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이응삼
▲김명혁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본지 고문 김명혁 목사님(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께서 故 아천 정진경 목사님 10주기를 맞아 ‘사랑하고 존경하는, 보고 싶은 신앙의 스승 정진경 목사님’ 제하의 기고를 두 차례에 나눠 연재합니다. 김 목사님은 정진경 목사님에 대한 11가지 이야기를 보내 오셨으며, 이 글에서 6가지, 다음 글에서 5가지를 각각 소개할 예정입니다. -편집자 주

저는 2009년 9월 7일 정진경 목사님 장례식 때 ‘조사’를 읽었고, 2009년 11월 12일 신촌포럼에서 ‘내가 만난 정진경 목사님’이란 제목으로 정진경 목사님을 추모하는 글을 써서 읽은 일이 있습니다. 2009년 12월 27일에는 ‘온유, 겸손, 포용, 격려, 칭찬의 스승 정진경 목사의 휴먼 스토리’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한국기독교 성령백주년 기념사업회’에 보낸 일이 있었으며, 2010년 9월 3일 신촌성결교회에서 모인 ‘고 아천 정진경 목사 1주기 추모예배’에서 추모사를 읽은 일이 있었습니다.

위 글들을 종합해 ‘사랑하고 존경하는, 보고 싶은 신앙의 스승 정진경 목사님을 기리며’라는 제목의 글을 쓰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저에게 베푸신 많은 은혜 중 하나는 저에게 믿음과 사랑의 부모님과 함께 믿음과 사랑의 스승님들을 주신 것입니다.

제가 평양 서문밖교회에 다닐 때, 저에게 주일 성수의 신앙과 새벽기도의 신앙과 순교의 신앙을 심어주신 분들이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이었고, 남쪽으로 온 후 중학생 때 저에게 회개의 신앙과 은혜 사모의 신앙을 심어주신 분이 한국교회의 무디 이성봉 목사님이셨습니다.

고등학생과 대학생 때 저에게 회개와 눈물의 신앙과 은혜 사모와 전도의 신앙을 심어주신 분이 한국교회의 예레미야 김치선 목사님이셨고, 한 평생 저에게 온유, 겸손, 긍휼, 사랑의 신앙을 심어주신 분이 한경직 목사님이셨고, 저에게 진실과 소박함과 기도와 말씀과 고난의 신앙을 심어주신 분이 박윤선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저에게 온유, 겸손, 포용, 격려, 칭찬의 삶이 무엇인지를 삶으로 보여주신 분이 정진경 목사님이셨습니다. 귀중하고 귀중한 신앙의 스승님들을 주신 것은 망극하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여기서 제가 만난 정진경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봅니다.

첫째로, 정진경 목사님은 안주에서 출생한 후 수많은 고난의 골짜기를 걸어왔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1921년 9월 14일 평안남도 안주의 한 시골 마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사실 한국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님도 안주 출신이었고,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도 안주 출신이었고, 임옥 목사님도 안주 출신이었고, 저도 안주 출신이었습니다.

정진경은 국민학교 3학년 때 동네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아버지로부터 심한 야단과 매를 맞으면서도 교회에 나갔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아들의 신앙을 인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정진경은 안주 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신의주로 이사해서 공부하며 신앙생활을 보다 자유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신의주 동부성결교회에 다니면서 이성봉, 한성과, 김유연 목사님으로부터 신앙의 감화를 받았고, 세례를 받으며 중생을 체험했습니다. 철저한 회개와 기도에 파묻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목회자가 될 꿈을 품게 되었습니다. 사실 신의주는 한경직 목사님과 저의 부친 김관주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던 곳이었고, 후에 저도 그곳에서 신앙의 뿌리가 내린 곳이었습니다.

청년 정진경은 18세 때인 1939년 은행에 취직을 했으나, 목회에 대한 소명 때문에 많은 갈등을 겪게 되었습니다. 결단을 하지 못하자 “하나님께서 사랑의 매를 드셨다”라고 정진경 목사님은 후에 고백했습니다. 늑막염과 폐병에 걸린 것이었습니다.

결국 회사도 그만두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정주 산속으로 들어가 칩거하며 기도와 성경읽기와 묵상에 파묻혔습니다. 병중에 상경하여 서울신학교에 입학을 청원했으나 교장 이명직 목사님으로부터 건강 문제로 불합격을 통보 받고 실망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신의주로 돌아온 정진경은 패잔병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성경책만 읽고 또 읽었습니다. 성경 속에 파 묻혀 지낸 정진경은 결국 말씀과 기도로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고 1943년 같은 교회 주일학교에서 만났던 곽성옥 양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 9월에 서울로 다시 올라가 서울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준비했습니다. 하루하루가 즐겁고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1년 남짓 신학교 생활을 한 뒤 1946년 여름 방학을 맞았습니다.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이북 신의주를 가야 하는데, 이미 38선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해주까지 갔습니다. 그곳에서 보안서원에게 붙잡혀 해주 유치장에 40일 동안 감금되었습니다. 기도와 말씀에 파묻힌 40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훈련시키신 기간이었다고 후에 고백했습니다.

40일 후 석방되어 신의주까지 가서 가족들과 감격적인 해후를 했습니다. 방학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야 했으나, 남하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평양신학교 본과에 입학하여 신학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북한 공산당의 독재가 심해지자 목사들과 학생들이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진경은 목숨을 걸고라도 남하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해주에서 소련군에게 붙들리고 말았습니다. 조사를 받은 후 남하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한 후 석방되었습니다.

다시 고기잡이 밀선을 얻어 타고 남하하다 인민군 경비정에 발각되어 무차별 사격을 받았습니다. 무조건 물 속으로 뛰어들어가서 사력을 다해 헤엄을 쳐서 육지에 도달했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후에 이렇게 기술했습니다. “또 한 차례 죽음의 위기를 넘긴 것이었다. 나는 이때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가를 뼈저리게 체험했다.”

결국 서울까지 올 수 있었고, 1948년 드디어 서울신학교(현 서울신대)를 졸업했습니다. 졸업반 때 아내가 딸을 업고 남하해서 세 식구가 함께 살았는데, 여간 어렵게 지내지 않았습니다.

신학교 졸업 후 공주성결교회로 부임하여 전도사의 일을 시작했습니다. 최선을 다하며 의욕적인 목회를 한 결과 교회는 부흥했습니다. 그러나 1949년 성결교 총회의 추천으로 유학생 후보가 되므로, 1950년 혜화동교회로 옮겨 유학준비에 집중하다가 6.25을 맞게 되었습니다.

결국 수유리 뒷산에 굴을 파고 숨어서 지내다, 굶은 배를 채우기 위해 마을로 내려왔다 보안요원 두 명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손이 뒤로 묶인 채 산속으로 끌려 올라갔습니다. 보안요원은 정진경 목사님을 바위 앞에 세우더니 권총을 겨냥했습니다. 1950년 8월 어느 날 오후였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이렇게 나직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 그리고 남은 처 자식을 보살펴 주옵소서.” 보안요원은 셋에 총을 쏘려고 했는지 눈을 감은 정진경 목사님을 향해 “하나, 둘…” 이라고 외쳤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미군 비행기 한대가 굉음을 내며 날아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행기를 향해 총을 쏘아댔습니다. 이내 총알이 떨어졌고 상기된 표정의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원수인 미제 비행기에 다 쏘았소. 당신 운이 좋구먼. 집에 가서 꼼짝 말고 사회주의 해방을 기다리시오.”

정진경 목사님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순간 나는 내가 믿고 확신하는 하나님은 나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전능자라는 고백이 뼛속 깊은 곳에서 솟구쳤다.”

둘째로, 저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중심으로 정진경 목사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한국교회와 아시아 교회를 봉사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저는 1980년 전후부터 정진경 목사님을 만나고 알게 되었는데, 30여년 동안 친밀하게 사귀면서 정진경 목사님의 사랑과 지도를 받게 되었습니다. 1981년 3월 17일 아세아연합신학원에서 박조준 목사, 한철하 목사, 정진경 목사 등 몇 분이 모여서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정식으로 조직해 강화하기로 했습니다.

1981년 5월 7일 아세아연합신학원에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창립총회를 열고 회칙을 통과시킨 후, 초대 회장에 박조준 목사를, 부회장에 김준곤, 한철하, 정진경, 나원용 목사를 선출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정진경 목사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한국교회와 아시아 교회 안에 연합과 협력을 도모하며 바른 신앙을 펴 나아가는 일을 함께 했습니다.

1984년 10월 22일 신촌성결교회에서 모인 제2차 총회에서는 정진경 목사가 회장으로, 김명혁 목사가 총무로 선출되었고, 1986년 12월 15일 신촌성결교회에서 모인 제3차 총회에서도 정진경 목사가 회장으로 김명혁 목사가 총무로 다시 선출되어, 우리 두 사람은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중심으로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한국교회와 아시아 교회를 봉사하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정진경 김명혁
▲김명혁 목사(맨 왼쪽)가 10년 전 장례예배에서 정진경 목사 가족들을 위로하고 있다. ⓒ크리스천투데이 DB

셋째로, 정진경 목사님은 함께 다니기에 너무 편한 분이었고, 소박하시고 따뜻하신 분이었습니다.

저는 30여 년 동안 정진경 목사님과 ‘한국복음주의협의회’와 ‘아시아복음주의협의회’와 ‘소련선교회’ 등의 일로 아시아와 세계 곳곳을 수 없이 많이 함께 다녔는데, 정진경 목사님은 함께 다니기에 너무 편한 분이었고 소박하시고 따뜻하시고 친절하신 분이었습니다.

정 목사님은 무엇을 강하게 주장하시는 분도, 강요하시는 분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환경에 잘 적응하시는 편안한 분이셨습니다. 언젠가 ’아시아복음주의협의회’ 일로 홍콩에 머문 일이 있었는데, 그때 방이 너무 추워서 옷을 그대로 입고 코트까지 입고 잔 일이 있었는데도 아무 불평도 안 하셨습니다.

정 목사님은 하나님과 한국교회와 아시아 교회와 세계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신 분이었고, 연합과 협력을 도모하신 분이었고, 바른 신앙을 펴 나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분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저는 2009년 10월 17일 저녁 ‘일본복음주의연맹’과 ‘아시아복음주의연맹’의 회장을 역임한 일본 교회의 지도자 죠수아 쯔타다 목사님을 방문하고 오랜만에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는데, 쯔타다 목사는 저를 만나자마자 정진경 목사님의 안부를 물으면서 정 목사님께서 일본 교회를 위해 많은 수고를 하신 일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정진경 목사님의 별세 소식을 전했을 때 쯔타다 목사는 너무 아쉬워했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아시아 교회의 거의 모든 지도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은 분이시기도 했습니다.

넷째로, 정진경 목사님은 한국교회를 바로 진단하시고 한국교회가 힘써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늘 바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진경 목사님께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모임에서 한국교회가 힘써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하신 말씀들 중 세 가지만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985년 3월 11일 노량진교회에서 ‘주일 성수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란 주제로 모인 월례조찬 기도회 및 발표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들이 꼭 지켜야 할 두 가지 생활 원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물질의 1/10을 바치는 십일조, 또 하나는 시간의 1/7을 바치는 주일성수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에서 하루를 성별 하는 것은 우리에게 영적으로 육적으로 안식의 축복이 됩니다. 오늘날 목회자를 위시하여 모든 교인들이 성수주일에 대한 개념이 희미해져서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주일성수를 율법적으로 하는 과오와 아울러 세속주의적으로 방종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습니다. 주일 하루를 온전히 성별 하여 지킴으로 하나님께 영광은 물론, 나 개인과 사회에 축복이라는 주일성수의 근본정신을 철두철미하게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지엽적인 문제 즉 직장 내지 학교의 주일 근무 또는 등교에 대해서도 자연적으로 도전할 수 있고 문제 해결에 나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1991년 6월 10일 연희장로교회에서 ‘설교 구성법’이란 주제를 가지고 모인 월례조찬 기도회 및 발표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작금의 강단을 보노라면 세상 따라 가는 모습을 보는데 텔레비전과 같이 외국 영향을 많이 받았는지 모르지만 강단이 꼭 무대같이 되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나는 그런 것 없이 조용조용히 말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이제 대부분의 신자들이 그 의식수준이나 지식수준이 높기 때문에 소리를 지른다고 그 소리가 청중의 가슴에 감동을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공중으로 날아가는 설교보다는 조용히 스며들게 하는 그런 설교를 하는 것에 그런 설교를 하는 사람의 하나로서 동감합니다. 그리고 책망보다는 호소에 역점을 둔다는 말씀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우리는 늘 심판자의 입장에서 교육자의 입장에서 청중의 인격을 거의 무시하고 내리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또 다음에 커뮤니케이션의 효과를 누려야겠다고 하셨는데 사실 우리는 말하고 저들은 듣는데 반응이 그때 그때 나온다고 보기는 어려우나 설교가 끝나고 나가면서 인사할 때 ‘목사님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시무룩해 하며 돌아가는 분들도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는 이 두 가지 반응 모두 다 효과를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전부 긍정만 해주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공감하면서 많은 도움을 주신 것을 감사 드립니다.”

2007년 11월 5일 저는 한국교회 지도자 다섯 분들에게 한국교회의 오늘과 내일을 진단해 달라는 전화 인터뷰를 했습니다. 오늘의 사회가 한국교회를 어떻게 보는가? 교회성장주의와 대 교회주의를 어떻게 보는가? 2008년도의 바람직한 목회의 트랜드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들을 던졌는데 정진경 목사님의 진단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교회성장> 2007년 12월호 ‘목회 트렌드 진단’에 실린 글의 일부를 여기 옮깁니다. “오늘의 사회가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비판적이다. 교회를 아주 무시한다. 그 중요 원인은 100주년 기념 행사 같은 밖으로 내 세우는 것은 많은데 내실을 기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한국교회가 전도를 해서 성장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성장주의나 성장 신드롬에 빠지는 것은 문제이다. 성장보다는 건강이 더 중요하다. 질과 양이 균형을 이루는 건강한 교회를 만들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특히 목회자들이 신중을 기하여야 하는데 예를 들어 정치에 야합하는 것은 큰 문제이다. 대형 마트처럼 대형 교회를 지향하는 것은 잘못이다. 대 교회라는 말을 아예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

2008년도는 교회가 너무 떠들지 말고 과시적 행사를 지양하고 조용하게 내실을 기하도록 하면 좋겠다. 한기총도 그러면 좋겠다. 지금 성령운동이 인위적으로 흐르고 있는데, 내가 성령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성령의 지배를 받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정진경 목사님의 지적은 너무너무 올바른 지적이었습니다.

다섯째로, 정진경 목사님은 한국의 복음주의 운동과 함께 선교운동을 지도하셨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거의 모든 선교 운동을 정진경 목사님과 함께 했습니다. ‘한국동반자선교협의회’와 ‘한국세계선교협의회’의 조직도 정진경 목사님과 함께 했습니다. 저는 ‘한국세계선교협의회 설립 배경 및 2000년 세계선교대회 개최의 의의’라는 제목으로 발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한국세계선교협의회’와 ‘2000년 세계선교대회’가 있기까지, 앞서 간 수많은 선교 선구자들의 수고와 희생이 있었음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1) 선교의 개척자들이 있었다. 한국교회 초창기부터 1950년대까지 이기풍, 한석진, 방지일, 이관선, 한경희, 박상순, 최찬영, 김순일, 전재옥 등의 선교 개척자들이 있었다.

2) 그 다음 선교의 각성자들과 사역자들이 있었다. 196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조동진, 김의환, 한철하, 김준곤 등의 선교 각성자들이 있었고 채은수, 김계용, 박희민, 박창환, 신홍식, 임흥빈, 서만수, 김성준, 서정운, 이은무, 김활영, 강승삼, 이재환 등의 선교 사역자들이 있었다.

3) 그 다음 선교 운동가들이 있었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한국과 미국에서 협력적이고 연합적인 선교운동이 일어났다. 정진경, 곽선희, 전호진, 조천일, 로봉린, 최일식 등이 한국과 미국에서 선교 연합운동을 일으키는 산파의 역할을 했다.

WEA 대표와 한복협 대표, 연합 모색
▲세계복음주의연맹(WEA) 제프 터니클리프 대표와 한국복음주의협의회(한복협, KEF) 김명혁 회장, 정진경 명예회장이 대화를 나누던 모습. ⓒ크리스천투데이 DB

1988년 1월 18일 서울에서 ‘한국동반자선교협의회’가 조직되었고 1988년 8월 25일부터 30일까지 미국 휘튼대학교에서 ‘88 한인세계선교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두 조직과 모임이 ‘한국세계선교협의회’를 태동시켰다고 하겠다.

‘88 한인세계선교대회’는 선교를 구심점으로 북미주 한인교회를 하나로 묶은 뜻 깊은 대회였고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북미주 한인교회 지도자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게 한 역사적인 대회였다. 1991년 11월 5일부터 8일까지 서울 횃불선교회관에서 모인 ‘2000년대를 향한 민족과 세계복음화대회’는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북미주 한인교회 지도자들이 공동으로 주최한 역사적인 대회로 이 대회는 선언문에서 선교의 동역과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와 같은 모든 선교 운동의 중심에는 언제나 정진경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여섯째로, 정진경 목사님에 대한 한 가지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저는 30여 년 동안 ‘한국복음주의협의회’와 ‘아시아복음주의협의회’, 그리고 ‘소련선교회’ 등으로 인해 정 목사님과 함께 일본, 홍콩, 인도,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싱가폴, 스리랑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 중국, 백두산 등지를 함께 방문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톡과 중국과 백두산을 방문할 때는 저의 집 사람이 다른 여 집사님과 룸메이트를 했고 저는 정 목사님과 룸메이트를 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부담이 없는 친밀한 교제를 나누곤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한국교회와 아시아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항상 같은 생각과 같은 마음을 지니곤 했습니다. 저는 정 목사님과 함께 지내는 것이 좋았고, 정 목사님은 부족한 저를 늘 칭찬해 주시면서 저를 좋아했습니다.

여기 한 가지 알려지지 않은 에피소드를 소개합니다. 1994년 6월 정진경 목사님, 최복규 목사님, 홍순우 목사님, 전호진 박사님, 김영복 목사님. 최명국 국장님 그리고 강변교회의 평신도 몇 분들과 함께 15여명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 중국, 백두산 등지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중국 하얼빈을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이곳 저곳을 방문했는데 버스의 중국인 안내원이 우리의 언행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하얼빈 역으로 가게 되었는데 저는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를 생각하며 만세를 부르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안내원은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만세를 불러야 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때 정진경 목사님은 만세를 부르는 것은 당시 중국의 형편상 위험한 일이라고 말하면서, 부르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안중근 의사는 생명을 내걸고 의거를 했는데 하얼빈 역에까지 와서 만세도 부르지 않으면 무슨 체면이냐고 말하면서 만세를 부르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때 홍순우 목사님은 저를 보고 “해, 해” 라고 격려했고 정진경 목사님은 “하지 마, 하지 마” 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정진경 목사님을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며 따랐지만, 그 때는 정 목사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얼빈 역에 도착하자 마자 모두를 함께 모이게 했습니다. 우리 일행은 거의 모두, 한 두 사람만 제외하고, 나를 따라 찬송가와 애국가를 불렀고 만세를 삼창했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은 소신이 강하시면서도, 나처럼 막가는 것을 삼가시는 아주 신중한 면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