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아트설교연구원 연구원들의 서평과 원장 김도인 목사의 설교 글쓰기 원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후 이들의 연구 결과물, 즉 설교문을 보고 싶다는 독자들의 요청에 따라, 설교문을 공개합니다. 원장 김도인 목사에 이어,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의 설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객관적인 평가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서재에서 만난 이재영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본문: 창세기 22장 1-4절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능동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며칠 전 요즘 인기 있다고 하는 ‘엑시트(Exit)’라는 영화를 보고 왔습니다. ‘엑시트(Exit)’는 ‘출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재난 탈출 영화입니다.

보통 재난 영화는 비장미 넘치고 진지하고 굉장히 무거운 느낌이 많습니다. 이 영화는 이에 반해 액션과 코미디를 잘 조합해서 시작부터 끝까지 짜릿하고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영화입니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합니다. 대학교 산악 동아리 에이스 출신이지만, 졸업 후 몇 년째 취업을 하지 못한 용남이라는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용남이는 온 가족의 눈칫밥을 먹으면서 하루하루 재난 같은 상황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용남이는 온 가족이 참석하는 어머니 칠순 잔치를 맞아 모처럼 한껏 멋을 내고 연회장에 참석합니다. 이 연회장은 대학시절 동아리 후배이자 첫사랑이었던 의주가 근무하는 곳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어색한 재회를 하는데요.

칠순 잔치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의문의 연기가 도심 한복판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합니다. 순식간에 도심 전체는 사람의 인체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유독가스로 뒤덮여 일대 혼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용남이와 의주의 탈출기가 시작됩니다. 늘 찬밥 신세였던 용남이는 가족 모두를 살리기 위해 대학 동아리 시절 산악부 경험을 살려 온몸을 던집니다. 같은 동아리 출신 의주 역시 재난 상황이 발생하자 자신보다 먼저 연회장 손님들을 살리기 위해 모범적으로 행동을 합니다.

나머지 가족들은 헬기로 구출되지만, 결국 탈 자리가 없어 두 사람만 남게 됩니다. 두 사람은 긴박한 재난 현장에서 자신들을 헬기가 자신들을 구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유독가스가 올라가지 못할 정도로 높은 건물을 향해 계속 탈출을 시도합니다. 탈출하는 과정에 이들은 주변에 있는 소품들을 활용해서 건물에서 건물로 옮겨가서 결국 살아남게 됩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만일 용남이고 의주가 안일하게 구조만 기다리고 있었다면 그들은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행동보다 느낌이 먼저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느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미팅을 하면 남자는 1-2초 만에 여자에 대한 평가가 끝난다고 합니다. ‘이쁘냐? 안 이쁘냐?’로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여자는 30초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그 사람의 외모뿐만 아니라 차 열쇠부터 그 사람이 차고 있는 시계, 신고 있는 신발, 옷까지 전체적으로 스캔을 하고, ‘이 사람과 결혼을 해서 행복할 수 있을까?’ 까지 생각해서 평가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사람들이 첫인상, 첫 느낌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그 첫인상, 첫 느낌이 진짜 그 사람의 모습이 맞던 가요?

물론 맞은 적도 있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많으셨을 것입니다. 첫 인상은 별로였는데, 알면 알수록 진국 사람이 있습니다. 이에 반해 첫인상은 너무 좋았는데 알수록 신뢰가 가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느낌이 행동보다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느낌 뒤에 행동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곧 기차로 비유하면 느낌이 기관차이고 행동이 객차라고 합니다.

두려움을 느끼면 걱정하기 마련입니다. 분노를 느끼면 어느 정도 그 분노를 분출하게 됩니다. 행복을 느끼면 관대해지기 쉽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살아갑니다. 이렇게 감정에 이끌려서 행동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반대로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행동이 기관차이고, 객차는 느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행동이 느낌보다 먼저라는 것입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그렇게 하고 싶은 느낌이 들든지 안 들든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알고 있다면 아는 대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감정을 객차의 자리로 밀어내고, 느낌과는 반대로 행동하겠다고 선택하기란 아주 부자연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부자연스러운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런 부자연스러운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당신께 순종하고 사랑을 실천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은 느낌이 들어서가 아니라 당신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린다 해서, ‘느낌’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정을 주신 것은, 감정이 관계를 누리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장하고 성숙하기 위해서는 느낌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행동이 느낌 보다 먼저여야 합니다.

행동하면 느낌은 따라온다

신혼부부들을 보면 깨가 쏟아집니다.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랑하는 감정이 그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감정을 행동으로 옮기기 때문에 깨가 쏟아집니다.

그런데 결혼한 지 좀 된 부부들은 이런 말들을 많이 합니다. “저희는 서로 아무것도 못 느껴요!” 이 말은 서로를 향한 사랑의 감정이 식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부들은 사랑하는 감정이 회복되면 사랑하겠다고 말을 합니다.

이들이 기대하는 대로 시간이 지나면 사랑하는 감정이 저절로 생길 까요? 사랑을 다시 느끼고 사랑하겠다고 기다리면 아마 그 날이 오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내가 나의 아내를, 남편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나에게 사랑의 느낌이 있든 없든 사랑의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랑의 행동을 하면 사랑의 느낌도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내 생애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책에 보면, 저자가 이런 말을 합니다. “오로지 사랑으로 행동함으로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습니다. 이 말은 웃는 행동을 취하면 복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웃지 못할 상황이라도, 웃으면 복이 온다는 것입니다. 웃는 행동이 먼저입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느낌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운동을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운동을 해야 되겠다는 느낌이 왔습니다. 그런데 운동을 하지 않았어요. 그러면 운동은 물 건너 간 것입니다.

필자가 계속 그랬습니다. 운동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계속 있었습니다. 예전에 새벽기도 마치고 운동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새벽기도하고 운동을 하면 충분히 수면을 취하지 않은 상태라서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힘이 드니까 온종일 피곤했습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패를 거듭하니, 마음은 있는데도 실패할까 두려워서 아예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생각을 좀 바꾸었습니다. 굳이 새벽기도 마치고 할 필요 없이, 저녁 먹고 소화도 시킬 겸 걷자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지금은 1주일에 6번 정도 30분 이상씩 걷고 있습니다. 걷기 시작하니까 허리도 덜 아픈 것 같고 몸이 좋아지는 것 같아서, 이제는 그냥 걷게 됩니다. 행동하니까 느낌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행동이 삶을 증명한다

우리가 물론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결심을 해야 합니다.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결심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기 위해 결심을 하면서, ‘내일부터’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내일은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늘부터’만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자신의 생각과 포부를 말하지만 말뿐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행동이 수반되지 않은 말로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과대 포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남을 잠시 속일 수는 있어도 행동이 따르지 않는 한 그에 대한 믿음은 지속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것은 행동입니다.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증명하기 위해, 쓸데없는 논쟁을 벌일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행동과 결과로 보여주고 증명한다면 누구라도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말은 타인의 마음에 신뢰감을 주기에 부족합니다. 이런 실행력의 중요성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요구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이방 땅 그랄에서 아비멜렉왕과 평화조약을 맺고 평안하게 살고 있는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그에게 한 가지 요구를 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요 하나님이 주신 독자인 이삭을 하나님이 지시하는 어느 땅으로 가서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번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사랑하는 아들을 칼로 죽여서 그 몸을 쪼개어 각을 떠서 온전히 불로 태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은 그의 재산을 바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시간을 바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식을 완전히 죽여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정신이 완전히 나간 아버지가 아니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일을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너무나 순종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도 그렇지만, 왜 이삭을 바치라고 하시는지에 대한 이유를 하나님께서 전혀 설명하시지 않고 계십니다.

어떤 설명이라도 해주셨다면 아브라함 나름대로 생각을 좀 해보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무조건입니다. 무조건 죽여서 불로 태워 재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는 지금까지 나타났던 하나님의 성품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방 족속들 가운데에는 자기 자식을 죽여서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인신제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그런 일을 요구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산아들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기를 원하시는 잔인한 신이 아닙니다.

하지만 바로 그 하나님이 자신이 주신 아들을 죽여서 제물로 바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이스마엘도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삭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행동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일어나 하나님이 지시한 곳으로 떠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대구도 없이 순종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브라함이 기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순종파였기 때문에 이삭을 바쳤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삭은 그렇게 맹목적으로 바치기에는 너무나도 귀중한 존재였습니다. 아무리 미련하고 의식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자기 아들을 바치지는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한 말씀 때문입니다.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창 21:12)”.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왜 이런 요구를 하시는 지, 또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삭이 죽을 수 없다는 건 분명합니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삭은 아들을 낳아야 하니까요. 그래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히브리서 11장 18-19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믿음은 행동하는 것임을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이라고 말씀하면서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말씀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1)”.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으로 온전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으로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다릅니다.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강력한 힘입니다.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알고 있다고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많습니까? 알고 있는 말씀을 다 행하고 계십니까? 알고 있다고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행해야 결과물이 나온다

그런데 왜 실행력이 강력한 힘일까요? 실행해야 결과물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실행하지 않고 생각만 해서는, 마음만 먹어서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몸으로 실행할 때 시행착오도 있겠지만 결국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느낌으로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행동했습니다. 그 순종의 결과 하나님께 합격 도장을 받습니다. 이삭도 살리게 되고 하나님께 믿음을 인정받게 됩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 않았다면 이런 결과는 없는 것입니다.

라이트 형제가 먼저 하늘을 날 수 있었던 이유

1903년 10월 7일, 미국 워싱턴 포토맥 강가에는 수많은 인파가 모였습니다. 정부와 군, 대학의 유명인사에서부터 유력한 일간지 기자들까지 모두가 숨죽이며 곧 맞이하게 될 역사적인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 이유는 무인발사체 비행에 최초로 성공한 새뮤얼 랭클리 박사의 유인비행체 발사 성공을 두 눈으로 직접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운명의 카운다운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10, 9, …, 3, 2,1,…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美 국방성이 엄청난 돈을 투자한 비행체는 그대로 강물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2개월 정도가 지난 1903년 12월 17일 12시 정각 미국 캐롤라이나 주 키티호크 해변에서 두 명의 형제가 기괴한 물체와 씨름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단지 동네 사람 몇 사람이 그 자리를 지켰을 뿐입니다.

그러나 잠시 후 고요한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라이트 형제의 형 윌버가 몇 번의 시도 끝에 플라이어호를 타고 59초 동안 260미터를 날아 최초로 유인비행에 성공한 것입니다. 플라이어호는 라이트 형제가 만든 최초의 비행기의 이름입니다.

유인비행을 위해 17년을 바친 당대 최고의 과학자를 고작 4년 준비한 무명의 형제가 이긴 것입니다. 이들의 실패와 성공에는 과연 어떤 차이가 있었던 걸까요?

새뮤얼 랭클리 박사는 비행을 위해 분석에만 초점을 두었습니다. 이론에 기반을 둔 엔진 개발에만 몰두하여, 비행기 무게와 엔진 동력을 계산하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한 채 제대로 연습비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와 달리 자전거 점포의 주인이었던 라이트 형제는 직접 몸으로 체험하며 공기역학을 터득했습니다. 용기 있는 과감한 도전으로 비행을 하기 위해 실제로 무엇이 필요한지 몸소 익혀 나간 것입니다.

먼저 과감히 실행한 사람이 이처럼 우위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라이트 형제가 먼저 하늘을 날 수 있었던 비결은 머리에서 벗어나 먼저 몸으로 뛰어든 실행력에 있었던 것입니다.

한 소녀의 행동이 파장을 일으켰다

폴리 호가스가 쓴 <세상 속으로 들어온 말씀>이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2007년은 영국에서 노예무역이 폐지된지 200년이 된 해였습니다. 영국 곳곳의 학교들은 노예제도의 수치스러운 역사와 노예 폐지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에 대해 다시 공부하는 기회들을 가졌습니다.

한 초등학교에서는 아프리카 노예들이 강제로 이름을 바꾸거나 이름 대신 팔에 새겨 넣은 숫자를 써야 했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런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한 소녀는 선생님을 찾아가서 노예들이 자기 이름을 잃고 비인간적 대우를 받았던 고통을 조금이라도 경험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2주간 아이들과 교사들까지 팔목에 쓴 숫자로만 서로를 부르게 하며 이름을 빼앗긴다는 게 어떤 것인지 경험해 보았습니다.

이것은 노예생활 가운데 지극히 한 부분이지만 이 경험은 매우 강렬했습니다. 이 경험을 하고 난 이후에 온 학교가 어린이 노동착취나 인신매매 방지를 위하여 일하는 노예제 반대협회를 지원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노예무역에 대해 그냥 아이들 모두가 그냥 알고만 그쳤다면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중 한 소년의 행동이 이런 결과가 나오게 한 것입니다. 이 결과는 노예제도에 관한 수업을 처음 기획했던 교사들이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열매를 맛보지 못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배를 잠시 빌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말씀을 마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느닷없이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황당한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베터랑 어부였습니다. 방금 전까지 그물을 던져서 한 마리도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목수 출신인 예수님이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황당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

베드로는 예수님께 내가 방금전 까지 밤새 수고하여 한 마리 고기를 잡지 못한 것이 나의 처지이지만 말씀에 의지해서 그물을 내려보겠다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되든 안되든 실행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실행한 결과 베드로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베드로가 만일 자신의 경험을 내세우며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렇게 실행하지 않았다면 이런 결과를 맛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말씀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의 열매를 맛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말씀대로 되는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알고만 있을 뿐 실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행력이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실행력이 경쟁력입니다. 실행력이 강력한 힘입니다.

실행력은 악셀레이트다

실행력은 자동차에서 악셀레이트와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차라고 할지라도 시동까지 다 걸려 있다고 해도 악셀레이트를 밟지 않으면 차는 앞으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차가 앞으로 나갈 것이라는 생각만 한다고 차가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악셀레이트를 밟지 않으면서 차가 앞으로 나갈 줄 믿습니다.

기도만 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차는 직접 악셀레이트를 밟아야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행할 때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실행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마무리 지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4-27)”.

산상수훈의 말씀이 아무리 주옥같은 말씀일지라도 그 말씀들 듣고 행하지 않으면, 모래 위에 집을 집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나 어리석은 자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사람은 들은 말씀을 행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들은 말씀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러 보냅니다.

우리의 믿음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하지만 듣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할 때 그 믿음이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실행력은 강력한 힘입니다.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https://cafe.naver.com/judam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