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

성경은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를 연결짓는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요 3:5)”며, ‘거듭남’을 천국 입성의 자격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단지 미래에 입성할 미지의 세계만이 아닌, 금생에서 경험하며 교감하는 현재적 세계라 정의한다.

이는 단지 타계지향적인 신앙 교리로서가 아닌, 죽은 영(靈)이 살아나 그 나라를 보고 경험한 결과이며(요 3:3),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와 함께 하늘에 앉혀진 결과이다(엡 2:5-6).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에서 ‘보다(εἶδον)’는 경험하다(experience), 참여 하다(participate), 인식하다(perceive) 등을 의미하며, 이를 적용하면‘거듭남이 천국을 인식하고 경험하게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하늘로 옮기운 영혼은 해(害)를 받지 않는 안전 보장까지 덤으로 받는다.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마 6:20)”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일 5:18).”

이렇게 하늘로 옮겨지고 하늘을 경험하는 거듭난 성도에게는 당연히 이 땅이 낯설어진다. 성경이 성도를 세상의 ‘나그네’, ‘이방인’이라 했음도 거듭난 성도에게는 천국이 더 친근하고 영적으로 그와 더 합치(合致)되기 때문이다. 연어가 태어난 모천(母川)을 기억하고 본능적으로 그곳으로의 회귀를 갈망하듯이, 하늘로부터 거듭난 성도는 본능적으로 그곳을 갈망한다.

동시에 그는 여전히 땅에 거처를 두고 있기에, 육신을 입고 있는 동안 그의 본성은 나침반이 N극을 가리키듯 세상을 지향한다. 그리고 그는 이 두 세계 사이, 사도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행 22:28)’와 ‘천국 시민권자(빌 3:20)’ 사이에서 ‘생존’과 ‘죽음’ 사이에서 했던 갈등을 공유한다. 두 세계 사이에 끼인, 말 그대로 이중 국적자의(빌 1:21-23) 좌충우돌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 갈등과 충돌은 육신을 벗는 날 종말을 고하게 되고, 그 때 비로소 천국민의 정체성을 오롯이 갖게 된다. 그 때까지 그는 두 세계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천국 사명을 위해 세상에 파송된 ‘나그네(strangers, aliens, pilgrims)’ 삶을 영위한다(히 11:13, 벧전 1:1; 2:11).

여기서 ‘나그네’란 단지 세상의 이방인, 순례자라는 개념을 넘어, 사명을 받잡기 위해 세상으로 파송 받은 ‘대사(ambassadors; 고후 5:20, 엡 6:20)’ 개념이다.

◈거듭남의 원리

‘거듭났다’는 말은 다중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죄의 씻음(딛 3:5)’, ‘죄로 죽은 영혼이 살아남(엡 2:1, 5)’, ‘위로부터 남(요 3:3)’, ’물과 성령으로 남(요 3:5)’, ‘하나님으로부터 남(요 1:13)’ 등이다.

이 모든 개념의 근저에는 십자가 대속이 자리하며, 그것은 거듭남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받아들일 때, 그의 죽음과 부활과 연합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공유하는 거듭남(롬 6:3-7, 갈 5:24)의 사건이 일어난다.

‘You are my son(너는 내 아들이라)’이라는 가스펠(gospel song) 가사처럼, 십자가는 성도의 거듭남의 모태(母胎)이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너는 내 아들이라. 나의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 언제나 변함없이 너는 내 아들이라. 나의 십자가 고통 해산의 그 고통으로 내가 너를 낳았으니.”

성경이 ‘복음으로 거듭났다(벧전 1:23)’, ‘말씀으로 낳았다(약 1:1)’고 한 말씀은 십자가 복음이 거듭남의 모태(母胎) 라는 뜻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그의 영적 DNA는 죽음이 없고 생명으로 충만하다. 그리고 신적(Divine, 神的)이고 영원하다. 거듭남의 원천인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이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부연하자면, 그리스도의 구속이 ‘2천 년 전’, ‘이스라엘’이라는 ‘시·공간’의 역사 속에서 이뤄졌지만, 그의 피는 영원하기에(히 13:20)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구속 성취 전후(구·신약)를 불문하고 유대인 이방인 차별 없이 적용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일 때 그것에 자신을 연합시켜, 그의 거듭남을 현재적으로 만든다.

그 외에, 성경은 ‘거듭남(딛 3:5, regeneration, rebirth)’을 ‘재창조’로 말한다(고후 5:17, 갈 6:15). ‘물질 창조’가 단번에 말씀으로 되었듯, ‘영적인 재창조’인 거듭남도 단번에 이루어진다. 거듭남은 지정의(知情意)를 향상, 계발(啓發)하고, 병든 자가 회복(回復)하는 것처럼 점진적인 것이 아닌,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과 같은 즉각적이고 단회적이다.

거듭남을 점진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즉각적인 창조를 믿는 사람이라면 즉각적인 거듭남도 믿을 수 있다. ‘점진적 거듭남’은 ‘점진적 칭의’와, ‘창조론적 거듭남’은 ‘즉각적 칭의’와 궤(軌)를 같이 한다.

◈미성숙할 순 있으나 불완전할 순 없는 ‘거듭남’

‘거듭남’이 ‘완전한 성숙(complete maturation)’과 동의어는 아니다. 거듭날 때 생명으로서의 모든 조건을 다 완비했지만, 완전한 성숙(complete maturation)을 갖춘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갓 태어난 아기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다. 아기가 막 태어났을 때 완전한 인간이지만 성숙하지 않은 것과 같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생존이 전혀 불가한, 전적으로 타에 의존된 미성숙한 존재이지만, 그렇다고 그 아기가 불완전한 인간은 아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경우에도 예외가 없었다. 그는 영원부터 스스로 계신 ‘자존자(I AM THAT I AM, 출 3:14)’이시지만, 탄생 후 그의 생존이 육신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에게 전적으로 의탁됐고,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지시는(눅 2:52)” 점진적 성장 원칙을 고수했다.

믿고 거듭난 지가 하루밖에 안 된, 소위 신력(信曆) 하루인 사람의 믿음은 더없이 미성숙해 보이지만 결코 하찮게 볼 수 없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그 믿음의 뿌리를 추적해보면 2천 년 전 그리스도 대속에 근거하기에 그의 신력은 2천 년이다. 그의 믿음이 자신을 거듭남의 원천인 2천 년 전 그리스도의 구속에 연합시키기 때문이다. 만일 그 기원을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예정(엡 1:4-5)까지 추적한다면, 그의 거듭남의 기초는 영원이다.

신력(信曆)이 하루밖에 안 된다는 이유로 거듭남을 불완전할 것으로 예단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다시 말하지만 ‘신앙의 미성숙’이 결코 ‘거듭남의 불완전’이 아니다. ‘점진적 칭의론자들’이 ‘칭의자의 미성숙’을 ‘불완전한 칭의’로 곡해했듯, ‘거듭난 자의 미성숙’을 ‘거듭남의 불완전’으로 곡해하는 동일 오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거듭난 자의 미성숙’을 ‘불완전한 거듭남’으로 말하는 것은 미성숙한 어린 아이를 보고 인간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보양하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 아닌 미성숙한 아이의 성숙을 돕기 위한 것이다.

칭의받은 자가 성화를 힘쓰는 것은 칭의를 완성시키려는 것이 아닌 칭의받은 자 답게 되려는 노력이듯이, 거듭난 성도가 성숙을 도모하는 것은 불완전한 거듭남을 완전케 하려는 것이 아니다.

천국 입성의 조건은 ‘완전한 성숙’이 아닌 ‘물과 성령으로 말미암는 거듭남’이다. ‘완전한 성숙’이 천국 입성 조건이 된다면 과연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리고 도대체 ‘완전한 성숙’의 기준은 무엇인가? 소위 작금에 유행하는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인가? 그럼 ‘작은 예수’의 기준은 무엇인가? 성 프란시스, 성 다미엔, 주기철 목사님처럼 되는 것?

구원을 ‘사변(思辨) 놀음’으로 만드는 말쟁이들의 말장난으로 밖에 안 들린다. 구원에는 기준이 없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십자가의 대속도 하나님의 은혜도 배제된, 각자 무한 경쟁에 돌입하여 각자도생(各自圖生)하라는 말처럼 들린다.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