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창세기 민경구
다시 읽는 창세기

민경구 | 이레서원 | 312쪽 | 16,500원

나올 것이 나왔다. 언젠가는 나오리라 예상을 했었다.

15세기 출애굽 연대를 지지하는 보수 신앙으로서, 창세기를 바라보는 관점은 당연히 출애굽의 관점이어야 한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창세기를 읽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창세기를 연대기적으로 읽으려 한다.

그러나 모세오경의 저자를 모세로 확신한다면, 그러한 독법은 지혜롭지 못하다. 만약 모세 저작설을 믿는다면, 창세기는 출애굽 시대의 관점에서 재해석된 역사이기 때문이다. 새롭게 해석함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저자 민경구 교수는 철저히 출애굽의 관점에서 창세기 다시 읽기를 시도한다. 나아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포로 귀환의 이야기로 끌고 간다. 이러한 해석은 출(出)바벨론을 명령한 역대기의 후속으로,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읽을 수도 있다.

“창세기에서 주요하게 언급되는 ‘(땅에서) 떠남’과 ‘땅 정착 / 귀환’, 그리고 명확하게 언급되지는 않는 ‘성소 건설’에 대한 주제는 포로기 이후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창세기와 포로기 이후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창세기의 어느 본문에 출애굽/출바벨론의 시각이 나타나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14쪽)”.

70인역(LXX)을 따르는 대부분의 현대 교회는 말라기를 구약의 마지막에 두지만, 히브리 성서는 역대기가 마지막이다. 고토로 돌아가 성전을 지으라는 고레스 칙령이 대미를 장식한다. 즉 바벨론을 나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출바벨론적 관점은 아브라함과 바벨론 포로된 이스라엘의 길이 겹쳐진다. 아브라함의 언약과 고레스 칙령은 동일하게 ‘떠남-정착-(성전 건축)’의 공식(23쪽)으로 만들 수 있다. 저자는 22편의 글을 통해 창세기를 출바벨론 관점에서 읽는다.

출애굽 관점에서 성경읽기는 무엇일까? 먼저 출애굽은 다시 출바벨론과 연결된다. 출애굽과 출바벨론은 포로에서 자유를 얻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역사적 기반에서 동일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한영 교수는 ‘서술하는 시대’로 독자를 이끈다고 표현한다. 즉 ‘포로귀환 이야기(13쪽)’ 관점에서 모세오경을 ‘다시 읽기’하는 것이다.

포로 귀환 공동체의 관점에서 다시 모세오경을 읽자는 제안은 월터 부르그만 등의 일군의 학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주장된 것이다. 하지만 성경신학을 도외시해온 한국교회 정서상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떤 한 부분에서 출애굽과 출바벨론 관점으로 읽기가 제안되기는 했지만, 이번 책처럼 전반적으로 다시 읽기는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으로 안다. 이제 책 속으로 들어가, 저자의 출애굽 관점에서 창세기 읽기가 어떤지를 몇 부분만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창 1:26-27)

창세기 1장 26-27절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 이야기를 다룬다. 창세기의 이러한 선언은 파격적이고 혁명적이다. 고대 세계에서 오직 왕만이 ‘신의 형을 소유한 유일한 존재(28쪽)’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세기는 창조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고 선언함으로써, ‘만민 평등 사상’을 드러낸다(29쪽).

모든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에, 살인은 악이요 하나님의 분노를 자아내는 행위이다. 타인의 피를 흘리는 자는 그도 피를 흘려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이다(창 9:6).

또한 왕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인간을 차별한 근거나 타인의 우위에서 절대적 권력을 행사할 이유도 없다. 신의 형상을 지닌 자는 신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가진다.

그러므로 중간의 어떤 매개체(우상)를 통해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만날 필요가 없다. “즉 우상이 필요하지 않다(40쪽)”. 인간이 신이 된 제국에서의 탈출은 불가피해진다.

“성서에서는 인간의 손으로 제작한 ‘형상’은 ‘우상’으로 취급하여 부정적으로 묘사하지만(민 33:52), 하나님이 자신의 모습대로 직접 만든 형상인 인간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은 인간과 연합하기 위해 자신의 형상을 인간에게 내재하도록 하셨다(39쪽)”.

아브라함의 소명, 머나먼 미래를 꿈꾸다(창 15:1-7)

창세기 12장에 소개된 아브라함의 소명은 구약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창세기를 유심히 읽어보면, 그가 ‘하란’(창 12:5)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독자들은 왜 하란보다 ‘갈대아 우르’를 주목할까? 저자는 아브라함이 소명을 받은 곳이 어딘지를 추적하는 것이다. 창세기 11장 31절에서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과 롯을 데라고 하란으로 이동한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내를 구할 때 종을 ‘하란’으로 보낸다. 그곳은 ‘내 고향 내 족속(창 24:4)’이 있는 곳이다. 아브라함에게 고향 친척은 갈대아 우르가 아니라 하란인 것이다. 그러나 창세기 15장 7절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불렀다고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의 인식 속에 갈대아 우르는 고향이나 친척이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럼에도 왜 15장에 다시 등장하는 것일까? 저자는 ‘밖으로 나가다’의 뜻인 ‘야짜’라는 히브리어 단어에 주목한다.

이 동사를 사용함으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야 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즉 아브라함의 갈대아 우르에서 나오는 행위는 애굽과 바벨론에서 나오는 행위가 같은 의미인 것이다.

출바벨론 공동체는 아브라함의 ‘야짜’ 행위를 출바벨론 행위와 동일시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모세보다 앞선 출애굽의 원형으로 제시된 것(121쪽)’이 확실하다. 이러한 맥락은 느헤미야 9장 7절에서 다시 언급된다.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느 9:7)”.

창세기 gene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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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시듯, 포로 된 이스라엘을 바벨론에서 불러내심으로 새 언약의 민족으로 태어나게 하신다.

창세기 저자는 아브라함의 고향을 하란으로 상정하는 동시에, ‘갈대아 우르’를 강조한다. 아브라함은 출바벨론의 원형으로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제시되었고, 갈대아 즉,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다(창 15:6-7). 디아스포라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 아브라함의 행위는 모든 이스라엘인이 본받고 따라야 할 모범이다(123쪽)”.

이제 마무리해 보자. 이 책의 장점은 ‘철저히 성경신학적’이라는 점이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회는 루터 이전의 신학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루터에 의해 촉발된 종교개혁은 철저히 성경 신학에 근거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조직신학적 관점으로 우회하고 말았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원인이자 수단은 성경이었다. 루터는 초대교회 문헌들을 유심히 살폈다. 루터는 성경신학자였다. 하지만 그 후대는 루터에게 과도하게 집착함으로, 루터가 소중히 여겼던 초대교회 문헌을 망각하는 오류를 범했다.

현대 장로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성경을 잃어 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성경’을 굳이 애써서 공부하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나태함에 빠진 것이다.

이제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미 아는 성경이 아니라, 성경이 진짜 말하고 강조하는 것들을 찬찬히 들여다 보아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오경을, 특히 창세기를 출바벨론 관점에서 읽었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할 재건 공동체의 소명으로 받았다.

아직 논쟁이 적지 않지만, 민경구 교수는 원저자의 의도와 이스라엘 역사에서 마땅히 읽어야 할 출바벨론 관점에서 창세기를 다시 읽어내고 있다. 상징과 문학적 기법에 충실하면서도, 개혁적 성경해석에서 물러서지 않는 보수성도 함께 엿보인다.

창세기를 깊이 읽고, 이전의 성경 해석을 탁월한 안목으로 보강하면서도 확장시켜 준다. 한 장이라도 유심히 읽어본 독자라면, 저자가 얼마나 성경을 사랑하고, 원어를 밝히 드러냄으로 원의를 바르게 소개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창세기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기꺼이 추천하며, 특히 설교자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정현욱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인, 에레츠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