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보리울의 달
▲만화 <한서 남궁억> 中.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키아츠 제공
눈을 떴을 때는 창문에 희붐한 새벽빛이 어려 있었다. 사방이 고요했다.

남궁억은 그 빛을 바라보며 잠시 명상에 잠겨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베고 잔 베갯모에는 활짝 핀 무궁화 문양이 장식되어 있었다. 부인이 손수 지어 준 것이었다.

그는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이불을 갠 뒤 싸리비로 방바닥을 쓸어냈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갔다.

남궁억이 보리울에 온 지도 벌써 보름이나 지나 봄빛이 완연했다. 집안의 울 밑 여기저기에 살구꽃, 민들레, 개나리, 채송화 외에도 여러 가지 이름 모를 봄꽃들이 만발해 향기를 풍겼다. 얼마 전에 씨를 뿌려 놓은 무궁화는 파란 새싹을 내어 하루하루 자라나고 있었다.

남궁억은 우물물을 퍼올려 우선 꽃들에게 정성 들여 뿌려 주었다. 무궁화 새싹 앞에서는 마치 자식이나 손자라도 되는 양 정답게 속삭였다.

“얘야, 부디 무럭무럭 자라거라. 앞으로 이 땅을 무궁화 강산으로 만들어 보자꾸나.”

그는 세수를 하고 나서 웃통을 벗고 물에 수건을 적셔 냉수마찰을 하기 시작했다. 등과 가슴팍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갔다.

이런 모든 일들은 그가 이곳에 온 후로 매일 빠짐없이 하는 일과였다.

그는 옷을 단정히 입은 후 대문을 나섰다. 푸르스름한 새벽길은 고요했다. 집 옆의 대밭에서 잠을 깬 참새들이 짹짹거렸다.

보리밭 언덕을 지나 쭉 가니 유리봉으로 통하는 오솔길이 나왔다. 풀잎에 맺힌 이슬을 털며 그는 산으로 올라갔다. 맑은 공기와 규칙적인 생활 덕분에 그동안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그는 별로 힘들어 하지 않았다.

유리봉 꼭대기에 올라선 남궁억은 서서히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두 팔을 쭉 펴 심호흡을 했다.

푸른 소나무가 늘어선 한쪽에 둥근 바위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그 위쪽은 좀 평평했다. 남궁억은 그 위에 단정히 꿇어 앉아 해를 향한 채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하나님이시여, 저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사옵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모든 백성들이 저마다 제 뜻을 펼치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옵니다. 이 한 몸 바쳐 불사르겠으니 부디 우리나라의 독립을 주시옵소서….”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어느새 해가 저쪽 먼 산마루 위에 밝은 빛을 뿌리며 떠오르고 있었다. 일어서는 그의 눈시울이 촉촉이 젖어 보였다.
그는 매일 새벽이면 유리봉에 올라 기도하며 자기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구상했다.

어느 날 남궁억은 드디어 자신의 긴 구상을 실천으로 옮겼다.

그것은 보리울 마을에 학교를 지어 새나라의 일꾼을 길러내는 일이었다.
궁벽한 보리울에는 학교도 없고 교회도 없었다. 기독교인은 면 단위에 한 명 정도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집 사랑방에 아이들을 모아 가르쳤다.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위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의 마음속에 자부심과 애국심을 심어 주었다. 그리고 성경 구절을 함께 읽고 쓰며 한글에 친숙해지도록 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보리울의 달 한서 남궁억
▲소설 <보리울의 달> 저자 김영권, 제작 키아츠 <보리울의 달>은 한서 남궁억 선생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한서 남궁억 선생의 소설화된 파란만장한 인생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도록 안내한다. 만화 <한서 남궁억> 저자 김재욱, 그림 최현정, 제작 키아츠 <한서 남궁억>은 남궁억 선생의 위대하고도 큰 뜻을 남녀노소 모든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화로 표현한 책이다. 남궁억 선생이 여러 등장인물과 역사를 헤쳐 나가는 이야기가 실감나고 흥미롭게 담겨 있다.
어린 제자들 중엔 외손녀인 장재옥도 있었다. 열 살쯤 된 그 소녀는 남궁억의 큰딸인 숙경의 자식이었다. 얼마 후 드디어 남궁억은 자신의 사재 3천 환을 들여서 대지를 매입하여 열 칸짜리 한옥 예배당을 지었다. 그리고 예배당 건물에 모곡학교를 열었다.

모곡학교에는 인근의 어린이와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한서 남궁억의 명성을 들은 청년들이 입학해 왔다.

모여든 학생들 가운데는 머리를 땋아 갑사댕기를 멋지게 궁둥이까지 축 늘어뜨린 총각이 있는가 하면, 상투에 초립을 쓴 어린 신랑도 있었고, 통량갓을 번뜻이 쓴 나이가 35세나 되는 중년의 학생도 있었으며, 하이칼라 머리에 어색한 양복을 입은 서울에서 내려온 학생도 있었다.

아직 남녀유별의 관념이 남아 있던 때라서인지 마을의 처녀들은 나오지 못하고, 어떤 쪽진 부인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개학식에서 남궁억 교장 선생님은 열띤 목소리로 연설을 했다.

“세상은 급속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원래 모든 사물은 변화하는 것이며,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도 변화하되 어디까지나 좋은 방향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만약 서양의 나쁜 점을 따라하다가 우리의 미풍양속까지 천대하고 버린다면 결코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좋은 점을 배워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고 발전하기 위하여 공부하는 것입니다. 제 아무리 천재나 수재라 하더라도 배워서 옳게 깨우치지 못한다면 악당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물 안의 왕개구리도 제 잘났다고 으스대면서 변화하는 바깥 세상의 문화를 배우지 않는다면 나중에 똥파리에게마저 비웃음을 당할 것입니다.

파리는 윙윙 날아다니면서 많은 것을 보고 나름대로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파리처럼 남에게 욕을 얻어먹는 존재가 되지는 맙시다.”

남궁 교장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계속했다.

“저는 다음 사항을 강조합니다. 배워서 아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알게 되었으면 실천을 해야만 한다!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지 않고 게으르게 입만 나불나불대서는 왈왈 짖는 개와 별 다를 게 없습니다.

실천을 해야만 여러분이 이 민족과 온 인류에게 이로운 것을 창조하여 실제로 도움을 주게 될 터입니다.

오늘날처럼 어려운 시대일수록 서로 간에 사랑이 필요합니다. 내 한 몸 가누기도 힘겨운 세상이지만, 그럴수록 사랑으로 한마음 한뜻이 되어야겠지요.

흙에서 막 솟아난 새싹조차도 자신의 주변을 향해 수줍은 듯 사랑의 느낌을 표현하지 않습니까? 진딧물도 오고 개미도 기어오릅니다. 새싹은 괴로울 수도 있을텐데 찡그리지 않고 그들에게 자신의 수액을 나눠주지요. 그러면서 척박한 땅에서 고개를 들어 푸르른 하늘을 쳐다봅니다.

하루하루 새싹은 자라나 큰 나무가 되어 갑니다.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불어 잎과 가지를 꺾어도 나무는 울지 않고 자라서 모든 생명에게 산소와 수액과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줍니다.

한 그루의 나무는 비록 온갖 어려움을 겪을지언정 자신을 올곧게 성장시켜, 우주의 대자연으로부터 받은 생명의 기운을 모두들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김영권 남궁억
▲본지에 <꽃불 영혼>에 이어 <보리울의 달>을 연재하고 있는 김영권 작가.
김영권 작가

인하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한국문학예술학교에서 소설을 공부했다. <작가와 비평> 원고모집에 장편소설 <성공광인의 몽상: 캔맨>이 채택 출간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작품으로는 어린이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그린 장편소설 <지옥극장: 선감도 수용소의 비밀>, <지푸라기 인간>과 청소년 소설 <걷는 동상>, <퀴리부인: 사랑스러운 천재>가 있으며, 전통시장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그린 <보통 사람들의 오아시스> 등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