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설교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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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는 실생활에 의미를 주어야 한다

베들레헴 침례교회 담임이었던 존 파이퍼(John Piper) 목사는 그의 책 《강해의 희열》에서 강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강해는 설교 방식(주해의 연속)이 아니라 설교 내용(성경 진리)를 가리킨다. 성경 강해란 본문에 있는 내용을 끄집어내 보여주는 일이다.”

강해란 성경의 본문 설명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 본문이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를 교인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강해란 본문 말씀이 교인의 실생활에 의미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교인들 실생활에 의미가 되려면, 전달시 교인에게 도달하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아야 한다. 도리어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교인들에게 도달될 수 있는 글쓰기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글쓰기는 기본은 세 가지다.

첫째, 논리 있게 쓴다.
둘째, 단문으로 쓴다.
셋째, 독자가 공감 되게 쓴다.

이는 설교도 그리 다르지 않다. 설교자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면서 느낀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성경을 설명하거나 주석에 그친다.

이는 바른 성경 해석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설교는 성경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설교는 설명에서 그치면 안 된다. 설교는 설명 대한 논증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는 논증 위주가 아니다. 대부분 성경을 설명하고 해석한다.

둘째, 논리성을 띠고 설교하는 것이 중요함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예전에는 필자도 그랬다. 하지만 설교도 논리를 갖춰야 한다. 존 파이퍼 목사도 설교는 ‘사람’을 통해 하는 일이므로, ‘논리적 일관성을 갖추라’고 말한다.

셋째, 단문으로 쓰지 않는다.

설교자들이 설교를 단문으로 써야 하는 것을 안다. 하지만 단문으로 쓰려면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른다. 설교를 단문으로 어떻게 쓰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기본이 논리성, 단문, 공감이듯, 설교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논리가 갖춰진 설교자가 되었으면 이제 단문으로 설교 글을 써야 한다.

단문으로 써라

설교자는 전달자이다. 교인이 하나님 말씀과 커뮤니케이션이 되도록 하는 커뮤니케이터다. 설교자가 커뮤니케이터라면, 전달력에 신경을 써야 한다.

전달에는 몇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글이다. 또 다른 하나는 스피치다.

요즘은 단순함이 대세다. 집 정리, 생각 정리, 글 정리를 하라고 요구받는다. 그 이유는 단순한 것이 좋기 때문이다.

대체로 단순한 것이 좋다. 단순하면 명쾌하기 때문이다. 설교는 명쾌해야 한다. 명쾌하려면 먼저 갖추어야 하는 것이 단순함이다. 사람들은 명쾌한 것을 좋아한다. 사람들은 단순한 것을 편안해한다.

단순한 글은 쉽다. 참여정부 시절 연설기획비서관을 지낸 윤태영은 그의 책 《윤태영의 좋은 문장론》에서 ’쉽게 쓴 글‘이 감동을 준다고 말한다. 그는 쉽게 쓰려면 무엇보다 단문을 구사하면 좋다고 말한다.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교인들은 단문으로 쓰여진 설교가 잘 들린다. 교인에게 단문은 쉽고 편하게 들린다. 반면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듣기 힘들어한다.

설교자는 설교 글을 쓸 때, 단문으로 써야 한다. 단문은 글쓰기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작가인 은유는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단문 쓰기는 글쓰기의 기본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끊어쳐라, 단문을 써라, 간결한 문장을 써라, 한 문장에 한 가지 사실만 담아라, 일문일사. 거의 같은 의미, 다른 표현이다”라고 말한다.

단문이란 주어와 목적어와 동사로 이루어진 최소 형식의 문장이다. 이 단문으로 글을 쓰는 것은 쉽지 않다. 글을 쓰다 보면 원치 않게 길어진다.

은유는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문장이 길면 생각이 엉키고 문법이 틀리기 쉽다. 주어와 동사는 연인이다. 가까이 있게 하라는 말이 있다. 문장이 길수록 주술 관계가 어긋나기 쉽다. 문장이 간소해야 내용이 한눈에 들어온다.”

엉키지 않도록 단문으로 써야 한다. 그 결과 단문은 감동을 준다. 나아가 임팩트 있게 들리게 한다.

설교자를 가르치는 현장에서 종종 하는 경험이 있다. 단문을 읽으면, 같이 듣는 설교자들이 박수를 친다. 그 글이 임팩트 있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단문은 듣는 사람들에게 임팩트를 준다.

설교자는 설교를 단문으로 써야 한다. 사람들도 말을 할 때는 단문으로 한다. 중문과 복문으로 말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말은 단문으로 하는데, 글은 단문으로 잘 못 쓴다. 도리어 중문과 복문으로 쓴다. 이는 단문 쓰기가 어렵다는 반증이다.

최근에 어떤 분이 글을 봐 달라고 해서 봐주었다. 글을 봐주면서 마음이 답답했다. 단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문보다는 중문과 복문이었다. 단문으로 쓰는 훈련을 하라고 해주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글을 단문으로 쓴다고 했다. 교인들도 단문으로 써 설교를 하니 반응이 좋단다.

단문은 수고를 요한다

평상시 중문이나 복문으로 설교를 쓰던 버릇에서 단문으로 쓰려면, 수고를 해야 한다. 설교를 하려면 설교자의 수고로움은 필수적이다.

설교의 핵심이 되는 설교 글쓰기는 수고로움이 기본이다. 저는 설교자들에게 설교를 힘들게 준비하라고 한다. 이는 수고로움에 수고로움을 더하는 것이 설교자가 갖출 기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빌리 그래함 목사로부터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직자”로 불린, 대표적인 복음주의 지도자 존 스토트(John Stott) 목사가 신학생들에게 강해 설교를 이야기하면서 한 말이 있다.

첫째, 수고로운 사역을 해야 한다.
둘째, 더 힘든 수고를 해야 한다.
셋째, 좀 더 수고로운 사역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보다 훨씬 더 힘든 일을 해야 한다. 더 많은 집중력, 강조점, 헌신을 갖고 사역해야 한다.

설교 사역의 본질은 수고로움이 동반되어야 한다. 설교는 사람들을 성숙하게 만드는 일이다. 설교는 사람들을 생명으로 이끄는 일이다.

설교를 작성할 때 수고로움이 뒤따라야 한다. 만약 글이 단문이 아니라면, 단문으로 바꾸는 수고로움은 반드시 해야 한다. 이 수고로움이 교인들에게 들려지는 설교를 낳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라가게 하는데 일조한다.

교인들이 원하는 것은 단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복잡한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는 교인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설교자들은 교인이 원하는 단문으로 설교해야 한다.

단문 설교는 귀에 잘 꽂힌다. 복문이라면 신경을 엄청 써서 들어야 한다. 들을 때 신경을 계속 쓰게 되면, 교인은 설교를 듣고자 하는 마음을 접는다. 그러므로 귀에 잘 꽂히는 단문을 써야 한다.

교인이 단문으로 된 설교를 듣고자 하는 것은, 의미가 명확하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설교는 명쾌해야 한다. 명쾌하지 않으면 명쾌하기를 바란다.

명쾌하게 전달됨을 아는 작가들은 글을 단문으로 쓴다. 김대중 정부 때 연설비서관이었던 강원국은 그의 책 《강원국의 글쓰기》에서 소설가 중 강력하고 아름다운 단문 모범 사례 작가는 김훈이라고 한다.

강원국도 글을 단문으로 쓰라고 한다. 그는 말하길, 대부분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단문으로 쓴다고 말한다.

설교는 실용적인 글쓰기다. 실용적 글쓰기인 설교도 단문으로 써야 한다. 전북대 교수인 강준만은 그의 책 《글쓰기가 뭐라고》에서 단문과 장문의 비율이 7:3 이나 8:2로 어우러져야 리듬감이 있는 글이라고 언급한다. 소설이나 설교의 스토리 있는 글들은, 단문과 장문의 비율을 7:3 이나 8:2로 써야 한다.

구어체로 말하게 되는 설교는 스토리 있는 이야기 외에는 단문으로 써야 한다. ‘굳이 단문으로 써야 하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단문으로 쓰면, 설교에 교인의 관심을 지속시킬 수 있다.

사람들의 집중도가 점점 떨어지고 있다. 만약 설교가 지루하면 교인은 관심을 지속시킬 수 없다. 존 파이퍼는 《강해의 희열》에서 말의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교인의 관심을 지속시키라”고 한다. 교인의 관심을 지속시키는데 효과적인 것이 단문이다.

단문 글쓰기의 실례

누구나 능력자가 되기 원한다. 능력을 쌓는 일은 단순하다. 한 가지 일을 반복하면 된다. 독서는 반복으로 하는 행위다. 같은 책이든, 다른 책이든 반복해서 읽으면 된다. 반복하면 독서력과 실력이 쌓여진다. 반복의 결과 전문가가 된다.

쌓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누군가 쌓으면 누군가는 잃게 되기 때문이다. 쌓기보다는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고자 해야 한다. 가치 있는 것은 사람을 살린다. 하지만 쌓는 것은 불평등을 야기한다.

그리스도인은 쌓는 자가 아니다. 제대로 버리는 자다. 버리되 잘 버리는 자다. 십자가는 무엇을 버려야 하는 지를 보여주었다. 버리는 것의 가치를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쌓기만 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자다.

쌓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특히, 자기만을 위해 쌓는 자는 불행한 자다. 반대로 가치 있는 일을 하고자 하는 자는 지혜로운 자다.

그리스도인은 가치 있는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세상에서 가치 있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우주에서 가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할 가치는 세상을 살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가치를 세상에 드러나도록 할 의무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패를 방지한다. 더 나아가 세상이 나날이 새롭게 된다. 사람들이 없던 꿈까지 꾸게 된다.

쌓는 것은 반드시 부패로 이어진다. 쌓기만 결국 다른 사람과 담벼락을 만든다. 이젠 그리스도인은 쌓음에서 비움의 가치로 인생을 살아가려 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 인해 세상이 살 만한 곳이 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아름답게 세워진다.

김도인 아트설교연구원
▲김도인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김도인 목사/아트설교연구원 대표(https://cafe.naver.com/judam11)
저서로 《설교는 인문학이다/두란노》, 《설교는 글쓰기다(개정 증보)/CLC》, 《설교를 통해 배운다/CLC》, 《아침에 열기 저녁에 닫기/좋은땅》, 《아침의 숙제가 저녁에는 축제로/좋은땅》, 《출근길, 그 말씀(공저)/CLC》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