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아트설교연구원 연구원들의 서평과 원장 김도인 목사의 설교 글쓰기 원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후 이들의 연구 결과물, 즉 설교문을 보고 싶다는 독자들의 요청에 따라, 설교문을 공개합니다. 원장 김도인 목사에 이어, 대구 아름다운교회 이재영 목사의 설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객관적인 평가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신비 아침 이슬 성령 햇빛 일출 풀 은혜 빛

본문: 고린도후서 12장 7-10절

노벨상 콤플렉스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인 곽금주 교수가 쓴 ‘마음에 박힌 못 하나’라는 책에 보면 ‘노벨상 콤플렉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노벨상은 다이너마이트를 만든 노벨의 유지를 따라 1901년에 만들어졌습니다. 노벨상은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평화, 경제학 분야까지 총 6개 분야로 나뉘어 수여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적이 있습니다.

노벨상은 단순한 명예를 뛰어넘는 상입니다. 학자들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명성 높은 상입니다. 다른 학자들이 자신의 연구를 참조하게 되고 그 만큼의 영향력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노벨상 수상 문턱에서 좌절한 사람에게는 노벨상 후보였다는 경험이 오히려 인생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자신의 업적이 노벨상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학자들은 자신의 연구에 회의를 느끼며 낙심한다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노벨상에 대한 집착이 학자들의 열정과 진실성을 빼앗아 가는데 있다고 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노벨상을 받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는 자아도취적 기대를 버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또한 이를 이루기 위해 버거운 목표를 세우지만, 정작 본인은 그 때문에 불안해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향을 가리켜 정신분석학자 헬렌 타르타코프는 ‘노벨상 콤플렉스’라고 이름 하였습니다.

노벨상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들은 한 마디로 완벽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케츠 드 브리 교수는 노벨상 콤플렉스의 특징을 한 마디로 ‘실패와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들은 한 개, 두 개, 심지어 10개 이상의 목표를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곧 완벽주의자들은 평범한 성공으로는 만족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공과 업적이 완벽하지 않으면 자신은 가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성공을 거두면 행복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이들은 자기 장점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설령 성공했다 하더라도 실력으로 당당하게 얻은 성과라고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를 운 좋은 사기꾼이라 여긴다는 것입니다.

완벽주의자는 있어도 완벽한 사람은 없다

이 세상에 완벽주의자는 있어도,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완벽한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강점이 있는가 하면 약점이 있습니다. 강점만 있는 사람도 없고 약점만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내가 가진 강점보다 약점에 대해 많이 신경을 씁니다. 그 약점에 때문에 주눅들기도 하고 열등감을 가지고 합니다. 때로는 약점을 부인하고 숨기기도 합니다. 약점 때문에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약점은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나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약점에 대해 내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부족함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

약점은 나에게 있는 부족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때로 자신의 부족함을 보면서, 이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십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깊고 넓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하는 방법보다 훨씬 뛰어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강점만을 사용하실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분은 우리의 부족함까지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7-29)”.

우리가 생각할 때는 미련한 것이 아무 쓸데 없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때로 그 미련한 것들을 택하여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는데 사용하십니다. 약한 것들을 택하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데 사용하십니다.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여 있는 것들을 폐하는데 사용하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약점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약점을 일부러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부족함의 역설

‘인문학을 하나님께’라는 책에서 한재욱 목사는 이어령 교수의 ‘부족함의 역설’을 인용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낙원이라고 해서 ‘파라다이스’라는 말을 쓰는데, 이 용어는 원래 이집트어로 에덴동산 같은 낙원이 아니라, 황야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황야이기 때문에 거기에 나무를 심을 수 있는 꽃을 가꿀 수 있고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이지, 에덴동산처럼 처음부터 완성된 동산이라면 아무것도 할 게 없습니다.

그것은 낙원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중략) 거칠고 황량하기 때문에 오히려 상상력 속에서 꽃과 나무들이 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령 교수는 ‘파라다이스’라는 단어를 통해 부족함은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임을 역설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보면 부족함이 곧 은혜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족함은 소통하게 하는 신비다

그리고 한재욱 목사는 그 책에서 ‘부족함은 사람들과 소통하게 만드는 신비가 있다’고 말합니다. 옛말에 “못난 놈들은 서로 쳐다만 보아도 즐겁다”는 말이 있습니다.

1997년 롯데칠성에서 ‘2% 부족할 때’라는 음료수를 출시했습니다. 지금도 판매가 되고 있습니다. 이 음료수는 주스라고 하기에는 2퍼센트 부족하고, 물이라고 하기에도 2퍼센트 부족한 맛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족함이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휴대폰 가게도 보면 ‘전국에서 제일 싼 집’이라고 선전하는 집보다 ‘전국에서 두 번째 싼 집’이라고 선전하는 곳에 마음이 더 갑니다. 음식점도 제일 잘하는 집보다는 두 번째 잘하는 집으라고 해놓은 곳에 마음이 더 갑니다.

우리가 부족한 사람에게 끌리는 이유는 나도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대화할 때 자신의 약점을 먼저 말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면 마음이 열립니다. 하지만 자기 잘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왠지 불편합니다. 외면하게 됩니다. 부족함이 있는 사람은 서로 도우며 살게 됩니다. 그 부족함을 서로 메워가면서 사는 것입니다.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도 도움을 구하지 않습니다.

할리우드 최고 스타들이 결혼했을 때 백년해로를 하는 경우가 드물다고 합니다. 어느 기자가 그 이유를 분석했더니, 이들은 자신이 최고이기에 부족한 것도, 아쉬운 것도 없어서 배우자에게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금도 속박 당하려 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고, 헤어진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 최고의 두 배우가 이혼을 했습니다. 송중기, 송혜교 부부입니다. ‘태양의 후예’라는 드라마로 최고의 스타 부부가 탄생했는데, 참 안타깝습니다. 이혼했다는 말을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이 부부가 이혼하는 이유도 할리우드 스타들이 헤어지는 이유와 같지 않을 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서로 돈이 많으니 위자료도, 재산 분할도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했다고 합니다.

아이러니하지만, 넘치는 것보다 좀 모자란 것이 좋습니다. 모자라야 서로의 필요성을 알고 서로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부족함을 채워가는 것이 행복이다

잠언 15장 1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넉넉하여 살진 소를 먹으며 미워하는 것보다 비록 부족하여 채소를 먹지만 서로 사랑하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철학자 플라톤은 행복의 조건으로 다섯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먹고 입고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 둘째,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용모. 셋째, 자신이 자만하고 있는 것에서 사람들이 절반 정도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 넷째,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질 정도의 체력. 다섯째, 연설을 듣고도 청중의 절반은 손뼉을 치지 않는 말솜씨.

플라톤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들은 완벽하고 만족할 만한 상태에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조금 부족하고 모자란 상태입니다. 곧 플라톤은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하루 하루의 삶 속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공감되는 생각입니다.

바울의 부족함

성경을 보면, 부족함이 있음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셔서 얼마나 큰 일을 행하셨는지에 대한 예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완벽한 사람들만 쓰셨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을 완벽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에게도 약함이 있었습니다.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이 육체의 가시에 대해 신학자들에 의견은 분분합니다. 안질이라고도, 간질이라고도 하고 합니다. 분명한 것은 이 육체의 가시가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장애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3번이나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3번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은, 그냥 우리가 기도하듯이 그렇게 기도한 것이 아니라 정말 간절함을 가지고 있는 힘을 다해 기도한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더 잘 전하기 위해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했다면,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어주셔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

하나님은 대답은 ‘No’였습니다. 이는 바울의 육체의 가시는 하나님이 일부러 주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9-10)”.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왜 자신에게 약함을 있게 하셨는지를 깨달았습니다.

바울의 깨달음

바울이 깨달은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바울은 자신을 교만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 약함을 그대로 두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12:7)”.

사도 바울은 지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전혀 손색이 없는 사람입니다. 당시 최고의 선생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 하였습니다. 로마시민권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에게 주어진 능력은 대단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바울이 직접 안수하는 것은 물론이고,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지고 가서 병자 위에 얹기만 해도 병자가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이 떠나가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이뿐입니까? 바울은 살아 생전에 천국에 크고 비밀한 일들을 보고 온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얼마든지 교만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 육체의 가시를 보면서 교만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교만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 중에 괴수인 자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교만한 마음이 생길 때마다, 나의 부족함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부족함을 보고 다시 하나님 앞에서 낮아져야 합니다. 부족함을 보고도 여전히 교만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대적자가 됩니다. 결국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바울은 자신의 약함 가운데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바울은 자신의 약함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 수 있는 은혜의 공간임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의 공간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채워지니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약함은 오히려 강함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강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함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진정한 강함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나의 약함과 결핍이 제거된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의존성이 강함입니다. 그 약함이 진정한 강함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의 약함 가운데 하나님의 강함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시 23:1)’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그리스도의 능력이 채워지는 은혜의 공간이라면 우리는 부족함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바울처럼 우리의 약함을 자랑하지는 못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좌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됩니다. 모든 것을 갖춘 것처럼 폼 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기적을 행하신 이유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기적을 행한 곳은 가나 혼인 잔치입니다. 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기적을 베푸신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혼인집에 포도주가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포도주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자신의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지만, 부족한 포도주를 채우기 위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입니다.

반대로 생각한다면, 만일 가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부족하지 않았다면 기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부분은 성경에 기록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빈 그릇에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하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질그릇은 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그릇입니다. 질그릇 자체는 큰 가치가 없습니다. 다른 그릇에 비해 너무나도 부족한 그릇입니다.

하지만 약한 질그릇이라도 보배를 담으면 보배를 담은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그릇의 가치는 실제로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그 공간에 하나님의 능력이 채워지면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공백이라면 내가 채워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부족함이 공백일 수도 있고, 여백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공백과 여백은 분명히 다릅니다. 공백은 단순히 비어 있음을 뜻하지만, 여백은 절제미를 위해 과감히 생략된 공간을 의미합니다. 여백은 의도적으로 남겨놓은 공간입니다.

우리가 가진 부족함이 공백이라면 그것을 채워가야 합니다. 지식적으로 부족한 것은 우리가 노력해서 얼마든지 채워갈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학생이 공부를 잘 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자기가 일하는 분야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게으르면서 부족하오니 하나님의 능력을 채워달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면 그 지식이 부족한 공백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들음으로 인해 채워가야 합니다.

기도가 부족하면 기도가 부족하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시간을 늘려가야 합니다. 내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은 하지 않으면서, 부족하오니 채워달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책망 받을 일입니다. 우리가 채워가야 할 부족함의 공백은 우리의 힘으로 채워가야 합니다.

부족함이 여백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나의 노력으로 채울 수 없는 하나님께서 있게 하신 부족함,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육체의 가시는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부족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허락하신 여백이었습니다.

라인홀드 니버라는 신학자가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을 주시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아울러 이 둘을 분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우리에게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채워 가야 하는 부족함의 공백은 우리가 채워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여백의 부족함은 하나님께서 채워주셔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공백으로 주신 부족함과 여백으로 주신 부족함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도종환 시인의 ‘여백’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흔히 동양화의 미학을 ‘여백의 미’라고 합니다. 동양화는 넘침보다는 모자람을 중요시 합니다. 서양화는 면의 예술이라면 동양화는 선의 예술입니다. 동양화는 선이 중심이라서 면이 비어 여백이 있습니다. ‘없음’으로 인해 ‘있음’이 드러나는 것이 동양화의 특징입니다.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는 하나님께서 능력을 바울에게 채워주시려고 남겨두신 여백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깨달았기에 약함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족함의 여백이 있다는 자체로 도리어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부족함의 여백을 주셨듯, 우리에게도 부족함의 여백을 주신 부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그 부족함을 채워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 약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강함이 나타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 부족함을 통해 하나님의 풍성함이 나타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부족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담아내는 은혜의 공간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족함을 통해 나타내시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요한복음 2장 1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예수님께서는 가나 혼인 잔치에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셨다고 말씀합니다. 곧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이 주님의 영광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이 기적이 어떻게 일어난 것입니까? 앞부분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포도주가 부족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포도주의 부족함을 통하여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기적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나게 한 것입니다. 부족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담아낼 수 있는 은혜의 공간입니다.

이재영 대구 아름다운교회
▲서재에서 만난 이재영 목사는 “설교를 만들어내기 힘들어 자괴감도 들고 목회를 그만둘까 고민도 했다”고 고백했다. 지금은 아트설교연구원 대표 김도인 목사를 대신해 목회자들에게 강의도 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벽한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부족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부족함은 우리에게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감추어야 할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부분의 부족함이 내가 채워야 할 공백이라면 채워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채워주셔야 할 여백의 공간이라면 하나님께 전적으로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부족함을 통해 결국 하나님의 강함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이재영 목사
대구 아름다운교회 담임 저서 ‘말씀이 새로운 시작을 만듭니다’ ‘동행의 행복’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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