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아트설교연구원 연구원들의 서평과 원장 김도인 목사의 설교 글쓰기 원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후 이들의 연구 결과물, 즉 설교문을 보고 싶다는 독자들의 요청에 따라, 설교문을 공개합니다. 먼저 원장 김도인 목사의 베드로전서 설교를 연속 게재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객관적인 평가를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관계
▲ⓒDuy Pham
베드로전서 1장 1-2절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황금률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백금률이다.

황금률은 내가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말할 때 사용한다. 마태복음 7장 12절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백금률은 공감의 중요성을 말할 때 사용한다. “그들이 바라는 대로 그들에게 해 주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황금률을 말씀하셨지만, 예수님은 백금률을 뛰어넘는 삶을 사셨다.

황금률과 백금률을 한 번에 담아낸 것은 십자가다. 십자가는 자기를 죽여 다른 사람들을 살리신 것이다.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것과 그들이 바라는 것을 합쳐도 더 뛰어난 행동이다.

최고의 행동인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니라 남을 위한 삶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현실에서 인간은 자기만을 위해 살아간다. 대단히 이기적이다. 채운 다음에도 부족하다고 느끼면 또 채운다. 남에게 해를 가하면서까지 끝없이 채운다. 이익이 되는 거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예수님은 완전히 다르셨다. 예수님은 철저히 이타적이셨다. 남을 위해서 살아가셨다. 그것도 답이 없는 죄인을 위해 살아가셨다.

우리가 살아갈 때 명심할 것이 있다. ‘내가 어떻게 사는가?’ 다.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누구냐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이찬수 목사는 그의 책 《아는 것보다 사는 것이 중요하다》에서, 이전의 책인 《삶으로 증명하라》가 자신이 가장 아끼는 책이라고 했다. 그 말은 신앙생활이란 삶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삶이 가장 중요하다. 인도의 성자라 불리는 간디도 “삶이 자기의 메시지”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삶이 중요하다. 신앙은 삶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백금률보다는 황금률이다. 더 나아가 예수님처럼 사는 것을 삶이 목표로 삼아야 한다. 공감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헌신과 희생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삶이 중요하다. 삶이 중요한 것은 삶은 관계이기 때문이다. 삶이 관계이듯이 신앙생활도 ‘관계’다.

왜 신앙생활이 ‘관계’인가?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은 베드로가 로마의 핍박으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편지 내용의 핵심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한다. 베드로가 이와 같이 편지하는 것은 신앙생활은 관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계를 잘 해야 한다. 하나님과 관계 잘 해야 한다. 사람과 관계 잘 해야 한다. 생태계와 관계도 잘 해야 한다.

우리는 삶에서 관계를 잘 해야 한다. 관계를 잘 해야 하는 것은 관계를 하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관계를 잘못하면 ‘부담스러움’이 된다. 관계를 잘하면 ’깊어짐‘이 된다.

부담스러움은 지속적인 관계로 이어지지 못한다. 어색함, 멀어짐을 통해 결국 단절됨이 된다. 하지만 깊어짐은 좋은 관계로 이어진다. 좋은 관계로 발전하게 되는 것은 이미 서로 마음이 통했기 때문이다.

제가 아내와 만나 결혼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관계가 끊어짐이 아니라 깊어졌기 때문이다. 제가 책을 10년 만에 5,000권 읽을 수 있었던 것도, 책의 즐거움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처음 독서를 할 때는 몇 명이 같이 시작했다. 그들은 도중에 그만뒀다. 그 이유는 책과의 관계가 부담스러워졌기 때문이다. 부담스러움은 관계를 단절시킨다. 반대로 깊어짐은 관계를 지속시킨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에 마가를 찾았다. 그 이유는 마가와 신앙 안에서 관계가 즐거웠기 때문이다. 디모데전서 4장 11절에서, 바울이 마가에 대해 “유익하다”는 말을 한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유익하다”는 말은 관계를 끊고 싶게 하지 않고 관계를 지속하게 만든다는 말이다.

관계는 지속해야 한다. 지속해야 깊어진다. 관계가 지속되려면 유익함이 필수다.

오늘 베드로가 흩어진 교회에 편지를 쓰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유익함의 관계가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익한 관계를 가지려면 관계가 기대감이 있어야 한다. 전 하버드 대 심리학과 교수인 조던 B. 피터슨 (Jordan B. Peterson)는 그의 책 《12가지 인생의 법칙》에서 3번째 법칙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만 만나라.”

당신에게 최고의 모습을 기대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즉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럼 관계가 좋을 수밖에 없다.

누구나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을 만나고자 한다. 하지만 이는 녹록치 않다. 하지만 세상에 유익만 되는 분이 있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무조건 유익이 된다.

그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되시는가?

우리의 마음을 이해해주신다. 우리 마음을 말씀으로 만져주신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아시고, 채워주려 하신다.

이왕 관계를 가질 거라면, 하나님과 유익이 되는 관계를 갖고자 해야 한다. 관계를 갖되, 깊은 관계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지면 절망이 소망으로 바뀐다. 끝난 사람이었는데, ‘누가 끝이래!’로 바뀐다.

제가 그러했다. 20대 죽을 위기에서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지니 죽었어야 하는 데 살아났다. 하나님과 관계가 깊어지면 하나님의 관심이 깊어진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커진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은 관계다. 다른 분이 아니라 우리를 최고로 만들어주는 하나님과의 관계다. 이왕 하나님과 관계 갖는 것 좋은 관계를 가져야 한다. 더 나아가 좋은 관계를 지속해야 한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지속하려면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바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 누구나 관계를 잘 하고 싶다. 하지만 관계를 잘 하기 어렵다. 그것은 관계의 시작이 신뢰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신뢰를 쌓기가 만만치 않다.

나아가 신뢰 관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신뢰가 유지되었다가도 삐끗하면 신뢰가 깨진다. 문제는 신뢰가 깨지는 순간, 관계도 깨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관계에서 신뢰를 중시해야 한다. 은행도 신용을 중시한다. 은행은 언제나 고객을 신용으로 판단한다. 신용에 따라 대출 여부가 결정된다. 은행은 고객을 신용도에 따라 1등급부터 10등급까지 매긴다.

나라마다 신용등급이 있다. 무디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피치는 각 나라마다 신용 등급을 매긴다. 피치의 우리나라 신용등급은 ’AA-‘이다. 이 등급은 중국과 일본보다 높다. 이 등급이 7년째 유지되고 있다. 무디스는 우리나라를 2등급에서 4등급에 속한 ’Aa2‘로 매긴다.

1997년 우리나라는 국가 신용 위기를 맞았다. 그 결과 IMF로부터 구제금융 지원을 받아야 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국가의 단기 부채를 갚을 능력이 없었다. 결국 IMF에 국가를 운명을 맡겼다.

당시 무디스는 투기등급인 ba1 등급으로 6단계 신용등급을 매겼다. S&P는 무려 10등급을 강등시킨 B+였다.

만약 신앙생활도 신용등급이 있다면, 당신은 몇 등급 정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 등급은 1등급부터 10등급까지 있다고 가정해 보라. 저는 3등급 정도 되는 것 같다.

신앙생활에서 등급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믿음의 변동 폭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변동 폭이 크면 안 된다. 믿음은 언제나 일정해야 한다. 마치 지구가 1년에 365일 돌듯이 변함이 없어야 한다. 만약 변함이 있으면 종말을 맞이할 수 있다.

요즘 개인의 신뢰도는 페이스북의 ‘좋아요’와 ‘댓글’로 알 수 있는 것 같다. 어떤 분은 몇백 개씩 ‘좋아요’를 받는다. 어떤 분은 열 개도 넘기기 어렵다. 저는 몇십 개 정도 받는다. 그리스도인은 페이스북의 ‘좋아요’에 목숨 걸면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좋아요’에 목을 매야 한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좋아요’를 몇 개나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 숫자가 많아야 한다. 지금 적을지라도 앞으로 많아져야 한다.

대통령도 신용이 있다. 대통령의 신용은 지지율이다. 지지율이 높으면 국민들이 대통령의 국정을 신뢰한다는 것이다. 지지율이 떨어지면 국민들이 대통령의 국정을 불신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상호간의 관계 좋기가 쉽지 않다. 우리나라는 지금 일본과 관계가 최악이다. 일본이 경제 전쟁을 불사함으로써 더욱 악화되고 있다.

하지만 믿음은 관계를 좋게 만든다. 초대교회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관계가 아주 좋았다. 그 이유는 핍박의 와중에서도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교회에 쓴 편지 통해 하나님께서 교인들을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인들로 극심한 핍박을 받지만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 등 여기 저기 흩어져, 예수님을 목숨을 걸고 믿는다. 이는 초대교회가 하나님과 관계가 좋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책 《카타콤의 순교자》에 이런 글이 있다. “이교도 로마의 가장 지독한 박해 밑에서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이 받았던 고통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우리의 눈앞에 보여준다.”

초대교회는 로마의 지독한 박해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견뎠다. 이는 하나님과 돈독한 관계가 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다.

북한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하나님과 관계가 좋다. 북한 그리스도인들은 순교가 다반사다. 1945년부터 2006년까지 약 1만 7천명의 성도가 북한에서 순교하였다. 12년이 지난 지금은 아무리 적어도 2만 명이 넘게 순교하였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과 돈독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초대교회, 로마의 박해, 북한도 핍박과 박해 가운데 하나님과 관계가 좋다. 핍박과 박해가 없는 자유 대한민국에서 신앙 생활하는 우리들은 더 하나님과 관계가 좋아야 정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과 관계가 약화되고 있다. 교인 수가 줄어들고 있다. 통합 교단 통계를 보니, 2018년 교인 수가 약 7만 명이 줄었다고 한다.

지금은 전도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한다. 그럴지라도 전도해야 한다. 요즘은 길거리에서 찬양을 부르는 것도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고 한다. 그럴지라도 길거리에서 찬양을 부를 수 있어야 한다. 단, 지혜롭게 해야 한다. 아트설교연구원 회원 중 분당 야탑역에서 찬양 버스킹(거리 공연)을 하시는 분이 있다.

복음 전도, 버스킹도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을 때 가능하다. 이는 믿음과 용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좋은 관계가 아니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삶은 관계를 통해서 형성된다. 신앙도 관계를 통해서 이뤄간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맺을 관계는 몇 가지가 있다. 보편적인 관계는 두 가지다. 하나는 사람과의 관계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다.

그리스도인은 사람과의 관계를 잘 해야 한다. 지금 전도가 힘들다고 한다. 그렇지만 한 가지 전도는 되고 있다. 바로 ‘관계 전도’다. 주위에 알고 있는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위해서 관계를 잘 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웃 사랑이 중요하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낫다고 하셨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막 12:33).”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관계를 좋게 한다. 우리가 이웃과 좋은 관계를 가지려면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좋은 마음이 좋은 관계를 만든다.

만약 악한 마음을 가지면 해코지가 뒤따른다. 왕왕 층간 소음 문제로 언쟁이 일어난다. 심지어는 싸움으로 이어지기까지 한다. 이는 좋은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지 않은 결과다. 그리스도인은 좋은 마음으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져야 한다.

중국 하얼빈에 있는 기독교 학교인 만방학교가 있다. 그 학교에는 3가지가 없다. 첫째, 야유가 없다. 둘째, 경쟁이 없다. 셋째, 소외된 사람이 없다.

이렇게 된 것은 좋은 마음으로 학교를 운영하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선생님이 좋은 마음으로 학생에게 다가간다. 학생들이 좋은 마음으로 선생님에게 다가간다.

학교에서 학생에 대해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니 인성을 중시한다. 인성을 중시했더니 학생들은 공부로 스스로 한다. 결국 인성으로 학생을 가르치려면 좋은 마음이 필수다.

문제는 좋은 마음을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느냐다.

좋은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야고보서 1장 17절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우리가 좋은 마음을 갖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은 선이시고 인간은 악하다. 성경은 인간을 죄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좋은 마음이 나올 수 없다. 인간이 좋은 마음이 안 나오는 것은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의 불평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최근에 탈북 모자가 먹지 못해 죽었다. 이는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반증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좋은 분이시다. 찬양 중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이라는 가사가 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좋은 마음을 구해야 한다. 그럴 때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좋은 관계를 가져야 한다. 좋은 관계를 가지려면 두 가지를 갖춰야 한다. 첫째는 배려다. 자기 먼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또 다른 하나는 감사다. 언제나 감사의 마음을 가질 때 좋은 관계를 끝까지 가지고 갈 수 있다.

배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소와 사자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기는 마치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와 비슷하다.

소와 사자가 죽도록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둘은 결혼해 함께 살자고 뜻을 모았다. 결혼식 날, 둘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 사랑하기로 약속했다. 결혼 후, 소는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풀만을 골라 날마다 사자에게 주었다.

사자는 풀이 싫었지만 인내했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 사냥을 했고, 사냥감의 맛있는 살코기 부위만을 골라 날마다 소에게 주었다. 소도 너무나 괴로웠지만 참았다.

그러나 소와 사자 모두 야위어갔고 참을성에는 한계가 있었다. 소와 사자는 끝내 다툼으로 이어졌다. 둘은 끝내 헤어지기로 결정했다. 헤어지면서 둘은 서로, “난 최선을 다했어. 내 모습을 보라고. 널 위해 희생하고 사랑했단 말이야” 라고 했다.

둘의 문제는 배려와 감사의 부족으로 헤어졌다. 결국 소는 소의 세상을, 사자는 사자의 세상을 살아갔다.

배려하지 않으면 헤어지게 되어 있다. 즉 좋은 관계가 아니라 나쁜 관계로 이어진다. 종국에는 파국을 맞는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다. 자기 생각이 아니라 상대방 입장에서 살아가야 한다.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려면 자기 주장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 공감하고자 해야 한다.

《옵저버The Observer》지에서 영국의 대표적인 ‘라이프스타일 철학자’로 거명한 철학자, 문화사상가이자 작가인 로먼 크르즈나릭 (Roman Krznaric)은 그의 책 《공감하는 능력》에서 이런 말을 한다. “공감은 인간관계의 혁명을 일으킨다.”

공감은 인간관계의 혁명을 일으킨다. 그 말은 그리스도인은 관계에서 공감의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말이다.

로마서 8장 27절을 보자.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마음을 아신다는 것은 공감한다는 것이다. 성도를 위하여 간구한다는 것은 이미 공감했다는 것이다. 하나님도 공감하신다면 우리도 공감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에 공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기도로 하나님과 공감하고자 한다면, 성경 읽기도 공감으로 읽어야 한다.

공감은 하나로 만든다. 하나님과 공감할 때 우리 생각과 말씀이 하나가 된다. 〈메시지 성경〉을 쓴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은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읽는 것이 영적 독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영적 독서란 성경을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삶과 성경 읽기가 상호보완적인 것을 말한다. 성경이 삶에 동화되어야 한다. 삶이 말씀에 동화되게 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과의 관계다.

하나님과 관계는 지속적이어야 한다. 하나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를 하려면 관계를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해야 한다. 장애물을 제거하지 못하면 지속적인 관계가 될 수 없다.

양혁승, 류지성, 배종석이 공저한 책인 《무엇이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가》에서 아래와 같은 말이 있다. “깊이 없는 영성이 문제다.”

다른 말로 영성이 성장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영성이 성장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아갈 때마다 장애물에 막힐 수 있다.

복음주의 최고의 작가로 불리는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이 보다 한 발 더 나간다. “은혜를 나누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죄책감을 나누어 주는 사람들이 요즘 그리스도인들이다.”

영성의 깊이는 고사하고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이 말은 하나님과 지속적인 관계가 끊어졌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려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되는 장애물이 제거되어야 한다.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과 지속적인 관계를 방해하는 것은 교만함이다. 성경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한다. 교만은 하나님과 관계를 깨뜨린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관계에서 순종적이고 겸손해야 한다. 그리스도인 신앙에 중심에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십자가다. 십자가는 순종과 겸손의 표상이다.

박살난 도자기는 원 상태로 회복할 수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로 깨진 관계를 본드보다 더 달라붙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어야 한다.

신앙생활은 관계다. 그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본문 2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세상 것보다 하나님의 것이 ‘더욱’ 많아야 한다. 내 것이 많으면 하나님과 관계가 지속적이기 힘들다. 하나님의 것이 더욱 많으면 하나님과 관계가 지속적이 된다.

우리는 세상 것에 더 많기를 원한다. 물질, 관계하고 싶은 사람, 지위 등등이 더 많길 원한다. 아니다. 하나님의 것이 더욱 많아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과 관계가 지속적이 된다.

저울은 무거운 것쪽으로 기운다. 더 많은 것이 있는 쪽으로 기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쪽으로 기울어야 한다. 세상적인 것보다 하나님의 것이 ‘더’ 많아야 한다. 하나님의 것이 더 많을 때 절대 세상 것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다윗을 통해 배울 것이 있다. 하나님과 관계는 다윗과 같이 하는 것이 금상첨화라는 것이다. 이는 쉽지 않다. 그러나 도전해야 한다.

성경은 다윗을 어떻게 말하는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행 13:22).”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다고 한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여러 번의 테스트를 통해서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것을 입증한 사람이란 뜻이다.

하나님과 관계는 그저 좋은 관계에서 그치면 안 된다. 실행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행할 수 있는 관계여야 한다.

반도체 만들 때 작은 물질만 들어가도 제품이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내 생각, 계획을 첨가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다윗과 같이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마음이 쏙 들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뜻이 이 땅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 가운데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은 사람과 관계를 잘 해야 한다. 하나님과 관계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결국에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과 관계를 해야 한다. 저는 여러분들이 다윗과 같이 하나님과 관계를 잘 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관계를 할 수 있기를 축복한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는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