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이경섭 목사. ⓒ크리스천투데이 DB
◈‘큰 믿음’은 양이 아니라 무게이다

4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믿음이 크다고 칭찬한 사람들이 종종 등장한다. 믿음이 크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그것은 단지 뜨거운 신앙 열정을 보인다거나 신앙적 활동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눅 10:39-42).

‘선지자 노릇하며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고(마 7:22-23)’,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주유(周遊)해도(마 23:15)’ 주님과 무관할 수 있다.

종교적 열심과 분주함이 신앙을 대신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작음’의 상징인 ‘겨자씨’ 비유에서(마 17:20) 보듯이, 믿음은 외양보다 내면의 생명 무게로 재단된다(마 13:31). 겨자씨는 매우 작을지라도, 그 안의 생명으로 인해 ‘산을 옮길 만한’ ‘큰 믿음’을 낼 수 있다(마 17:20).

‘큼’의 기준은 언제나 ‘생명’과 또 ‘생명을 살리는 것’과 관련된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요 14:12)”고 하신 예수님 말씀에서, ‘큰 것’은 생명에 관한 일이었다.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증명 할 수 있다.

누가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을 건졌다면, 그는 ‘큰 일’을 한 ‘큰 믿음’의 소유자이다. 한 생명의 중량(重量)이 천하보다 무겁기(마 16:26) 때문이다.

반면 ‘겨자씨’의 반대 개념인 ‘가라지’는 그 안에 생명이 없다. 그 안에 생명 중량(重量)이 없으니 외양의 크기와 상관없이 바람에 날릴 뿐이다(시 1:4). 그리고 그 ‘가라지’ 믿음으로는 당연히 생명에 관한 ‘큰 일’도 못한다. ‘생명만이 생명을 낳는다’는 원리 그대로 이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믿음


사도 바울은 ‘성령으로 아니하면 예수를 주라 할 수 없다(고전 12:3)’고 했다. ‘성령으로 예수를 주로 믿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도량(度量)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뜻이다.

예수 신앙은 신적(神的) 차원의 일이고, 신적 차원의 믿음이기에 그것은 또한 ‘큰 믿음’이다. 사람에게서 난 종교적 신앙은 아무리 크고 대단해 보이는 일을 성취해도 신적인 것이 아니기에 ‘큰 믿음’일 수 없다. 사도 바울은 그런 짝퉁 믿음을 ‘사람의 지혜위에 세운 믿음(고전 2:5)’이라고 했다.

그가 예수 신앙을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했음은 그것이 신적(神的) 산물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신적 산물인 예수 신앙은 작은 믿음일 수 가 없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이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예수님이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고 하신 것은, 그의 예수 신앙이 사람의 도량을 뛰어넘은 신적(神的) 기원을 가졌다는 뜻이다. 이런 신적 기원을 가진 예수 신앙은 당연히 ‘큰 믿음’이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중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칭찬한 ‘믿음의 3인방’이 있다. 가나안 여인(마 15:22-28), 혈루증 여인(마 9:20), 백부장의 믿음(마 8:8)이 곧 그것이다.

그들 신앙의 외양은 ‘불퇴전의 끈기, 저돌성, 겸비함’ 등으로 특정되나, 그것들의 기저(基底)에 놓인 신앙 핵심은 ‘예수를 사람의 몸을 입고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이었다. 전자는 후자의 열매였다.

자신들 앞에 인간의 모습으로 서 있는 ‘예수’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온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도량(度量)으로만 가능하다. 신적 도량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 예수는 오직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 목수 예수일 뿐이다(마 13:55-58).

배 안에서 풍랑을 보고 기겁하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이 ‘왜 믿음이 없느냐(막 4:40)’고 책망하신 것도 그들의 나약한 의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과 동승(同乘)한 예수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었다면, 파도를 보고 그렇게 혼비백산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세상과 사단을 이기는 ‘큰 믿음’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이라고 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 5:4)”,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계 12:11)”.

세상과 사단의 권세를 이기는 믿음 보다 더 ‘큰 믿음’이 어디 있겠는가? 가히 그것은 신적(神的) 도량(度量)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내는 믿음


믿음은 단지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만 그 목적이 있지 않다. 믿음은 사람의 필요를 너머 하나님과 그의 영광을 위한 공공성을 담지 한다.

또 흔히 ‘믿음’을 인간의 의지, 결단의 산물로 간주하고, ‘큰 믿음’이란 그런 것들을 극대화한 것으로 파악한다. 이런 왜곡된 믿음 인식은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주목하게 하고, 인간 중심의 신앙으로 흐르게 한다.

실제로 과거, 믿음을 분석하는 이들 중에는 믿음을 인간의 지정의(知情意)와 연결 짓기를 좋아하고, 그 중에서도 ‘의지(意志)’에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분석은 믿음을 사람의 의지력이나 결단의 산물로 곡해하도록 했고, 훌륭한 믿음은 ‘의지적 믿음’이라고 결론짓게 했다.

따라서 믿음이 크다는 것을 ‘강한 의지력으로 환경의 방해, 주위의 영향을 받지 않고 꿋꿋이 밀고 나가는’ 불퇴전의 용기 같은 것으로 규정하게 했다.

이런 인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히 믿음을 시여(施輿)하시는 하나님보다는 ‘믿는 자’에게 초점을 맞추게 했다.

일부 기독교 전기(傳記) 작가들이 신앙 위인(偉人)들의 전기를 쓸 때 ‘이기게 하신 하나님’보다는 ‘이긴 자(a winner)‘를 더 강조하고, 독자들의 시선을 위인을 위인 되게 한 하나님보다 위인의 신앙, 충성에 경도(傾度)되게 하는 것도 다 이런 시각에서 비롯 됐다.

신앙 위인(偉人)의 출현은 그들 자신의 의지력과 과단성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의지의 산물이다. 즉,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그들의 의지가 정복된 사람들이 위인이라는 말이다.

그들이 이룬 괄목할 만한 업적은 그들이 ‘하나님을 향해 가진 비전’을 이루려고 하나님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덕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이 그들을 집요하게 추적한 덕분이다.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라면,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빌 3:12)’ 곧, 수동적(受動的)으로 능동(能動)을 한 결과였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들의 견고한 신뢰도 순수하게 자기의지력의 발동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강권적 이끄심에 대한 반응(순종)의 결과였다.

사도 바울이나(행 1:5) 아브라함의(창 12:4) 신앙 궤적도 모두 그런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은 흔적이다.

그들에게서는 오늘날 신앙 영웅담의 주인공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인간의 위대함이나 그들의 업적 선양(宣揚) 같은 것은 없고, 그들 삶 속에서 일하신 하나님의 손끝과 그의 의지만 드러난다. 그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하나님이 하셨다(고전 15:10)’였다.

이렇게 하나님 주도적인 신앙은 하나님 중심적 신앙과 자연히 연결된다. 하나님의 이끄심을 받는 성령의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열망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처음엔 구원받기 위해 믿었지만 구원받은 후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히 11:6)’을 지키려고 믿는다.

아들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아브라함의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던 것도(롬 4:19-20) 흔들림 없이 약속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오늘날 신실한 성도들이 도무지 믿음을 견지할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적인 환경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를 견지하고, 하나님 사랑을 믿는 일에 지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늘날 ‘큰 믿음’의 의미 규정이 왜곡되고 있음은 심히 유감이다.

진정한 의미의 ‘큰 믿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는’ 생명있는 믿음 곧, 자신과 남을 살리고 이기는 믿음이다.

그리고 ‘사람의 위대함’보다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는 믿음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믿음이다. 이 외에 다른 ‘큰 믿음’이 어디 있겠는가?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