다리는 것, 그리고 다가오는 선거에서 각각에게 맡겨진 한표를 반드시, 현명하게 행사하는 것이다.

조국
▲불의한 정치지도자에 대해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공의의 판단을 위해 기도하며 선거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권리를 ‘반드시’ 행사하는 것이다.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