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준 장로.
▲이효준 장로.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에덴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뱀의 간교한 유혹으로 탐심이 발동하여, 아담과 하와는 낙원을 창조한 이래 최초의 죄를 짓는 조상이 되었습니다. 죄를 짓고 숨어 있는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해 속히 나와서 용서를 빌고 회개했더라면, 혹시 추방을 면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입니다. 사사시대의 끝인 사무엘 이전, 엘리 제사장은 눈이 어두워져 자신을 비롯하여 자녀들을 바로 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분별력의 부재로 그는 두 자녀를 잃는 슬픔을 당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린 사무엘을 세 번이나 부르십니다. 처음 부르실 때와 두 번째 부르실 때, 어린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부르신 줄 알고 찾아갔습니다. 세 번째 부르실 때, 비로소 엘리 제사장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줄 알고 어린 사무엘에게 일러줍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시대 상황에 맞게 필요를 따라 사람을 부르시고 택하셔서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구약 열왕기상에서는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후계자로 엘리사를 부르십니다. 그 때 엘리사는 열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왕상 19:19)”. 이 때 ‘열두 겨릿소’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의미하기도 할 것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옷을 엘리사에게 걸쳐 줍니다. 이것은 자신의 권위와 권한을 위임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 부르심에 엘리사는 즉시 응답하고 순종합니다. 이런 점에서, 엘리야와 엘리사는 바로 예수님의 예표이기도 한 것입니다.

엘리야가 승천하자, 엘리사가 그의 모든 직무와 영감을 물려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사에게 확신을 주고 선지자의 제자들과 모든 백성들에게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임을 선포하기 위하여, 요단강이 갈라지는 이적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선지자의 제자들은 엘리야의 승천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을 보며 하시는 말씀이 아닐까요?

우리 역시 주님의 부르심과 뜻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모습들을 성경을 통해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적 분별력이 필요하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시 순종하는 믿음으로 나아갔고, 100세에 주신 귀한 아들을 바치라고 했을 때도 아브라함은 어떤 다른 이유를 달거나 회피하려 하지 않고 즉시 ‘예’로 답하며 실천에 옮깁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종들 중에서 부르심에 이유 없이 순종했던 종들이 많이 있지만, 순종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과 방법대로 나아갔던 인물들도 있었습니다. 그들 중 제대로 된 삶을 살았던 인물은 하나도 없었음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주님이 주신 자유를 육신의 일에 사용하지 말고, 성령의 이끄심에 충실히 따르라고 권고합니다. 그 이유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과 말씀과 그 뜻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유행과 정보, 뉴스에만 마음과 정신이 사로잡혀 있다면, 복음의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휴대폰과 인터넷, 게임과 모바일 메신저에는 많은 시간을 사용하면서도, 하나님과의 만남에는 너무나 인색한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신의 정체성과 신분마저 잊어버리고, 늘 불안과 긴장 속에 매일 매일을 살고 있습니다. 인생 여정에는 언제나 핵폭탄과 같은 것이 존재합니다. 그 고난과 역경을 기도로 이겨낸 사람은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성숙해집니다.

매일 기도하되, 하나님이 거하실 공간을 남겨 놓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기도로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만,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겸손함 역시 필요한 것입니다. 불완전한 피조물인 우리가 온전한 하나님 속에 포함되고자 하는 갈망이 기도의 동기요 시작입니다.

모든 존재는 바로 내가 주님과 맺는 관계에 의해 지탱되기에, 이 관계는 내가 존재하는 사실보다 더 중요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바로 주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입니다. 내가 주님의 현존 앞에 서 있음을 진지하게 의식하고 알게 해주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소리보다 주님의 부르심과 말씀에 충실할 수 있도록, 늘 주님과의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 신앙인들은 늘 기도하며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는 내가 품고 살아가는 자존심, 그리고 교만,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늘 형식적이며 겉과 속이 다른 신앙인으로서 살아가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는 체면도 없습니다. 그냥 ‘예’ 라고 순종하며 따르는 길밖에 없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이별의 고통과 십자가의 고통을 감추시고, 피눈물 나는 사랑의 마음으로 제자들의 지저분한 발을 씻어주시면서, 너희들도 세상 속으로 나아가 내가 보여준 그대로 남의 발을 씻어주라 일러주고 계십니다.

무더운 여름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옆에서 조금만 싫어하는 소리를 해도 짜증이 나는 여름입니다. 필자는 누구를 씻어주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씻어주기는커녕 남에게 오히려 먼지를 뒤집어 씌우며 살아가고 있지나 않은지 점검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기의 엉덩이를 씻어주는 엄마의 마음, 아들의 아픈 마음을 씻어주는 아버지의 마음, 어떻게 하면 가족 구성원들의 어려움을 조금 더 살펴보고, 나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아닌지 예의 주시하며 마음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모두가 주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셨던 사랑으로서, 우리 신앙인들은 주님께서 부르셨던 음성을 듣고 곧장 주님께로 달려가는 용기 있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족 중이나 이웃들 중 유사종교에 빠져 고통스러워할 때, 유사 종교에 빠지지 않도록 식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키워나가야 하겠습니다.

분별력 없이 사이비 이단에 빠진 자들을 주님께서 보시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요? 그렇다 해서 그들을 내 쳐서는 안 될 것이며, 하나님 말씀을 정확하게 짚어서 그들에게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르쳐 배우게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엘리사와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곧장 달려가는 우리 모든 신앙인들이 되어서, 늘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귀한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효준 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