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구속으로 된 구원이기에

구원을 접근하는데 구속론적(救贖論的)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도덕론적(ethical)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다. 전자는 구원을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의존시키는 반면 후자는 ‘도덕(선행)’에 의존시키는데, 후자는 모든 종교의 보편적 속성이다.

‘구속론적’ 구원 개념은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께 죄값으로 지불되어, 죄인이 그의 진노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을 입어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구속론적’ 구원 개념은 인간의 선행과 엮일 여지가 차단된다. 둘은 전혀 성격이 다르기에 서로 협동, 교호(交互)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독특하게도 이신행칭의자(以信行稱義者)들은 구원 개념에 ‘구속’과 ‘윤리(성화)’라는 교호(交互) 불가한 둘을 억지 결속시켰다.

“울어도 못하네… 힘써도 못하네… 참아도 못하네… 말과 뜻과 행실이 깨끗하고 착해도 못하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보셨네. 나를 구원하실 이 예수 밖에 없네”라는 찬송시 그대로, 기독교의 구원관은 인간의 노력과 선함이 배제된 ‘십자가 구속’에 기반 한다.

유월절(the Passover)에 죽음의 사자가 어린양의 피가 뿌려진 이스라엘 집을 넘어간 것은(pass over, 출 12:27) 구원의 ‘구속적’ 의미를 잘 설명해준다. 죽음의 사자가 그들의 집을 넘어간 것은 그들 집의 ‘도덕성’이나 다른 기준을 보고서가 아닌, 오직 ‘죄의 구속’으로서의‘어린양의 피’를 보고서이다.

‘죄값 지불’ 곧, ‘구속(redemption, 救贖)’으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는 ‘구원’은 사람이 간여할 수 없다. 오직 ‘구원자’ 하나님과 ‘대속자’ 그리스도의 거래(去來) 영역이며 인간의 어떤 것이 끼어들 여지를 없이한다. 이처럼 구속론적인 구원관은 실패를 담보하는 인간의 ‘윤리적’접근이 차단됐기에 ‘구원 상실’의 여지도 함께 차단됐다.

◈하나님의 소유된 구원이기에

구원은 죄인을 살리는 인간의 일 인 동시에 하나님 자신의 일 곧, 죄인을 자신의 소유로 삼는 일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지만 인간이 타락하여 부정해진 후에는 그들을 소유할 수가 없었기에, 거룩자(Holy One)가 그들을 소유하기 위해 먼저 그들을 죄에서 구속해야 했다.

‘구원(salvation)’에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진다(deliver)’는 의미와 함께 하나님이 자기의 소유로 삼는다는 ‘구속(redemption)’의 뜻이 함의된 것도 이 때문이고, 성경이 ‘구원(saving)’과 ‘하나님의 소유’를 함께 엮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7:23)”,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바로 이 점이 구원이 상실될 수 없는 이유이다. 만일 구원이 상실된다면 하나님은 자신의 소유(구속물)를 잃는 것이 되고,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자기 소유도 지켜내지 못하는 무능자가 되고 만다.

마귀가 성도의 구원을 뺏을 수 있다면 마귀는 하나님보다 강한 자가 되고, 인간의 연약성으로 그의 구원이 상실된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이 인간의 연약성을 이기지 못한 것이 된다.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9)”,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0, 14)”.

다시 말하지만, ‘구원 상실’은 하나님의 ‘명예’와 직결된다. 명예를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은 자기 명예를 실추시킬 일은 안하신다. 하나님이 구원하려는 자가 ‘구원 상실’을 당한다면 그의 명예가 실추될 것이 뻔한데, 그런 일을 시도하실 리가 없다. 그는 자기 영예를 위해 성공시킬 일만 도모하신다. 다음 구절들은 ‘구원 성취’와 ‘명예’의 상관관계를 상기시켜 준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찐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눅 14:28-30)”.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사 46:10-11)”,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렘 33:2)”.

◈이신칭의론자는 구원 상실이 쉬운가?

공격자들은 이신칭의론자(以信稱義者)들이 구원을 ‘따 논 당상(堂上)’으로 여겨, 더 이상 구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되므로 구원상실의 위험이 따른다는 가설(假說)을 편다. 반면 자신들은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에 치심(置心)하기에 타락할 가능성이 적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너무 단순한 이분법적 가정이다.

오히려 칭의 확신론자들이 더욱 구원에 치심(置心)한다는 말이 옳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은 모두 ‘구원의 확신’으로부터 나오기에 그들이 구원에 무관심한 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앙행위를 할 때마다 구원의 은혜를 생각한다. 그들의 모든 선행과 봉사의 동기는 구원의 은혜이다.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고 한 것도 확신이 모든 신앙 행위의 근간임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생수’와 같은 ‘구원의 속성’이 피구원자로 하여금 구원을 망각하게 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구원의 생수’는 누구든지 한번 마시기만 하면 계속 그것을 부르는 마중물과도 같다.

우리는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요 4:13-14)”라고 하신 말씀을 오해해선 안 된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한다’는 말은, 한 번 구원받은 자는 그것에 자족해 구원에 무심해진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구원을 받은 자는 더욱 구원을 갈망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는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의롭다함을 받은 자는 더욱 의에 주리게 된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복이 있다(마 5:6)”고 하신 것에서도 확인 된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라는 사도 베드로의 고백 역시 ‘예수는 영생의 말씀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 외에, ‘영생의 말씀으로 배부름을 얻은 자는 영생의 말씀을 떠날 수 없다’는 뜻이다.

‘구원의 정원(庭園)’에서 달콤한 ‘의(義)의 꿀’을 따먹은 벌은 다시 구원의 정원으로 날아들게 되어 있다.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먹어보고 끝나는 사람은 없다”는 유행어처럼, 한 번 구원을 맛본 자는 그것의 중독자가 되고 만다.

‘구원 확신자’가 자나 깨나 자신과 타인의 구원에 관심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구원 회의자’가 타인의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에 관심 갖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다시 말하지만, 사람이 ‘구원의 확신’에 빠지면, 구원에 무관심해질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구원의 속성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구원 확신자’에게는 ‘구원을 즐거워하는 것’과 ‘구원의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 그가 하나님께 마음을 두는 한 구원에 무심할 수 없게 된다. 성경이 ‘하나님’과 ‘구원’을 함께 엮어놓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8)”,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시 35:9)”.

구원이 무슨 자격증 획득인 것처럼, 일단 구원의 자격증을 얻으면 그것에 대해 잊어버리게 된다고 말하는 이들은 아직 구원을 모르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과 강요로 구원에 몰입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단맛을 본 꿀벌이 되게 하여 구원의 정원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신다. 이런 '구원의 정원'을 노니는 자들에게 어떻게 ‘구원 상실’이 있겠는가?

◈인간의 조심, 노력이 구원을 지켜내는가?

인간이 자기의 구원을 지키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온전히 그것을 지켜 낼 수 없다. 스펄젼(C. H. Spurgeon)은 성도로 하여금 끝까지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견인(Perseverance)’을 성도의 노력 탓으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은혜에 돌렸다.

“저는 성도들의 끊임없는 노력을 믿지 않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성도들을 보존하심을 믿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양(羊)이 구원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나의 변덕스럽고 연약한 영혼은 하루에 수천 번도 넘게 구원에서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C. H. Spurgeon)”.

설사 구원에 인간의 협동이 가능하다 해도, 그는 자신의 변덕과 부패성으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 쏟았던 그 많은 시간과 노력들을 한 순간에 무로 돌릴 수 있기에, 그의 협동이라는 것도 믿을 수 없다.

이신행칭의자(以信行稱義者)들이 구원에 대한 사람들의 ‘노심초사(勞心焦思)’가 그들을 타락에서 건져준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전적 부패성을 모르는데서 나온 착각이다.

바울에 의하면, 율법적 두려움이 인간의 능력을 고양시켜 구원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더 무능하게 만든다(롬 7:7-9). 나아가 인간이 율법적 행위를 의지할 때 그에게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헛되게 되어(갈 2:21) 구원을 요원하게 만든다.

소위 은혜의 방편이라고 하는 것들까지도 그 자체로 구원의 보장이 되는 것이 아니다. 독경(讀經), 기도, 영적 각성, 근면, 조심 등은 구원을 이루는 은혜의 방편들이지만 그 자체가 구원을 이루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을 효과 있게 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이 둘 사이의 긴장을 놓쳐서는 안 된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은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은혜를 입히실 때, 쓰시는 외적인 수단들이 ‘말씀, 성례, 기도’이며 이러한 것들은 모두 택자들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제88문)라고 했다.

그러면서 “말씀이 구원을 얻음에 있어서 유효한 것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말씀의 전파를 효과적인 방편으로 삼으셔서 죄인들로 죄를 깨닫고 회개케 하시며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하시는데… 말씀은 그 자체의 효능이나 능력에 의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유효하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와 말씀의 사역에 의해서이다(제89문)”라고 했다.

은혜 안에서의 각성, 근면, 조심까지도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못됨을 천명한 것이다. 우리 구원을 시작하신 분도, 구원을 보존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와 피구원자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의존된다(빌 1:6).

세계 3대 칼빈주의자 중 한 분인 워필드(B. B. Warfield) 박사가 하나님은 처음부터 구원을 하나님과 인간의 합작품으로 만드시려는 의도가 없으셨음을 "칼빈의 은혜론”을 통해 말했다.

“그(칼빈)의 가슴을 충만하게 채우고 그의 혼 구석구석을 가득 채웠던 것은 죄인인 그가 그의 구주 하나님의 자유로운(값없이 주시는) 은총에 빚지고 있다는 심원한 의식이었다.

이중적인 예정교리에 대한 확신에 찬 그의 열정은… ‘협동작용’ 이라는 누룩이 제거되고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총이 순결하게 보존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는데 근거를 두고 있다. … 다시 말하지만 그의 열정의 뿌리는 죄인으로서 구속의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비하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의식 속에 뿌리박고 있다.”

썩은 동앗줄 같은 인간의 가능성에 의존된 구원 신앙의 거짓됨이여! 오직 그리스도의 피 만이 신뢰와 높임을 받기를!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