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안교회 장시환
▲새안교회 장시환 목사
롬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로마서의 첫구절입니다. 첫 단어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우리 신앙이 늘 처음 것이 중요합니다. 출애굽기서를 공부하면 처음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소중한 지혜가 있습니다. 처음 것을 하나님께 잘 드리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 됩니다. 시간도 예물도 늘 처음 것을 하나님께 잘 드리면 하나님의 큰 복을 받습니다.

롬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간단히 읽을 수 있는 말이지만 이 안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성경의 시작이 무엇인가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것이 큰 선언입니다. 성경의 대전제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만물의 근원,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이것을 믿음으로 우리 신앙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로마서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로마서는 로마에 있는 교우들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 첫 말이 이 편지를 쓰는 사람의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 신앙도 이것이 바로 세워질때 모든 것이 바로잡힙니다. 편지의 시작이, "잘 지내니? 몸은 건강하니? 거기 날씨는 어때?" 이런 인삿말이 전혀 없습니다. 첫 말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앞에 있고 바울이 뒤에 있습니다. '그 분으로 말미암은 나' 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있기에 내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내가 앞서기를 좋아합니다. 늘 내가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내 판단 내 생각 내 경험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늘 실패합니다. 지금 바울은 바뀐 것입니다. 자기 삶의 우선순위와 중심이 완전히 바뀌어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이끄는 삶으로, 그분의 종된 바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라는 이름도 원래는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의 이름이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 구한다'는 큰 이름입니다. 그런데 바울이라는 이름의 뜻은 '작은 자'라는 것입니다. 늘 자기를 앞세워서 자기를 높이던 자가, 한없이 작아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지극히 작은 나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면 겸손해 집니다. 그분의 희생과 사랑이 얼마나 큰지 깨달으면 지극히 겸손해집니다. 바울은 그렇게 바뀌어 있는 것입니다. '난 작은 자' 라고. 이전에는 어땠습니까. 자랑할게 많은 바울이었습니다. 정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살았던, 스스로 큰 자라 여겼던 자였습니다. 학문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외적인 어떤 조건 배경으로나 나보다 뛰어난 자가 없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다 깨어지고 무너졌습니다. '작은 자' 바울입니다. 그런데 그냥 바울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바울입니다.

그분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노예. 사실 오늘날 와닿지 않는 말입니다. 그런데 당시 로마시대가 종, 노예가 흔했던 시대였으니까 인구의 3분의 1이 노예였던 시대였으니까 편지를 받는 이들에게 매우 와닿는 말입니다. 종은 뭔가요. 주인의 소유물입니다. 또 종은 뭔가요. 주인에게 모든 것이 달려있는, 전적으로 의탁되어 있는 자입니다. 또 종은 뭔가요. 그의 삶의 모든 것들이 다 주인에게 속해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인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갈6:17]에서 바울은 "내가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라고 했습니다. 그 흔적이란 단어가 'Stigma' 가축에 찍는 낙인(烙印)입니다. 불도장을 지져서 이것은 누구의 것이라고 나타내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며 얻은 수많은 고난과 고생, 상처의 모든 것들을 '예수의 흔적'이라고 자랑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내가 예수의 소유됨을 증명하는 증거라고 말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증거입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로마서를 읽을 때 그냥 읽을 수 있지만, 그러나 글쓴이가 누구인가. 그가 어떤 자였는가. 이런 것을 알고 읽으면 이 글이 놀랍게 다가옵니다. 바울이 누구였습니까. 사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말할 수 없이 박해했던 자였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로 쳐죽임을 당할때, 피흘리고 참혹하게 죽어갈때, 죽은 자의 피묻은 옷을 사울의 발앞에 뒀다고 했습니다. 이는 '당신도 이 일에 동참한 자요' '확실한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장 극렬하게 예수 믿는 자들을 반대했던 자였습니다. 몇개 구절을 볼 필요가 있는데,

행8:1 사울은 그(스데반)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8: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교회 안에 굉장히 큰 고통과 슬픔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그렇게 죽은 것을 당연히 여기는 사울입니다. 정말 잔인한 것입니다. 악독한 것입니다. 사람이 돌로 침을 당해 비참하게 죽었는데 긍휼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잔멸(殘滅)은 완전 씨를 말리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의 씨를 말려버리자' 해서 믿는 자들 집집마다 찾아들어가서 끌어다가 감옥에 집어넣었던, 이 상상할 수 없이 악독한 자입니다. 그가 저지른 악행, 위협하고 투옥하고 죽이고, 믿는 자들의 피흘림과 박해의 고통은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이 이런 일을 계속하던 가운데,

행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람이 악한 것도 계속 되면 극악해집니다. 악이 극에 달합니다. 집집마다 잡아넣어도 성에 안차는 것입니다. 100km 가령 떨어진 다른 지역에 사는 믿는 자들까지 잡아넣으려고 가는 것입니다. 아무도 걸어서 가지 않는 그 뜨거운 대낮의 길을, 그보다 더 뜨거운 증오를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9: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9: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하늘로부터 큰 빛이 비췄습니다.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9:5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참으로 극적인 장면입니다. 사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것은 매우 극적이었습니다. 한번에 고꾸라졌습니다. 그의 눈은 감겨져있고 쓰러졌습니다.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같이 가던 사람의 손에 이끌리어 집으로 갔습니다. 가서도 사흘동안 보지도 먹지도 못했습니다. 그 충격을 벗어날 수가 없어서. 무슨 충격인가요. '극악해진 박해자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부르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최대의 박해자, 증오자, 교회 공동체를 말도 못하게 위협하고 괴롭히던 자를. 그런 그의 악행을 죄악을 주님이 사랑으로 다 덮으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게 된 우리들도 이런 극적인 경험은 아니었을지라도 이처럼 우리의 부르심속에 담겨 있는 주님의 깊고도 깊은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죄를 다 덮으시고 부르신, 죄를 다 용서하시고 나를 세우신, 그 넘치는 세계를 '은혜'라고 해봅시다.

그 은혜로 변화된 사람이 이 글을 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그러니까 이 말은 다시 어떻게 읽을 수 있나요. '극악한 죄인을 용서하시고 부르신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으로 종이 된 바울은', '그 사랑으로 그분의 종이된 그분의 소유된 나 바울은'. 이것이 바울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유명 대학교 출신, 뼈대있는 가문, 대기업 출신의 나'가 아니고, 완전히 '예수 밖에 없는 나'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뭐라고 합니까.

롬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이제는 '사도'라고 합니다. 종과 사도. 함께 쓸 수 없는 말입니다. 종은 노예입니다. 사도는 Apostle Apostolos 어원이 큰 '함대'입니다. 이 말의 뜻은 '보냄을 받은 자' 입니다. 대사(大使)와 같은 것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의 모든 권한을 위임받아서 다른 나라에서 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자. 사도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전권 대사입니다. '사도'라는 말속에는 dignity 위엄이 있습니다. 권위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안에 또 다른 정체성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위임받아 보내심을 받은, 파송받은 대사다. 어디로 보냄받은 것입니까. 어디로 파송 받은 것입니까. 이 땅에 이 세상에 보냄받은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땅의 크리스챤들은, 우리 믿는 자들은 다 사도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전파자로 그리스도의 모든 권한을 부여받아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들.

요17: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고별기도, 십자가 죽음을 앞두시고 드리신 기도 속에 담겨있는 소중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인생은 무엇이었는가. 또 그의 제자된 우리들의 인생은 무엇인가.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보냄을 받아서 사는 것입니다. 보냄을 받아서 보내신 이의 뜻대로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어떤 첩보 영화를 보면, 윗사람의 지령을 받아 철저히 그것을 완수하는데 목숨을 걸고 합니다. 만일 동료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 총을 들이대며 강하게 말합니다. "네가 무엇때문에 여기 와있는지 잊지 말라!"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흐려진 정신을 깨웁니다.]

우리 인생은 무엇인가. 왜 사는가. 우리 인생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보내신 이의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온전히 이루고 가야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은 그것을 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놓치고 사는 것을 성경은 뭐라고 하나요.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나요. 어느날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하는 자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사지내고 와서 따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대답이 뭔가. 그것은 "죽은 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눅9:61]"

우리 인생은 뭔가요. '신의 파견'입니다. 아무 목적없이 뜻 없이 살라고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는 너무도 분명한 목적이 있고 뜻이 있습니다. 그것을 이루라고 보냄을 받은 나 라는 것입니다. '사도'와 관련해서 한구절 더 찾아보겠습니다.

요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

이 말씀 또한 고별설교 중에 주신 말씀입니다. 먼저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라고 하십니다.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바울이 나는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고 했습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내가 규정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나라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도 내가 이런 저런 선택으로 오게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선택하셔서 여기 보낸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가 어딜까요. 우리가 거주하는 이 지역일 수 있고 우리가 헌신하는 사역의 현장일 수 있고 삶의 현장일 수 있습니다. 누구누구 때문에 무엇무엇 때문에 '여기' 있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기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신앙의 깊은 세계입니다. 그런데 '여기' 왜 나를 보내셨는가. 왜 나를 택하여 세우셨고 보내셨는가. 16절을 꼼꼼하게 읽고 묵상합시다.

..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열매를 맺게 하고' '또 항상 열매가 있게 하여' 열매입니다. 우리 부르심의 깊은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보내신 진정한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선교'인 것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헌신하는 모든 것들을 통해, 주님은 불신자들로 하여금 복음을 알게 하고 그들을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 삶을 잘 점검하고 살아야합니다. 먼저는 1)자기 정체성을 늘 확인하고 살아야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하려고 여기 있는가. 이런 분명한 것 위에 서 있지 않으면 다른 것에 흔들리고 다른 것에 휩쓸리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하는 모든 것들이 2)무엇을 하라고 보내신 것인가.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가서' 가야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현장으로 늘 가야합니다. 뒤로 물러나 있지 아니하고 주저 앉아있지 아니하고 정체되어 있지 아니하고 복음 전파의 현장으로 늘 우리는 가야합니다. 가서 열매를 맺으라고 그것 때문에 우리를 택하시고 '여기'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많은 일들로 바쁘게 삽니다. 세월은 그렇게 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꼭 물으십니다. "너는 무엇을 하였느뇨? 무엇을 남겼느뇨? 열매가 무엇이뇨?"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을 주셨습니다. 달란트, 재능을 주셨습니다. 또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 때가 되면 물으십니다. 우리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질문, "너의 열매는 무엇이뇨?" 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고 택하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참 부족함이 많습니다. 늘 열매없는 초라함. 빈그물의 쓸쓸함. 이것으로 늘 힘들어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하기에 우리가 이 말씀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말씀앞에 서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해야합니다. 그래서 잘못한 것은 심판을 받고 문제가 있는 것은 고쳐서 새롭게 가야합니다. 주님의 소원은 우리가 열매없이 메말라서 궁핍하게 살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열매가 있게 하시고 항상 구하는 것은 다 받고 풍족하게 살게 하려고 우리를 부르고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자, 지금 본문속 바울안에는 두가지 뚜렷한 자기 이해가 있습니다. 자기 존재와 삶에 대한 너무도 분명한 해석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첫째는 주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으로 부름을 받은 나는,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속한 종이다. 내 것을 얘기할 수 없고 나를 주장할 수 없는 전적으로 주인된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리고 둘째로 나는 또 누구인가. 그리스도의 전권을 위임받아, 그분의 모든 권한을 가진 나다. 그것을 가지고 파송받은 나다. 그것을 가지고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어야할 나다.

이 두 가지를 깊이 생각하면서 우리 또한 이같은 정체성을 분명히 우리안에 세워서 넘치는 열매를 맺고 구하는 모든 것 다 받고 누리는 풍요로운 삶을 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